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 울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자꾸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 또르륵. 또르륵. 흐르던 눈물을 닦지도 않고 들고 있던 종이 뭉치만 보던 은이 힘차게 눈물을 스윽 스윽 닦고는 하얀 종이 뭉치를 다시금 고쳐 든다.

  은이 청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정말 잠깐이었다. 아빠가 퇴근해서 혹시 라면이라도 찾을까 싶어 슈퍼에서 라면 몇 개랑 빵을 샀었다. 목줄은 했지만 좁은 골목길에서 혹시라도 갑자기 튀어 나오는 자전거나 자동차에 청이가 다칠까봐 은은 슈퍼에서 나오면서부터 청이를 안고 있었다. 청이가 아직 새끼지만 크기가 큰 종인데다가 짐까지 더해지자 은이 제자리에서 쉬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거기다가 언제부턴가 운동화 끈까지 풀려서 젠 걸음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 하기를 몇 번. 불현듯 자신이 넘어져서 청이를 깔고 엎어질 게 걱정이 된 은이 결국 청이를 내려놓고 대신 목줄을 밟고는 운동화 끈을 묶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반대쪽 발도 앞으로 끌어다가 느슨해진 끈을 풀고는 정성스레 매듭을 만들어서 몇 번이고 세게 잡아 당겨 다시 묶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다시 풀려서 청이를 내려놓는 일이 없게 몇 번을 힘차게 묶고서야 안심하고 허리를 폈다. 그때까지도 은은 생각을 못했다. 은이 운동화 끈이 풀어지지 않은 발을 앞으로 당기는 순간 청이를 잡고 있던 줄이 놓아 질 거라는 걸. 허리를 펴며 검은 색 비닐 봉투를 들었을 때야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탄식과 같은 소리가 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청이야…….”

  처음에는 작게 부르던 청이의 이름이 골목 안을 가득 메우고 숨이 턱에 차도록 동네를 다 뛰어 다녔지만 은은 청이를 찾을 수 없었다. 검은 비닐 봉투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손은 언제부터인가 빈손이다. 그렇게 온종일 동네를 헤매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은은 아빠가 일하는 경찰서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빠가 놀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야 은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터진 눈물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도 때도 없이 흐른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자락으로 훔치며 은은 붙여 놓은 전단지들을 차례로 확인한다. 근처 동물병원이나 온갖 가게며 상가에서 다시 물어 보기를 몇 번, 울음을 그쳤다 다시 울기를 몇 번을 하고 나서야 은의 발걸음이 집을 향한다. 하지만 오래 못 가 집 근처 학교 앞 전봇대에 다시 멈춰 선다.

  “청이야,”

  발꿈치를 들고는 전단지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댄다. 청이가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다.

  “찾고 싶어?”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아이 한명이 학교 담벼락에 기대있다. 은은 소리에 너무 놀라서 아이가 낮게 내뱉은 말을 잘 듣지 못했다.

  “됐다. 그냥 두자. 갑자기 무슨……. 그 사이에 팔려도 벌써 팔렸겠다.”

  아이는 귀찮은 듯이 몸을 돌렸다. 은이 그때서야 아이의 말을 알아듣고는 아이 앞을 가로 막았다.

  “봤어, 우리 청이, 봤어? 어디 있어? 응? 어디 있어?”

  방금 전까지 힘없이 울던 아이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돌아서던 아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다. 무슨 말이든 듣지 않고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기세다. 모자를 쓴 아이가 고개를 약간 들고는 은을 잠시 쳐다본다.

  “씨, 괜히 아는 체는 해가지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이것 좀 놔.”

  아이가 은이에게 잡힌 옷자락을 풀려고 한다. 하지만 은은 더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또르륵. 옷자락을 움켜쥐고 아이만 보고 있는 은의 눈에서 한 아름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진다.

  “야, 너 왜 이래, 정말. 짜증나게. 알았어. 얘기 할 테니까 울지 좀 마. 아휴, 진짜.”

  아이가 당황한 듯 은을 달래면 떠내려고 하지만 은은 더 달라붙는다. 아이는 그런 은을 황당한 듯 보더니 피식 웃는다.

  “너, 이 학교 다녀?”

  아이가 턱으로 학교 쪽을 가리킨다.

  “응.”

