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겨놓아야만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래봤자 기껏해야 놀거나, 책을 읽거나, 자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래야지만 안심이 됐다. 아마,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리기가 일쑤여서 더 미리미리 해둔 건지도 모르겠다. 준비물을 챙기는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연필을 깎을 때였다. 샤파,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에 연필을 돌려서 그 뾰족한 심들을 나란히 필통에 넣어둘 때가 가장 좋았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모범생의 범주를 벗어났고, 그런 ‘경건한’ 순간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 그런 순간이, 아니 그와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요즘은 저녁마다 커피를 간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에 커피 알갱이를 넣고 커피가 분쇄될 때까지 손잡이를 돌린다. 마치 어릴 적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릴 때와 비슷하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아침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서 텀블러에 담아서 갖고 나가는데, 여름에는 아무래도 뜨거운 커피를 찾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게 전날 밤에 미리 커피를 내려놓고는, 아침에는 텀블러에 얼음과 커피만 넣어서 출근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 과정이 무척 귀찮아서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투 샷이나 내려서 얼음을 넣고 커피를 넣고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엊저녁도 커피 알갱이를 분쇄기에 넣고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부엌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면서 무심히 커피를 갈다가, 문득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리던 때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연필 몇 자루로 내일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커피를 갈면서 내일을 준비하는구나. 열 살 이전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늘 이렇게 뭔가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쩐지 한숨을 폭 내쉬다가 문득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준비할 게 있는 삶이 얼마나 좋아? 더는 연필을 깎지 않고,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온다면 또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았다. 손잡이를 더 열심히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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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왠지 어릴적에(지금도 그렇고) 완전 모범생에 학구파 이셨을거 같아요. 그리고 커피를 갈면서 저런 생각을 하시는군요. 전 맨날 사먹거나 카누만 타먹어서 ㅜㅜ 반성해봅니다^^

잠자냥 2021-06-14 16:28   좋아요 4 | URL
모범생이었다가 잠시 방황(?)하고 술마시고 놀다가 다시 범생이 라이프로 돌아왔습니다. 범생이라기보다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삶에서 벗어난 삶이랄까요. ㅎㅎㅎ 커피 갈다 보면 그 반복적인 행위에 멍때릴 때도 많은데 저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ㅎㅎㅎ

다락방 2021-06-14 16:0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주 어릴적엔 모범생일 수 있어도 청소년기에는 모범생도 아닌 그렇다고 날나리도 아닌 그 어디쯤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생(사실은 국민학생) 때는 엄청난 모범생이어서 전교에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대단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리퀸 문고 읽다가 선생님께 걸리는... 그런 아이였지요.. 흠흠.

그렇지만 준비하는 삶, 이라는 잠자냥 님의 페이퍼에는 매우 많이 진심으로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매일에 대해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는 삶이 슬프다면, 저는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도 슬플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아주 많은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는 분명 ‘어떤 책을 가져가지?‘ 하고 고민하는 과정 그리고 챙기는 과정도 필수거든요. 세 권 가져갈까 다섯권 가져갈까, 어느 책을 가져갈까 고르는 순간은 정말 너무 짜릿하고 행복하죠.

삶은 그런 작은 준비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오늘 페이퍼 너무 좋네요, 잠자냥 님.
:)

잠자냥 2021-06-14 16:34   좋아요 4 | URL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는 친구들이 보통은 얌전한 성향이 있지요. 그래서 어른들은 그걸 범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같고 어린이들은 어른 말 듣고는 아 내가 그런가보다 하는데, 사실 마음속으로는 (특히 문학 같은 책 많이 읽다 보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삐딱선 타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지요. 저도 그랬던 거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은 소심한 성격이라 대놓고 반항은 못하고 은근히 그 어디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노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 다락방 님도 그랬겠지요.ㅎㅎㅎ

맞아요. 준비할 게 없는 삶은 참 여러 가지로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여행이 즐거운 것도 준비하는 그 과정이 즐겁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 그것도 슬플 것 같아요. 그래서 다부장님(과 저를 비롯해 여기 알라딘 개미지옥 개미들)은 그렇게 읽을 책을 무쟈게 준비하나 봅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21-06-14 16:2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뒤돌아 보면 모범생이었던 적이
1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숙제는 귀찮아서 안하고 그냥 몸으로
때웠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타이어를
받치고 담치기를 하여 야자 시간에
오락실에 가서 스노볼인가 뭔가하는
오락을 했습니다.

