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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불법침입 및 절도, 동물보호법 위반혐의로 체포합니다.”

  조형사가 문을 향해 가는 기범을 잡고 수갑을 꺼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사람은 제 매니접니다.”

  그 사이에 일행 쪽으로 온 한석민이 수갑을 든 조형사의 팔을 잡는다. 어느새 복도에는 여기저리서 몰려온 사람들이 정민과 석민의 일행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안되겠다. 조형사, 먼저 황순경한테 연락해서 사람들 우리 쪽으로 보내 달라고 하고. 한석민씨, 어디 가시는 길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기다려주셔야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더 일을 만드신다면 한석민씨한테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민아. 너, 저 친구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 가.”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여긴 병원입니다.”

  “선생님, 저희가 바리를 꼭 좀 봐야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전처럼 진료실 문을 쉽게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바리야.”

  순식간에 일이었다. 채희가 의사를 밀치고는 진료실 문을 열었다. 순간 바리의 모습이 기범의 눈에 들어왔다. 진료실 중앙에 놓은 큰 스텐 수술대 위에서 전신을 축 늘어뜨린 채 가늘 게 몸을 떨고 있는 바리. 바리는 너무 추워보였다.

  “바리야……. 흑흑……. 바리야, 왔어. 오빠 왔어.”

  채희가 바리를 만지려고 손을 뻗지만 까치발을 해도 손이 닿지 않는다. 그 때 채희의 어깨 너머로 큰 손이 바리를 향해 다가 온다.

  “바리야.”

  기범이 바리를 부른다. 그리고 바리의 눈동자 가득 기범의 모습이 들어온다.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굵은 눈물방울이 바리의 눈가를 적신다. 기범이 바리의 젖은 눈을 자신의 소매 자락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닦아준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바리를 쓰다듬는다. 바리의 눈가를, 머리를, 등을, 그리고 발을. 그리고는 그가 바리를 들어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는다. 바리에게 얼굴을 파묻은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미안하다, 바리야. 미안해……. 미안해, 바리야.”

  그가 바리를 부르며 목 놓아 운다.

  “울지 마. 울지 마.”

  채희가 기범의 다리를 안고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한다.

  “울지 마, 오빠. 울지 마.”

  얼마나 지났을까? 채희가 힘주어 안고 있던 남자의 다리를 놓고는 뒤에 서 있는 정민을 본다.

  “갔다. 바리 갔어, 아저씨. 흑……. 이제 봤으니까. 목소리 들었으니까. 흑흑……. 안아줬으니까. 바리 갔어.”

  기범의 다리가 쓰러질 듯 꺾이더니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가 품속에 안겨있는 바리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바리의 모습은 너무 평온해 보였다. 마치 그날 밤 저녁에 기범의 품에서 잠이 들었던 그 때처럼.

  “바리야……. 바리야. 일어나야지. 응? 바리야. 바리야. 눈떠, 바리야. 집에 가자, 응? 집에 가야지, 바리야.”

  기범이 바리를 조용히 부른다. 잠든 아이를 깨우는 것처럼 어루만지고 달래면서 일어나라고 집에 가자고 말한다.

  “안 와. 바리 안 온단  말이야. 그러게 왜 그랬어? 왜 그랬냔말이야? 어어엉”

  남자는 바리를 안고 울고 아이는 그런 남자를 안고 운다.

  “채희야.”

  아이를 부른 정민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그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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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이 유기견을 맡게 된다는 애기를 처음 들었을 때 기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속사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석민의 잔일을 본 게 벌써 2년이다. 하지만 그 2년 동안 단 한 번도 석민이 동물을 만지는 걸 본적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단 한마디의 애기라도 꺼내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다. 동물뿐이 아니었다. 석민은 원래 말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못됐거나 쌀쌀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그냥 연기를 좋아했고 그 외에 다른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을 뿐이다. 기범은 나중에야 좀 차가워 보이는 그의 이미지가 새로 시작하는 영화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에 한 번쯤 나가줘야 된다는 말로 석민을 설득하는 이매니저를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강아지를 만지는 것조차 꺼려했다. 때 묻은 털이며 고약한 냄새도 깔끔한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지만 그는 그냥 물컹대는 털북숭이 동물 그 자체가 꺼려지는 것이었다. 촬영은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방송사측은 방송사측대로 프로그램을 펑크 낼 수가 없었고 소속사측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석민의 거부반응이 더 심해서 걱정이긴 했지만 방송사와의 계약문제 때문에 촬영을 먼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작 주인공인 강아지를 구출하긴 했지만 강이지는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구석에서 작은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기범은 그런 강아지를 보면서 옛날 집에 버려두고 온 자신의 애견이 생각났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집에서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개조차도 갖고 갈 수 없는 상황인데다가 당장 잘 곳이 없어서 친척집에 얹혀살게 된 판국에 개까지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개를 놓고 온 그는 일주일이 넘게 밥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힘들게 돈을 준비해서 어떻게든 다시 데려올 생각으로 찾아 간 집에는 개집만 덩그러니 있을 뿐 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팔려버린 개를 어디서 찾겠는가. 그는 찾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저 작은 강아지 위로 자신이 버리고 온 그 개의 얼굴이 자꾸 겹쳐진다.