  은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진다.

  “좋아. 그럼 하나만 약속해. 학교에서 나 아는 체 하지 마. 절대로. 나중에 네 옆을 지나가도 본 척도 하지 말고 말 걸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넌 날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거야. 알았어?”

  “너도 우리 학교 다녀?”

  은이 묻는다.

  “너 지금 내말 뭐 들었냐? 됐다, 놔!”

  아이가 거칠게 옷자락을 잡은 은의 손을 떼어내려고 한다.

  “알았어, 알았어. 모르는 척 할게. 아는 척 안 할게.”

  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내가 얘기했다는 것도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이거 농담 아니야. 그럼 나 또……. 어쨌든 절대로 얘기하면 안 돼. 안된다고. 약속할 수 있어?”

  은의 고개가 아까 보다 더 힘차게 끄떡여진다.

  “정확한 위치는 나도 잘 몰라.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그 사이 정말 팔렸을지도”

  아이는 쉽게 결심이 서지 않는지 말을 돌린다.

  “약속할게. 진짜야. 너 아는 체도 안하고 그리고 정말 아무한테도 애기 안할게. 정말…….”

  은이 말을 다 못하고 울먹이며 아이에게 매달리자 눈물 한 방울이 은이 잡은 아이의 옷자락으로 떨어진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은을 보더니 아까 옷자락을 잡느라 은이 떨어뜨리면서 흩어진 전단지 하나를 손으로 주워들었다. 아이는 아까 은이 그랬던 것처럼 전단지에 손을 댄다. 은은 아이의 행동이 이상하면서도 아이가 금세 마음을 바꿀까봐 뭐라고 말도 못하고 보기만 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가 갑자기 쿡쿡대며 웃는다.

  “야, 너 개한테 그거 먹이지마. 아무리 생마늘은 아니라지만 마늘이 개한테 얼마나 안 좋은데 그걸 개한테 먹이냐? 아빠 몸에 좋다고 그게 개한테도 좋은지 아냐?”

  “어버버”

  은이 너무 놀라서 입을 열긴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가 아빠 드시라고 사다 놓은 알약을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실 적엔 몰래 청이에게 먹이 곤 했다. 개가 먹는 건 아니지만 건강에 좋다니까 청이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근데 어떻게 그걸 처음 만난 이 아이가 알고 있단 말인가?

  은이 너무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아이가 슬쩍 시선을 피한다.

  “아, 몰라. 그런 건 니가 알아서 하고 근처에 세차장 있어? 삼거리 모퉁이에. 옆에 크게 자동차 정비소도 있고 맞은편에 약국 하나 있고.”

  은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말을 못한다.

  “갈 때 혼자가지 마. 그 인간이 작정하고 가져갔으니까 벌써 팔았거나 혹시 아직까지 데리고 있더라도 너 혼자가면 쉽게 주지 않을 거야. 이제, 놔. 얘기했으니까.”

  아이가 은의 손을 슬쩍 밀어 낸다. 은의 손에서 잔뜩 구겨진 옷자락이 빠져 나온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중에 혹시 또 잃어버렸네 어쩌네 하며 나 아는 체 하면.”

  “아니야. 이제 안 놓을 거야. 다신 청이 안 놓을 거야.”

  한동안 정신이 나가있던 은이 아이의 말에 발끈한다.

  “약속 꼭 지켜. 아무한테도 말 안한다는 것도. 그리고... 어쨌든 나 분명히 얘기했어. 혼자 가지 말라고. 괜히 급하다고 너 혼자 갔다가 그 애 못 찾아오면. 그땐 정말 끝이야. 네가 아빠랑 다시 갔을 땐 분명 없을 거라고. 기회는 한번뿐이야.”

  아이가 힘주어 말하고는 골목 모퉁이를 돌라 가버린다. 하지만 아이한테 청이가 어디 있는지 들은 은은 아이가 떠난 후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실은 은은 그 날 그 세차장에도 다녀온 후였다. 그렇지만 세차장 어디에서도 청이를 보지는 못했다. 한참을 아이가 사라진 골목 끝만 보던 은이 흩어진 전단지를 하나하나 다시 줍는다. 은이 마지막 전단지를 아주 천천히 들어서 모아진 종이 뭉치 위에 올린다. 아까 아이가 들고 있던 전단지다. 은은 다시 아이가 사라진 골목길을 잠시 보고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은아, 그 아이가 청이가 세차장에 있는 걸 봤대?”