그랬던 닝겡이 지금은 꾸역꾸역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질을 하고 있습니다.

뭐 그랬다고 합니다.

잠자냥 2021-06-14 16:40   좋아요 5 | URL
오, 레샥매냐 님이 책 읽는 모습 보고 부모님이 기절하신 거 아닙니까? ㅋㅋㅋ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늦게 철들다니! 이런? ㅋㅋㅋㅋ
스노우볼이 뭐지? 하고 검색해보니... 아아, 이 게임 저도 해봤어요. ㅋㅋㅋㅋ 잘하지는 못함.

페넬로페 2021-06-14 16: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밤 쌀을 씻으며 내일을 준비해요. 그러면서 아이고 또 낼은 무슨 음식을 헤서 먹여야하나 하는 고민을 합니다~~커피콩을 갈면서 하는 잠자냥님의 생각들이 넘 좋네요^^

잠자냥 2021-06-14 17:04   좋아요 4 | URL
아, 쌀씻기! 요즘 코로나 때문에 회사에 도시락 싸갖고 다니다 보니 며칠에 한 번 씻는데도 쌀 씻는 거 정말 귀찮더라고요. =_= 쌀씻기보다는 커피콩 가는 게 덜 귀찮은 거 같아요. ㅎㅎㅎㅎ

mini74 2021-06-14 1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저녁을 드시고 나면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주셨어요. 연필잡는게 서툴러 자꾸 연필심이 부러져서 하루에 다섯자루에서 여섯자루씩 깎아야 할 연필이 늘어나자. 아버지가 잠자냥님꺼와 같은 연필깎이를 사오셨어요 ㅎㅎㅎ

잠자냥 2021-06-14 22:38   좋아요 2 | URL
ㅎㅎ 그때 초딩들의 가장 인기 있는 연필깎이가 아니었을까요! ㅎㅎ

그레이스 2021-06-14 19: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들을 너무 잘 쓰셔서...
소재도 다양하고...
^^;

잠자냥 2021-06-14 22:38   좋아요 1 | URL
알라딘 개미지옥에서 이 정도는 보통입죠! ㅎㅎ

단발머리 2021-06-15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필 깎는 삶도 커피콩 가는 삶도, 잠자냥님 손끌을 거치니 근사한 추억이자 오늘의 기억이네요. 숙제 마치고서야 놀았다는 범생이 생활은 저에겐 좀 멀지만 ㅋㅋㅋㅋㅋ 저도 오늘은 커피를 좀 내려야겠어요. 마침 비도 오고 딱이에요. 알라딘 너무 좋네요. 이런 좋은 글을 공짜로 읽네요 ㅎㅎ

잠자냥 2021-06-15 09:1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알라딘 개미지옥의 개미들은 다들 너무 칭찬을 잘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오늘 날씨 비오니까 커피는 더 맛나겠죠?ㅎㅎ

독서괭 2021-06-15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출산 전에는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콩을 갈았었는데.. 살며시 올라오는 그 향기. 너무 좋죠? 전 연필깎기는 이용하지 않고 커터칼로 깎는 걸 좋아했어요. 요즘은 서재이웃님들 글 보며 힐링합니다~

잠자냥 2021-06-15 14:37   좋아요 1 | URL
저는 칼로 연핀을 정말 잘 깎는 사람 부러워했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재주가 있는지. 독서괭님도 그런 재주를 갖고 계시군요!

공쟝쟝 2021-06-1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맘 잘 알지만... 잠자냥님께 자동 커피 그라인더를 추천하며... (쿠팡에서 3만원) ... 원두 오도독 가는 거 참 좋아요. 근데... 그라인더 사고 나서 ㅋㅋㅋㅋ 이걸 왜 이제야 샀노.... ㅋㅋㅋ 원두 갈 때 솔직히 좀 손목 팔 아프지 않아용??? ㅋㅋㅋ

잠자냥 2021-06-18 09: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저도 그거 써봤는데(엄마집에 있음요), 편하긴 합디다. 식구들이 여럿 있을 때 수동으로 갈면 그거 가는 사람은 거의 ㅋㅋㅋㅋㅋㅋㅋ 막판에 알통이 ㅋㅋㅋㅋㅋ 그래서 사람 많을 땐 자동으로 쓰는데요, 저처럼 고작 1~2인용 내리는 사람은 수동으로도 만족합니다요- 난 계속 칼리타 쓰겠소.(왜 계속 희곡 말투냨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