  “바리, 네 이름은 바리가 좋겠다.”

  기범이 강아지를 안았다. 그리고 촬영은 계속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석민도 바리를 그렇게 꺼리지는 않게 됐다. 그렇다고 살갑게 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대했다. 본래 주인이 그렇다 보니 바리에 관련된 모든 일은 거의 기범이 다 했다. 매달 정해진 날짜가 되면 병원엘 데려갔고 매일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주었다. 시간 날 때마다 놀아주고 가끔은 산책도 시켜주고 또 몇 번은 동생 아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몰래 데려가기도 했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버린 개에게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리를 더 아끼고 사랑했다.

  기범은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까지 유서 한 장 남겨두지 않고 빚만 남긴 채 한강에 투신하셨다. 발견된 거라곤 신발과 겉 옷, 그리고 신분증과 천 원짜리 두 장이 들어있던 지갑이 다였다. 빚은 그나마 남아있던 집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지만 아인이 투석비와 계속되는 입원으로 늘어만 가는 병원비는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감당하기 힘겨웠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서 수술비를 마련해 놓고 싶었지만 매일이 같은 그의 수입으로는 목돈을 쉽게 만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리를 보면 그는 잠시 그런 걱정이나 근심을 잊을 수가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바리의 깨끗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도움을 받는 것은 바리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프로그램이 거의 끝날 때쯤에는 속으로 자신이 바리를 기르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은 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매니저가 자신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기획실장방에서 나오면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마주보고 있는 다른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프로그램 거의 끝나가는 데 뭐 특별한 게 없다. 생각했던 거 보다 석민이가 워낙 동물을 싫어해서 프로그램도 기대만큼 못 나왔고.”

  그러더니 이매니저가 서랍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 기범에게 내밀었다.

  “500만원이다. 석민이 오늘 호주 촬영가니까 그 사이에 개새끼 밖으로 던지고 대충 물건 좀 갖고 가고. 뭐, 그동안 갖고 싶었던 거 있으면 몇 개 챙겨도 되고. 무슨 말인지 알지, 기범아?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그날 밤 기범은 하루 종일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듣고 말았다. 그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직장도 잃고 몸도 버리게 될 것이다. 사실을 알고 있는 그를 기획실에서 그냥 내버려 둘리 없었다.

  “오빠 그럼 바리 이제 우리가 기르는거야?”

  아인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닮아 몸이 약했던 아인이. 집에 있을 때보다 병원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은 가여운 자신의 동생. 이제 그에게 남은 피붙이는 아인이 하나뿐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기범이 아파트 앞 공원에서 소수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이어서 두 병, 세 병. 쉬지도 않고 마셨지만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축축한 무언가가 그의 온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바리는 여느 날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꼬리를 흔들고 얼굴을 핥고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반겨 주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품속에서 자는 바리의 얼굴 위로 아인의 얼굴만이 점점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기범은 결국 바리를 안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바리는 잠이 덜 갠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민 팔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의 팔이 떨리는 것인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바리가 떠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한 그의 손이 순간 확하고 펴졌다가 이내 다시 움켜든다. 그가 재빨리 손을 아래로 뻗어 있는 힘껏 쥐어보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단지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만이 그의 귀에 또렷이 들려올 뿐이다. 그는 몸을 돌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게워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던지고 망가뜨렸다.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액세서리 몇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아파트를 나왔다. 하지만 본인은 어떻게 집을 나왔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한 낮에 태양 볕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기범은 자신이 어디 와 있는지를 안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경매로 넘어간 예전 자신의 집 담벼락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일을 떠올리고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차라기 다시 잠들기를 바랐지만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갔다. 그는 가슴을 치며 바리를 불렀다.