  은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봤다고는 안 했어요.”

  고반장은 조금 이상했다. 은은 웬만한 일로는 자신에게 전화하는 일이 없었다. 어렸을 때 많은 일들을 겪은 아이라 다른 아이들보다도 좀 어른스럽기도 하지만 아직도 자신을 조금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근데 그날 저녁에 전화를 해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집으로 빨리 와달라고 울먹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몇 번을 물어봤지만 그건 아니라고 할 뿐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딸아이의 행동이었다. 은은 몇 번을 망설이더니 얼마 전에 잃어버린 청이가 어다 있는지 안다고 찾으러 가자고 했다. 은의 말대로 청이를 찾았으면 벌써 데려왔을 성 싶어 그럼 왜 데려오지 않았냐고 묻자 또 입을 다문다. 은은 계속 같은 말만 했다.    

  “그 애가 있다고 했어요. 거기 청이가 있다고. 정말이에요.”

  결국 고반장은 은의 손을 잡고 세차장까지 왔다. 고반장은 세차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발길을 멈추고는 허리를 굽혀 은을 마주본다.

  “은아, 여기 가만히 있어. 아빠가 청이 있는지 보고 올께.”

  고반장이 은이에게 걱정 말라는 듯 한번 웃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세차장을 향해 막 몸을 돌리는데 은이 아빠의 등에 대고 소리친다.

  “그 아저씨가 갖고 갔다고 했어요. 일부러 팔려고 갖고 갔다고. 나도 이상하다는 거 알아요. 아까 점심에도 세차장 갔었으니까. 난 못 봤는데, 난 청이 못 봤는데 근데 그 애는 청이를 꼭 본 것처럼 얘기했어요. 그러면서 아빠랑 같이 가라고 했어요. 기회는 한 번 뿐이라고. 처음 가서 못 찾으면 그땐 정말... 정말……. 그러니까... 그러니까 꼭 거기 있을게예요, 아빠. 제발 청이 안 보인다고 그냥 나오지 마세요. 분명히 있다고 했어요. 청이 있을 거예요.”

  은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고반장에게 간신히 말한다.

  “은아, 아빠 그냥 안 나올 거야. 혹시 은이가 밖에서 못 본데까지 다 보이지 않는 구서구석까지 청이 있는지 다 보고 나올 거야. 그래도... 만약 그래도 청이가 없다면……. 아니다. 우리 은이가 있다면 분명 저기 있을 거야, 그치? 아빠 청이 데려올게. 은이는 잠깐 여기서 기다려.”

  고반장이 은을 향해 아까보다 더 밝은 얼굴로 웃고는 세차장을 향해 걸어간다. 잠시 세차장 앞에 서서 은을 보던 그의 모습이 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후 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언다.

  “청아”

  은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세차장을 나오던 아빠의 손에 청이가 들려있었다. 분명 청이였다. 은이 아빠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날 밤은 청이를 안고 오던 은이도 고반장도 궁금한 거 투성이었다. 은은 청이를 찾은 기쁜 마음 뒤로 아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가 없었다. 세차장에 청이가 있었던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만 아는 비밀을 아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너무 신기 한 일이었다. 다시 만다고 싶지만 설사 만나다하더라도 못 본적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말을 걸거나 아는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건 고반장도 마찬가지였다. 은은 끝까지 청이가 세차장에 있다고 말해줬다는 아이가 누군지 얘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도 모르는 아이라고 했다. 은은 자신의 입으로 청이를 세차장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고 청이가 세차장에 있다고 말해준 아이도 청이를 본 건 아니라고 했다. 사실 고반장은 좀 난감했었다. 하지만 은의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은은 정말 청이가 그 곳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은의 마지막 말을 듣고 고반장은 세차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었다.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서라도 세차장을 다 뒤질 거라고. 반드시 다 확인하고서야 은이한테 돌아갈 거라고. 그리고 인사를 하면서 걸어 나오는 세차장 주인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는 웃으면서 말했었다.

