어떤 책은 읽는 의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읽기라는 행위조차 왜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종종 드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수록 그래도 감이라는 게 생겨서 그런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어졌는데, <수영장 도서관>은 아주 오랜만에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하는 회의감에 여러 차례 부딪혀야만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것은 이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전작, 2004년 부커상 수상작인 <아름다움의 선>을 꽤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앨런 홀링허스트의 작품은 애초부터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지나치리만큼 세밀한 묘사 때문에 좀 읽다 보면 지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작품도 꽤 길다. <아름다움의 선>은 빽빽한 글씨로 600쪽을 훌쩍 넘고, <수영장 도서관>도 500쪽이 넘는다. 섬세하고 우아한 문장, 진저리날 만큼 세밀한 묘사 등등 어떤 의미에서는 요즘 작가의 책을 읽는 것 같지 않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 <수영장 도서관>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때는 그런 탓이려니 했는데, 실은 게이 섹스에 대한 과한 묘사가 몇 번이나 책을 덮게 만들었다.
그래도 또 읽었나갔다. 작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스물다섯의 예쁘장한 게이 청년 ‘윌리엄’은 남부러울 것 없는 처지다. 성소수자라고 하면 어쩐지 차별도 많이 받을 것 같고, 박해도 받을 것 같고, 사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에게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국의 잘 나가는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유명한 사립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를 나왔고, 할아버지는 또 엄청난 부자라서 그에게 럭셔리한 아파트를 척하니 사주셨고, 그는 그런 아파트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한량처럼 지낸다. 아니 그가 하는 일이라곤 고급 신사클럽인 ‘코리’에 가서, 수영을 신나게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몸을 탐색하고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것도 부족해서 공중 화장실에서 급만남을 꾀하기도 하는데, 어느 날은 자신처럼 공중 화장실에서 파트너를 찾아 전전하던 한 노인이 심장 발작이 와서 쓰러진다. 멍청하게 서 있는 다른 남자들을 헤치고 윌리엄은 그 노인을 심폐소생술로 구해주는데, 그는 알고 보니 같은 코리 회원인, 여든 넘은 ‘찰스’이다.
스물다섯 게이 ‘윌리엄’과 여든 넘은 게이 ‘찰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고급 신사 클럽 코리의 회원이라는 것 외에 둘 다 귀족 출신에 명문 사립학교를 거쳐 그 학교에서 게이로서의 정체성과 성(性)에 눈을 떴고 옥스퍼드를 나온, 어떤 면에서는 영국 사회에서 주류이면서도 그들의 성 정체성 때문에 비주류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찰스는 윌리엄에게 자신의 회고록을 써보지 않겠느냐면서 십대 때부터 적어 나간 일기를 건네는데, 윌리엄은 그 일기를 읽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 <수영장 도서관>은 이렇게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태어난 ‘찰스’라는 인물과 1950년대 후반 태생인 ‘윌리엄’이라는 인물의 삶을 겹쳐 보여주면서 1900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영국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다뤄나간다.
이 작품의 거의 절반을 넘어가기까지는 윌리엄, 그리고 찰스의 화려한 남성편력기가 그려져서 대체 작가는 이런 설정으로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궁금해진다. 물론 찰스에 비해 1980년대에 20대를 보내고 있는 윌리엄의 생활은 한결 자유롭고 편해 보인다. 파트너를 찾기도 쉽고 어떤 사회적 제재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 태생인 찰스는 그의 성적 지향성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고 징역을 산다. 동성애에 관한 차별적 법이 어느 정도 느슨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윌리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게다가 찰스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그를 처벌함으로서 모종의 이익을 얻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윌리엄의 할아버지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초반부터 그토록 자유로운 윌리엄의 성생활을 노골적으로 그려낸 것은 1980년대 영국은 과거에 비해서는 동성애에 대해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얼마쯤은 자유로워졌음을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물론 그 이후 대처 집권 시기에는 동성애 마녀사냥법이 부활해서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도 퇴색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이전 시기까지만 그리고 있다).
찰스의 일기를 통해 맞닥뜨린 엄청난 진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성적 방종이 어찌 보면 높은 지위와 신분, 부(富)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며 그 바탕은 다른 동성애자를 탄압한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모순을 마주한 윌리엄은 당연히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기의 자유로운 생활의 모순을 마주한다. 게다가 스킨헤드족으로부터 뜻밖의 린치도 당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동성 섹스 파트너를 공공연한 장소에서 찾으려다 경찰의 함정 수사에 걸리는 일도 곁에서 지켜보게 된다. 예쁘장한 부잣집 게이 도련님의 생활은 이런 균열을 겪으면서 그 자신이 완벽하게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성(城)이 자신의 성(性) 정체성 때문에 언제고 흔들릴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친구를 위해서도 무언가 행동할 것임을 은연중 암시하고, 실제로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또 아무리 찰스가 자기 할아버지로부터 박해받은 피해자임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그의 개인적 한계(포르노 제작 등)를 알고 난 뒤에는 그의 회고록 쓰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윌리엄의 각성은 그다지 센세이셔널하지는 않다. 그 또한 찰스처럼 미성년자인 10대 소년을 늘 자기 파트너로 점찍지 않는가. 게다가 그 청년들은 둘 다 유색인이거나 노동자 계층 출신이다. 그는 그런 소년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라도 하는 듯이 대한다. 식민지 관리로서 유색인을 대해왔던 찰스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게다가 제아무리 윌리엄은 각성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은 결국 또 다른 아름다운 미소년에게 눈길을 주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윌리엄 분명 전과 달리 자신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언제고 무너질 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또 다른 쾌락을 좇기를 멈추지 못한다.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결코 미완성인 성장. 어쩌면 인간의 성장이 다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