  “바리야… 바리야아.”

  순간 환영처럼 바리가 꼬리를 흔들며 담벼락을 따라 기범에게 달려온다. 그가 너무 기뻐서 언제나처럼 팔을 내미는데 바리가 다 오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앞으로 뻗은 그의 손이 허공을 움켜쥔다. 마치 어젯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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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반장과 정민이 차를 세운 곳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로 옆 편의점 앞이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려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 가자 계산대 앞에 있던 조형사가 두 사람에게 온다.

  “분명하답니다.”

  “황순경은?”

  “편의점에 설치 된 CCTV 확인중 입니다.”

  고반장이 계산대 위에 놓인 출력된 CCTV화면을 가리킨다.

  “자꾸 같은 걸 물어봐서 미안하네. 이 사람 분명한가?”

  “네, 단골이에요, 오는 시간도 거의 비슷하고. 요 며칠 안 오긴 했지만 맨 날 그 잠바에 그 모자 쓰고 다니는데 모를 리가 없죠.”

  “다른 날이랑 틀린 점 같은 건 없었고?”

  “보통 맥주나 라면, 과자 같은 걸 많이 사갔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소주만 사갔어요. 안주거리도 하나도 안사고. 더 이상했던 건 올 때마다 영수증만은 칼같이 챙기던 사람인데 그날은 잔돈도 받지 않고 거스름돈 챙기는 사이에 그냥 나가버렸다니까요.”

  “반장님.”

  황순경이 창고에서 나와 고반장을 부른다. 창고 안에 설치된 TV화면에 소주 3명을 계산대 위에 내려놓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사람 맞아?”

  조형사가 CCTV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네, 맞아요.”

  실제로도 남자가 쓴 모자나 입은 차림새가 아파트에서 촬영된 모습과 동일하다.

  직원이 소주병을 봉지에 담아 내밀자 남자는 봉지를 받고 돈을 건넨다. 돈을 건넨 남자가 숨을 크게 들어 마시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는데 그런 남자의 얼굴이 CCTV에 정면으로 잡힌다. 남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목격자의 말처럼 잔돈을 세는 사이 밖으로 나가 버린다.

  “잠깐만, 황순경, 거 좀 돌려 봐봐, 얼굴 나오는 데로. 빨리.”

  옆에서 보고 있던 조형사가 테이프를 뒤로 돌려보라며 황순경을 재촉한다. 황순경이 몇 번 버튼을 누르더니 남자가 카메라에 정면으로 비친 부분에서 화면을 멈춘다.

  “제 게잖아. 아니 어떻게. 그게 말이 되나?”

  “뭐야? 아는 사람이야?”

  “네. 아니 근데 재가 왜?”

  

  “조형사, 그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파출소로 협조 요청해. 용의자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그 쪽 사람들 좀 병원 주위에 먼저 배치해달라고 부탁도 좀 하고. 황순경은 목격자랑 CCTV 갖고 서로 먼저 가 있어. 참, 기획실이 어디 있다고 했지?”

  “잠깐만요, 반장님. 잠깐만요.”

  “네, 지금 한석민씨가 바리의 소식을 듣고는 촬영도 접고 하루 먼저 귀국했다고 하는데요, 벌써 공항을 나가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바리가 주인을 보고 힘을 내서 꼭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군요. 누가 그랬는지 정말 그 사람 얼굴 한 번 꼭 좀 보고 싶네요. 뭐만도 못하다는 말은 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바리가 다시 건강해져서 우리 곁으로 빨리 돌아오길 바라면서 Carole King이 부릅니다. ‘You've got a friend'"

  “젠장, 그 새끼 어떻게 서로 바로 안가고 병원으로 간다는 거야? 누구 손자라는 게 무슨 벼슬이야?”

  처음부터 누구네 집 손자라는 게 마음에 걸렸던 조형사의 입에서 기어이 험한 소리가 나온다.

  “정민아.”

  고반장이 정민을 부르는데 이미 그는 차 있는 곳으로 뛰는 중이다.