  “아, 우리 청이 여기 있다면서요. 이거, 참,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집 잃은 개를 다 살펴주시고.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고반장이 넌지시 세차장 주인을 떠봤다. 세차장 주인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황하는 모습이 아주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른 사람이면 알아보지 못 했을 테지만 고반장은 놓치지 않았다.

  “아이고, 안 그래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다행이네요.”

  세차장 주인이 연신 웃으며 고반장을 세차장 뒤 창고로 안내했다. 그리고 낡은 알루미늄 문이 불쾌한 쇠 소리를 내며 열리자 고반장은 청이를 볼 수 있었다. 온갖 낡고 위험한 철재 고물들 틈에서 흔한 비닐 줄에 목이 묶여 잔뜩 웅크리고 있는 딸아이의 개를. 청이 앞에는 물 그릇 조차 놓여있지 않았다. 은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은이 혼자 왔다면 세차장 주인은 결코 청이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잡아 가고 싶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자리에서 세차장 주인을 잡아 갈 수는 없었다. 고반장은 끝까지 고맙다고 말하며 웃으면서 세차장을 나왔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이상한 건 세차장 주인이었다. 혼자서 개를 안고 가던 아이를 본 순간 그는 아이가 결국 한 번은 개를 내려놓을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아이가 개를 놓고 운동화를 매는 순간 그 기회가 찾아왔다. 개를 데려오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고 개를 데려온 후에는 한 번도 창고 밖에 내 놓은 적이 없었다. 난데없이 주인이라며 찾아 온 사람이 형사라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너무 자연스럽게 개를 찾으러 왔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내놓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15만에 그냥 팔 걸. 괜히. 뜸들이다. 거마저도 놓쳤네!’

  자신이 한 짓은 생각도 않고 그 날 밤 내내 간만에 들어온 부수입을 놓친 세차장 주인은 아쉬운 듯 입맛만 다셔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밤 경기도 마두동에 위치한 탤런트 한석민씨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한 씨는 해외 촬영중이여서 변을 면했지만 한 씨가 기르던 애완견은 11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으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중태입니다. 한 씨의 애완견은 유기견을 구출해서 연예인들에게 분양해주는 동물프로그램을 통해 최근 한 씨에게 입양되었으며 구출되었을 때부터 얼마 전까지의 모습이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기에 소식을 들은 많은 시민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소속사측은 촬영에 영양을 미칠 것을 우려해서 한 씨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며 한 씨는 사흘 후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경찰은 도난품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원한관계…….”

  “인간들이 벌써…….조용히 사무실 들어가기는 텄다, 텄어.”

  정민은 라디오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린다. 고반장과 정민이 현장을 떠난 지 이제 10분도 되지 않았다. 헌데 벌써 라디오에서 보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단 하나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고반장이 핸들을 꺾자마자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정민처럼 입으로 불평하지 않는 고반장이라고 언론이 반가울리 없다. 당장에 고반장은 속으로 저 많은 기자들과 카메라를 뚫고 자신의 의자에 무사히 앉는 것을 이 사건의 첫 수사목표로 정했다.



  두 사람이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끝냈을 때는 이미 오후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사무실 안이라고 서 밖이랑 많이 다르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 벨 소리에 복도에서 웅성대는 기자들 소리까지 더해져서 옆 사람이 하는 말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게 학생 그만 좀 끊어. 그 놈 잡는다고. 아, 잡는다니까.”

  입이 걸기로 소문난 조형사가 연신 욕을 해대며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염병할……. 부모가 뼈 빠지게 번 돈으로 학비 내주면 공부나 할 것이지, 수사를 하네 마네. 아이구, 젠장 도대체 그 개 새끼 그거 얼마짜리야?”

  “바리요? 그냥 똥개에요.”

  황순경이 조형사에게 커피 잔을 내밀며 말한다.

  “황순경도 그 프로그램 봤어?”

  “네, 가끔요. 저도 개 좋아하거든요. 아이들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아무리 개지만 11층 밖으로 던지는 건 사람이 할 짓은 아니잖아요.”

  “사람이 할 만한 일 만하면 내가 지금 이 짓하고 있겠어?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지 말이야. 누가 알아 개가 스스로 뛰어내렸는지?”

  “에이, 조형사님도. 그건 아니다.”

  조형사의 황당한 결론에 황순경의 눈이 동그래진다.

  고반장은 두 사람의 대화에 조용히 웃을 뿐 말이 없다. 고반장이 잠바를 벗어 옷걸이에 걸자 잠바며 셔츠에 묻은 피가 정민의 눈에 들어온다.

  “그러게 내가 그냥 안지 말라고 했잖아. 영감 고집은. 피 흘리는 개를 덥석 그냥 안더라니.”

  고반장은 정민의 말을 짐짓 무시하고는 탁자 위에 올려진 파일을 연다. 파일 안에는 한석민의 사진과 간단한 신상명세가 기록되어 있다.

  “조형사, CCTV 갖고 왔지?”

  “네, 반장님. 대충 봤는데 건질 건 별로 없어요. 4시 반경에 올라가서 30분 뒤에 다시 타고 내려왔고. 계단을 살피면서 건을 보지 않고 바로 11층에 내린 거나 엘리베이터 처음 탈 때부터 카메라를 피하는 걸로 봐서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애긴데. 입은 옷이나 모자도 너무 흔하지만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어서 제대로 얼굴이 나온 게 하나도 없어요.”

  조형사가 CCTV 화면을 인쇄한 종이 몇 장과 현장 사진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정민은 사진들을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로 찍으면서 하나씩 살펴본다.

  “한석민이 소문은 어때? 뭐 라이벌 관계나 스캔들 같은 거.”

  “아직은 특별한 게 없어요. 워낙 인간성 좋고 자기 관리가 뛰어 난 인물이라고 소문이 나서.”

  잠시 파일만 보던 고반장이 다시 입을 연다.

  “병원에서 전화는 안 왔어?”

  순간 세 사람은 모두 멀뚱멀뚱 고반장을 쳐다만 본다.

  “아, 병원을 옮겼대요. 신림으로. 출혈은 멈췄는데 의식은 없고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가 봐요.”

  고반장에 말을 먼저 알아들은 황순경이 대답한다.

  정민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 하나를 옆으로 밀어내자 고반장이 그 사진을 집어 든다. 사진 속에서 까만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드러낸 강아지 한 마리가 정면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다.

  “조형사랑 황순경은 사진 들고 주변 탐색 좀 해봐. 새벽이라도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니까 누군가 봤을 수도 있어. 우유나 신문 배달하는 사람들 쪽으로는 꼼꼼히 다 확인하고. 탐문 끝나면 조형사는 한석민이 주변 사람들 명단 좀 잘 만들어서 대인관계 좀 살펴보고 황순경은 그 무슨 프로그램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거, 다 확인 좀 해봐. 작정하고 덤빈 거면 분명히 얼마 동안은 미행을 했을 거야. 촬영하면서 찍혔을 수도 있으니까 집안이 아니라 밖에서 찍은 걸로 잘 체크해보고.”

  고반장은 말을 하면서도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한참동안 고반장이 다시 사진만 보고 있자 황순경이 조심스레 말문을 연다.

  “반장님, 왜 그 동물 프로그램에 보면 동물들이랑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가끔 나오기도 하거든요. 뭐 직접 보지 않아도 사진만 보고서도 정확히 맞추곤 하더라고요. 우리도 그 사람들 중 하나 컨택 해볼까요?”

  세 사람은 일순 모든 동작을 멈추고 황순경을 뻔히 본다.

  갑자기 조형사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한다.

  “푸하하하.”

  “우리가 무슨 <살인의 추억>에 송강호도 아니고. 차라리 송강호처럼 점집에 가자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겠네.”

  정민도 그녀를 보고 황당하다는 듯이 웃는다.

  “좀 그랬나?”

  황순경이 쑥스러운 듯 볼펜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불현듯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고반장에게 묻는다.

  “참, 반장님, 집에 강아지 찾으셨어요? 그 콩인가 뭔가? 왜 은이 서까지 찾아와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어휴, 그 때 은이 모습 보고 놀란 거 생각하면. 전 꼭 무슨 일이라도 당할 줄 알았잖아요.”

  “어, 찾았지.”

  고반장은 잠시 그날을 생각한다. 아침에 입힌 하얀색 스커트는 군데군데 흙이 묻은 채로 잔뜩 구겨지고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는 다 흘러내려서 눈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아빠, 청이가…….청이가……. 라면 사러 갔는데……. 운동화 끈이 풀어져서……. 어~~~엉.”