  “조형사, 그쪽 갈 필요 없겠어. 우리랑 가자고.”

  “네, 병원 쪽으로 안가도 되요?”

  “아니, 병원은 맞는데, 어쨌든 빨리 타.”

  고반장이 조형사를 재촉해 차에 오른다.


  “리디아… 모자랑 옷은?”

  레지나 수녀가 채희가 쓴 분홍색 모자와 같은 색에 카디건을 본다.

  “아. 그게. 제가 선물한 거예요.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는데 채희가 굳이 떡볶이를 먹겠다고해서……. 좋은 데 데려가고 싶었는데, 좀 미안하기도 하고 또 길가다가 채희에게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해서요. 애가 워낙 얼굴이 하얘서 분홍색이 참 잘 어울려요.”

  레지나 수녀와 정아 사이에 어색한 미소가 오고 간다.

  하지만 옆에서 오고가는 두 사람의 그런 대화소리가 한 나절 내내 같은 자세로 앞아 있는 채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채희는 이해할 수 없다. 남자는 밥도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놀아주고 가끔은 몰래 데리고 외출도 시켜줬다. 매일 갈 곳을 몰라 거리를 헤매다가 처음 남자의 품에 안겼을 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안전하다고, 그리고 따뜻하다고. 그 날도 남자는 울면서 따뜻한 품안으로 꼭 안아주었다. 불안했다. 왜 우는 걸까? 슬펐다. 어떻게 해줘야할까?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이름을 부르고 쓰다듬어 주기를 수도 없이 반복 했던 남자. 허공을 잡은 손 뒤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타박타박, 뚜벅뚜벅.

  조용하던 복도 끝에서 한꺼번에 걸어오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남자 여섯 명이 채희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데 모두들 장정이고 보니 복도가 좁다. 일수 가방처럼 보이는 작은 백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앞서 걷고 있고 그 뒤로는 선글라스를 쓰긴 했지만 정아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 의사 진짜 이상하네. 아니 왜 촬영을 못 하게 하는 거야? 돈을 줘도 싫다고 하니, 이거야 원 ……. 석민씨, 그냥 잠깐 보고만 나오자고. 뭐 볼 필요도 없지. 처음부터 안락사 애기했으니까 그냥 동의한다고만 하자고.”

  가방을 든 남자가 문을 열자 한석민이 젊은 남자 두 명과 함께 먼저 방으로 들어간다.

  “기범이는 그냥 여기 있어라.”

  남자가 맨 끝에서 따라오던 남자 한명과 다른 남자 한명을 밖에 남겨두고는 안으로 문을 닫아버린다.

  한석민을 알아 본 정아는 지금 들은 이야기가 믿기지가 않는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애기를……. 채희, 혹시 채희도 …….’

  남자들을 따라서 문가에 멈춰 섰던 정아의 시선이 채희를 향한다.

  “채희야.”

  채희는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서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휴, 냄새. 됐다. 그만 가자. 꿈에 나올까 무섭다. 기범이 넌 뭐하고 있냐? 어서 가서 차에 시동 걸지 않고.”

  남자들은 왔던 것처럼 다시 요란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 나간다. 하지만 채희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남자들이 밖으로 나온 뒤에야 고개를 들어 문을 쳐다본다.

  “기범아, 뭐하냐? 빨리 가자.”

  채희가 보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문만 쳐다보던 남자가 일행의 재촉에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몸을 돌린다.

  “안 돼. 못 가. 보고 가.”

  남자가 떠나려고 하자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던 채희가 그의 앞을 가로 막는다. 그가 놀란 눈으로 채희를 본다.

  “보려고 온 거 아니었어?”

  채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남자의 윗옷자락을 잡는다. 채희의 소리에 한석민과 경호원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채희와 남자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일수가방을 든 남자가 한석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급히 채희 쪽으로 다가 온다.

  “꼬마야, 왜 이러니? 아저씨가 많이 바쁘거든. 이 손 좀 놔 라.”

  남자가 옷자락을 잡은 채희의 손을 향해 손을 뻗자 제일 가까이에 있던 정아가 남자의 손을 밀친다.

  “아이에게 손 대지마세요.”

  정아가 남자를 째려본다.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랑은 할애기 없어. 꿈에 나올까 무섭다고? 난 오히려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워.”

  채희가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애기한다.