  처음에는 딸이 무슨 나쁜 일을 당한 줄 알고 가슴이 털컹 내려앉았다. 은이가 말문을 열고나서야 고반장은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이를 잃어버렸구나!”

  그제야 너무 놀라 멈춰버렸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는 말없이 딸을 안아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와~ 경찰아빠 좋네. 용케 찾았어. 사람 잘 찾으면 개도 잘 찾나?”

  정민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던 질 때는 이미 고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하, 황순경, 왜 그 때 반장님네 개 잃어버렸을 때 한 번 말씀드려보지 그랬어. 그럼 더 빨리 찾았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지금 이렇게 고생할 거 뭐 있어? 실력은 이미 증명됐겠다. 사진만 보여주면 되겠네.”

  한참을 웃던 조형사가 아직도 진정이 안 된 듯 연신 킥킥되며 황순경을 놀려 댄다.

  옷걸이에서 잠바를 집어 들고는 아무 의미 없이 핏자국을 툭툭 털어내던 고반장의 손이 순간 움찔한다.

  “황순경 다시 말해봐.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어?”

  고반장의 물음에 세 사람은 일 순 할 말을 잃는다. 고반장이 묻는 말투가 진지하게 들려서다.

  “뭐, 한국에서는 모르겠지만 외국 사람들은 TV에도 여러 번 나오긴 했어요. 어떤 여자는 사진으로도 죽은 동물을 정확히 집어냈고 살아왔던 삶이나 죽었을 때의 과정 같은 걸 세세히 묘사해서 보고 있던 저도 무척 놀랬거든요. 그렇지만 뭐 어디까지나.”

  황순경의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고반장이 잠바를 입으며 급하게 문을 향해 걸어간다. 막 문을 미는 순간 다시 뒤돌아 와서는 탁자 위에 사진하나를 집어 거칠게 잠바 주머니에 넣고는 아까 보다도 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간다.

  “어?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정민도 서둘러 재킷을 들고 일어난다.

  “설마, 그 개 있는 병원에 가는 건 아니겠지?”

  재킷을 입으며 정민이 황순경을 본다.

  “우리 반장님이라면 당연히 ……. 가죠.”

  황순경이 놀리 듯 대답한다.

  “뭐야, 병원에서 개한테 범인은 보셨습니까? 이렇게 묻기라도 한다는 거야. 어휴~.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꼭 사람 같잖아. 미치겠네, 진짜. 어째 저 영감은 나이 들면서 일을 더 만들어요.”

  정민은 혼자서 연신 툴툴대면서도 고반장이 사라진 문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 옷을 입은 우리 엄마 혼자서 읽을래요 9
황규섭 지음, 조현숙 그림 / 문공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엄마는 나만 미워해!”

  “난 주워 온 아이일거야!”

  어린 시절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거다. 엄마는 항상 나만 미워하고 야단치고 거기서 더 앞서 가면 어느새 금방이라도 진짜 엄마가 날 찾으러 올 것 같은 생각까지 든다. 엄마한테 혼이 많이 난 날은 ‘진짜 엄마’를 생각하면 사실 위로가 되기도 했다. 상상속의 진짜 엄마는 날 혼내지도 않고 사달라는 건 다 사주고 뭐든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 얼마나 좋은가!

  ‘내일은 날 찾아 오실거야’ 라고 생각하면 잠자리에 들고도 속상해서 오지도 않던 잠이 어느새 스르르 찾아오곤 했다. 사실 그렇게 자고 일어 난 날은 혼났다는 사실도 잊어 먹는다. 아이였을 때 엄마와의 전쟁은 그냥 일상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웃었다. 하나같이 내 얘기 같아서 옛 생각에 웃기도 했지만 책의 주인공인 두리의 생각이 하도 기발하고 엉뚱하면서도 아이라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생각들이였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강아지 또리의 똥꼬에 팬티를 대신해서 개망초꽃을 꽂아 주었을 때는 정말 5분 동안을 정신없이 웃었다. 아이라면 충분히 악의 없이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공감이 갔다. 