  “그런데 이 오빠는 달라. 아저씨들이랑은 다르다고.”

  채희가 고개를 들고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본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채희가 소리쳐 묻는다.

  채희를 떼어 내려는 남자가 채희의 물음에 당황해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뒤에 있는 일행에게 손짓을 한다.

  “아니,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자가 채희의 손을 거칠게 떼어낸다. 잠시 떨어졌던 채희가 다시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자 남자가 채희의 앞을 막는다.

  “안 돼, 가지마. 가면 안 된단 말이야.”

  채희가 남자를 비켜서 다시 달려들자 불려온 다른 남자 하나가 채희를 잡아 올리고 또 다른 남자는 채희에게 오려는 정아를 뒤로 밀어뜨린다. 균형을 잃은 정아가 뒤로 넘어지자 레지나 수녀는 정아에게 달려가고 마틴 신부가 채희를 붙잡은 남자에게 다가서려하자 정아를 넘어뜨린 남자가 다시 앞을 막는다.

  채희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잡고 있는 남자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자 일수 가방을 들고 있는 남자까지 가세해서 채희의 팔을 잡는다.

  “무슨 일입니까?”

  방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온다. 

  “왜 그랬어? 말해 봐. 왜 그랬냐고? 이름도 지어줬잖아. 좋아했잖아. 사랑했잖아. 근데 왜 던졌냔말이야? 왜? 아아악~~~”

  채희가 소리치며 오열한다.


  병원 앞은 밀려드는 취재진 때문에 아수라장이었다.

  고반장은 모든 취재를 거절하고 병원 본관 문 안으로는 카메라와 사진기를 들고 들어올 수 없다는 방침을 완강히 지키고 있는 의사가 다시 한 번 고마웠다.

  정민이 주차할 생각도 하지 않고 본관 바로 앞에 차를 세우려는데 순간 폐를 찌르는 듯 한 비명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온다.

  “채희.”

  정민이 차에서 뛰어 내려 뛰기 시작하고 다른 두 사람도 급히 차에서 내린다. 본관 안으로 들어온 정민이 접수대를 지나쳐 복도 모퉁이를 막 돌아 서는 순간 그의 눈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진다. 정아는 바닥에 앉아 레지나 수녀에게 반쯤 몸을 기대며 일어나려 하고 있고 마틴 신부는 어떤 남자의 다리를 물고 있는 은을 보호하려는 듯 몸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채희는 장정 셋에게 팔과 다리를 잡힌 채로 반쯤 허공에 들어 올려져서는 울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채희가 쓰고 있던 분홍 색 모자는 사람들의 발길질에 바닥을 굴러다니고 채희의 얼굴 전체가 눈물과 땀에 젖어서는 미친 듯이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채희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 채희 앞에 정민 쪽에서는 등만 보이는 남자 한명이 서 있고 또 다른 남자 한 명은 복도 중앙에 서있었는데 정민이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채희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처음엔 작게 부르던 채희가 정민임을 확실히 알아보고는 울부짖기 시작한다.

  “아저씨, 엉엉. 아저씨ㅡ”

  채희가 온 힘을 다해 정민을 부른다. 그런 채희의 목소리를 들은 정민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진다. 정민이 무섭게 달려가서는 순식간에 채희를 잡고 있는 오른쪽 남자의 얼굴을 가격가고 남자가 놓친 채희의 팔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긴다. 채희를 안은 다른 남자가 채희를 놓지 않자 정민이 그를 쏘아 본다.

  “놔, 그 손.”

  정민이 채희를 놓고 죽일 듯 한 기세로 남자에게 다가서자 조형사가 정민을 막고 채희를 안은 남자에게 형사 배지를 내보인다.

  “어, 어, 아이를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 안 되지.”

  남자가 어쩔 수없이 채희를 내려놓자 채희가 정민의 품으로 뛰어든다. 정민이 채희를 힘껏 안아 든다.

  “괜찮아, 채희야. 괜찮아.”

  “엉, 엉~ 아저씨.”

  “미안. 내개 좀 늦었지? 미안해, 채희야. 미안하다.”

  정민이 채희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아저씨. 보고가라고 해. 흑, 흑 ……. 기다린단 말이야. 보고 싶어 한단 말이야.”