  ‘마녀 옷을 입은 우리 엄마’는 아이와 엄마 모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먼저 아이들에게는 글이 누리의 시점인 1인칭으로 써져 있어서 더 큰 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충분히 감정이입을 하게 도와 둔다. 또 짧은 내용이지만 공감이 가는 소재들을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서 지루하지 않고 읽는 재미가 크다. 그리고 아이들이 책을 일고 나면 갑자기 엄마가 천사처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마녀 같은 엄마라도 전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책이다. 아이의 시점에서 써져있기 때문에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아의이 지나친 장난이나 말썽 뒤에 우리가 모르는 아이의 생각이나 상상이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 아이들의 행동에는 분명 우리가 모르는 아이의 생각이나 미처 표현하지 못한 의사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이의 의도이건 그렇지 않든 어른이라면 한 번 더 아이의 행동과 사고, 모두를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책을 읽고 난 어른이라면 그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엄마가 없는 아이도 없거니와 아이였던 시절이 없었던 엄마도 없다. ‘마녀 옷을 입은 우리 엄마’의 두리는 지난 시절의 나고 미래의 나의 아이며 두리의 엄마는 지난 시절 우리 엄마고 앞으로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에게 나도 마녀처럼 보일 날이 있겠지만 더도 말고 책 속에 엄마만큼만 됐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혼내는 그녀의 모습이 진짜 마녀 같을지언정 아이에게도 자신을 잘못을 고백하고 말 못하는 동물을 아끼며 길 위에 꽃 이름을 소중히 불러주고 가족 나들이 때 정성껏 김밥을 싸는 엄마. 그림 속에 엄마는 진짜 마녀 같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픈 나막신 우리문고 1
권정생 지음 / 우리교육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1940년대 일본 도쿄의 혼마찌. 다닥다닥 붙어진 나가야 집들에서 일본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이 합께 살아간다. 가끔은 어른들도, 또 아이들도 일본사람이네 조선사람이네 편을 갈라 싸우기도 하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 같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하늘 아래서 하루하루의 끼니와 안전을 걱정하며 사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는 것은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나 자식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이고 또 가난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이웃을 손 놓고 보내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신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도 더 치열하고 더 힘겹게 모든 상황을 이겨내고 견디며 싸우고 있다. 어른들은 서로가 자기편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지만 아이들은 누군가가 이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전쟁이 끝나고 가족이 무사히 돌라오기를, 또 허물어진 집을 다시 짓고 돌아온 가족과 같이 살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오늘이 힘들지만 더 열심히 하루를 살고 서로의 손을 꼭 잡고는 기도한다. 에이꼬는 아픈 아버지가 건강해지기를, 하나꼬는 고아원에 혼자 두고 온 동생 스즈꼬를 찾아 같이 살기를, 준이는 조선인이면서도 일본군으로 징집된 형 걸이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논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들이 사는 하루는 어른들과 같이 혹은 더 무겁고 눈물겨웠다.

  

  책을 다 읽고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전쟁에서 승자는 역시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패자고 피해자일 뿐이다. 만약 책의 배경이 우리나라이고 우리 아이들만의 얘기였다며 그 사실이 이렇게 깊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수많은 아버지와 자식을 잃었다. 전쟁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건 어느 한쪽만이 아니다. 이건 양쪽 다에게 비극이다. 어느 쪽으로 봐도 슬플 수밖에 없는 비극. 작가는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아이들과 우리나라아이들을 함께 살게 놓아두면서 이 사실을 가장 잘 묘사했다.

  

  준이도 하나꼬도 너무 눈물겹게 힘들었겠지만 난 이 책의 이이들에게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난 항상 세계 2차 대전 때의 우리나라만을 살아왔다. 그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근데 이 책은 내게 그 시대에 다른 나라를 살게 해줬다. 그것도 일본을.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생전 안해본 생각이 들었다.  ‘일본 사람들도 많은 가족을 잃었을테니 그들에게도 전쟁은 역시 잊혀 질 수 없는 아픔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일본인들까지 생각하게 해준 것이다. 이렇게 나라대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람을 생각게 만든 것은 역시 아이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넓게 세상을 볼 수 있게 이 책을 세상에 낳아 주신 권정생작가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곁에서 오랫동안 좋은 글들을 보여주시도록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반장은 11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람이 얼마 없는 그의 머리를 헝클어드리자 습관처럼 올라 온 손이 머리를 매만진다.  머리를 넘기던 그의 옷소매 끝과 팔 부분에 군데군데 묻은 검붉은 자국이 유독 눈에 띈다.

  “휘~이익~~~”

  갑자기 그의 옆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미침 놈이네. 떨어질 거면 지나 뛰어내리지 개는 왜 던졌을까?”

  어느 샌가 고반장 옆에 정민이 다가와 있다. 잘 다려있는 아이보리색 면바지며 하얀 셔츠에 입은 분홍색 니트가 세련되고 깔끔하게 보이는 게 고반장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어때?”

  “뭐, 현금부분은 주인이 확인해야하는 거고 액세서리는 좀 손 댄 거 같은데 다 갖고 간 건 아니니까 그것도 역시 본인이 봐야하고. 뜰 건 다 떴어.”

  “저것도 챙겼냐?”

  고반장이 베란다 창문 안쪽에 흥건히 쏟아져 있는 오물을 턱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챙기긴 챙겼지만 우리가 뭐 CSI도 아니고 갖고 간다고 뭐 별수 있나. 그리고 저거 검사할 거 뭐 있어? 집에 딱 들어오는 순간 소주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뭐? C? 뭐라고?”

  고반장이 눈썹을 찡그리며 정민을 향해 되묻는다.

  “아, 몰라. 가자고, 영감. 아침부터 설쳤더니 배고파.”

  그가 베란다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고반반장에 팔을 잡아끄는 순간 두 사람 뒤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고반장의 몸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제가 한석민이 매니저라니까요. 제가 봐야한다고요. 어차피 이 집도 소속사 명의로 된 거예요.”

  현관에서 남자 둘이 실랑이 중이다.

  “글쎄, 좀 기다려 보세요.”

  덩치 좋은 남자 한 명이 현관을 막고 있고 그 뒤로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 두 명이 보인다.

  “들어오시라고 해, 조형사”

  고반장이 현관을 막고 있던 남자를 향해 말하자 앞에 있던 남자는 막고 있던 조형사를 밀치고는 쏜살같이 문턱을 넘어 현관으로 들어선다. 잘 차려 입은 정장에 끼고 있는 선글라스가 제법 있어보이지만 손이며 목에 잔뜩 하고 있는 액세서리들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순식간에 집안으로 들어 갈 것처럼 서두르던 그의 발걸음이 단 한 걸음을 남겨두고 멈춘다. 그렇게 현관에서 깨진 텔레비전과 군데군데 떨어진 귀중품이며 사방으로 흩어진 옷가지들을 둘러보는 남자의 얼굴이 이내 구겨진다.

  “아니, 이게 도대체…….”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한다.

  “한석민씨 매니저시라고요?”

  고반장이 남자를 마주보고 묻는다.

  “네, 이준영입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둑이 든 것 같습니다만 자세한 건 조사를 더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한석민씨를 좀 봐야하는데 언제 오나요?”

  “석민이 지금 국내에 없습니다. 촬영이 있어서. 사흘 후에나 옵니다.”

  고반장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당장 한석민을 볼 수 없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군요. 그럼 현재로 본인 확인은 어려우니 대신해서 집 좀 둘러봐주시겠습니까? 없어진 거나 특이한 거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시고요. 어떤 거라도 상관없습니다.”

  고방장이 조금 물러서자 준영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집안으로 들어온다. 고반장이 조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금세 반장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준영의 옆에 붙는다. 준영과 같이 온 다른 남자는 그제야 공간이 생긴 빈 현관으로 몸을 들이민다.

  “화장대에 시계며 뭐 좀 없어진 것 같긴 하지만 다른 건 잘 모르겠습니다.”

  방 두 개를 살피고 나온 준영이 고반장에게 잘 모르겠다는 듯 말하고는 계속해서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흐리자 현관에서 거실만 살피던 다른 남자가 그를 보며 묻는다.

  “실장님, 바리 방에 없습니꺼? 바리 말입니더.”

  남자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거실 한편에 놓인 개장에 시선을 던진다.

  “아, 바리! 혹시 강아지 못 보셨습니까? 석민이가 기르는 갠데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짧은 순간 고반장과 정민의 눈이 마주친다. 정민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고반장이 잠시 베란다 쪽을 보고는 준영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게, 보긴 봤습니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