  채희가 울면서 알아들 수 없는 무언가를 정민에게 부탁한다. 정민이 그제야 채희 앞에서 문만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를 돌아다본다.

  CCTV 화면에 찍혔던 바로 그 남자. 한석민의 로드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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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아라입니다.

  어느 덧 “보이지 않는 나라”가 14편까지 오게 됐네요. 이때가지 중에서 14편이 제일 길었지 않나 싶습니다. 밝혀지는 사실도 많고요. 채희의 가족 이야기부터 채희와 레지나 수녀와의 관계, 채희가 성당에 머무는 이유까지. 마틴 신부의 이야기가 제법 길었죠? 다음 편에서는 바리를 던진 사람이 누군지가 밝혀집니다. 그럼 “보이지 않는 나라”는 거의 끝난 샘입니다. 휴~~~ 글을 쓴다는 건 불면증을 만들기도 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좀 졸리네요. 모두들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아, 오늘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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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은 분명 비어있다. 그런데도 정민은 이상하게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는 그곳에 고반장과 자신 둘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듯한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딱히 어느 한 방향에서만 느껴지는 시선이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십자가에서부터 양 옆으로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곳에서부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또각또각.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구두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모아진다. 한 여자와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남자가 여자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여자가 떠나자 바로 두 사람에게로 몸을 돌려 온다.

  “안녕하십니까? 마틴 신부입니다.”

  신부가 손을 내민다. 고반장이 마틴 신부가 내민 손을 먼저 잡는다.

  “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레지나 수녀님을 엄청나게 바쁘게 만드신 분들이죠. 덕분에 이제 막 푼  짐을 다시 싸게 생겼습니다. 하하하.”

  내용은 그리 웃을만한 내용이 아닌듯한데 그는 정말 즐거운 듯이 웃는다.

  “리디아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지금 여기 없습니다. 학교에 갔으니까요.”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두 사람에게 먼저 채희 얘기를 한다.

  “학교에서 오려면 아직…….”

  “저, 그게 채희가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고반장이 마틴 신부의 말을 끊는다.

  “그것 때문에 레지나 수녀님을 보러 온 겁니다. 지금 …….”

  “리디아, 어디 있습니까?”

  잔득 가라앉은 목소리. 순식간에 굳어진 그의 얼굴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이 변한다.

  “채희는 괜찮습니다. 어디 다치거나 그런 게 아니라…그게…….”

  고반장은 말을 다 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이 신부가 채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를 그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 어디까지 말해야 한단 말인가.

  “병원에 갔군요, 리디아가. 그 강아지를 보러……. 맞습니까?”

  신부도 알고 있다. 고반장과 정민을 혼란스럽다. 도대체 누가 얼마나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알아야겠습니다.”

  정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정민은 정말 알고 싶다. 채희가 누구인지, 왜 집이 아닌 성당에 있는지, 어제 만난 수녀와 지금 눈앞에 있는 신부가 아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전부 다 알고 싶었다.

  “레지나 수녀님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곧 오시겠지만, 먼저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가 고반장과 정민을 안내하며 성당 지하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성당 안을 맴돌더니 곧 사라진다.


  “무엇을 알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의자에 앉은 두 사람에게 녹차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내밀며 마틴 신부가 묻는다.

  “물으시는 분은 얼마나 알고 계신지를 먼저 묻고 싶군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정민이 반문한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분위기에 고반장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신부님, 혹시 오해를 하실 것 같아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나 이 친구나 지금 저희가 맡고 있는 사건에 채희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냥 채희, 채희 자체입니다.”

  고반장이 부드럽게 말한다.

  “알고 싶은 게 그거라면 그거야 말로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 리디아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마틴 신부는 어느 새 두 사람을 처음 만났던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언론에 공개할 수도 있습니다.”

  소파 뒤로 몸을 기대며 정민이 마틴 신부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정민이 웃는다. 고반장은 오히려 그게 더 위험 신호라는 걸 알고 있다.

  “아까 저희 때문에 수녀님이 바빠지셨다고 말씀하셨죠?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짐을 쌓으셔야 된다고요. 그 얘기는 천주교 주교회에서도 채희를 알고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거처를 그렇게 쉽게 옮기실 수는 없지요.”

  정민이 마틴 신부를 향해 더 크게 웃어 보인다.

  “언론에서 아주 좋아할 겁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신비로운 소녀를 천주교 측에서 아무도 모르게 몰래 보호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만한 얘깃거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언론뿐이겠습니까? 사실로만 확인된다면야 정부 측에서도 관심이 없지 않을 겁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대통령들도조차 휴가 때 자신들의 애견만은 꼭 끼고 다니는 세상인데, 채희에게 대통령 품에 안긴 개 사진 하나만 보여준다면야 누가 알겠습니까? 대통령이 애견을 쓰다듬으며 서슴없이 자신의 측근들이나 각국정상들에게 애기한 대화 내용을 모두 알 수 있을지. 뭐, 사실 여부야 이미 알고 계신 그대로고요, 안 그렇습니까?”

  고반장도 짐작 못 했던 부분은 아니지만 막상 정민의 입에서 말로 들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심각해 진 건 고방장 뿐이 아니다. 정민의 말을 들은 마틴 신부의 얼굴에는 고뇌하는 빛이 역력하다.

  “리디아를 생각하시는 분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그냥 돌아가신 거라고요. 제가 틀린 겁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게 리디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성당에서 채희를 데리고 있는 이유가 제가 상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 채희를 데려가겠습니다.”

  쉬지 않고 이어가던 두 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긴다. 정민의 마지막 말에 겉으로는 고반장이 놀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말을 한 당사자가가 더 놀라고 있었다.

  “정민아.”

  고반장이 정민을 부르는 것과 비슷하게 마틴 신부도 입을 연다.

  “보호자가 있는 아이를 어떻게 데려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틴 신부의 말에 고반장과 정민 모두가 또 한 번 놀란다.

  “채희에게 보호자가 있습니까?”

  “어딥니까?”

  고반장과 정민이 각각 다른 걸 동시에 묻는다.

  “휴.~~~”

  마틴 신부가 긴 한숨을 내뺏는다.

  “다들 좀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눈을 감고는 깊게 숨을 몇 번 들이킨다. 가빠진 호흡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은 듯하다. 눈을 뜨고서도 한참을 망설이는 듯 여러 번 숨을 들이 마시던 그가 결심이 선 듯 두 사람을 똑바로 마주 본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 전에 약속해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리디아를 보호해 주신다고. 이건 언론이나 교구나 어디 한 군데를 지정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서 부터입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것뿐입니다.”

  마틴 신부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그가 교구를 언급한 것이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채희를 보호한다는 것이야 말로 두 사람이 원하던 바이므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리디아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리디아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리디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말을 꺼내는 그의 모습에서 리디아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느껴진다.

  “한 시골 마을이 있습니다. 세상과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잘 가꾸어진 땅은 매해 풍성한 곡식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가까우니 세상 일 좀 모르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혹시 농사가 잘 안 돼도 딱히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을 땅의 대부분은 그 마을에서도 제일 좋은 산 중턱에 살고 있는 한 홀아비 농부의 소유인데 땅을 워낙 싼 값에 빌려주는데다가 흉년이 든 해에는 그도 안 되는 값을 받으니 그것만으로도 땅을 빌린 사람들에게는 큰 짐을 더는 샘이었죠. 그런데 아들 하나와 내내 혼자 살던 그 양반이 아들이 다 커서 대학에 들어가자 재혼을 했습니다. 그쪽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남자아이 한명과 여자 아이 한명을 데려왔는데 둘 뿐이던 집에 식구가 금방 다섯이 되었지요. 그리고 대학에 다니던 아들은 졸업하자마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아가씨와 결혼하고 곧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 일 없이 그 집도 그 마을도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첫 여름방학이 되기도 전에 아들과 며느리가 그만 교통사고로……. 모두들 충격이 컸습니다.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다 한 가족같이 지냈으니까요. 아들을 잃은 노인은 그나마 남아 있는 손녀 때문인지 처음에는 기운을 좀 차리는 듯 했다가 두 달도 체 못가서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손녀가 동네에 이상한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먹는 밥에 이상한 약을 탄다고 할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동네를 돌아다녔죠.”

  “이럴 수가…….”

  고반장은 기가 막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분이 보시기에 마을 사람들이 아이의 말을 믿었을 것 같습니까?”

  고반장과 정민은 마틴 신부가 묻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분이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의 말을 믿었습니다. 워낙 영리한데다가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모르는 일을 족집게처럼 알아맞히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도 마을 사람들이 아이의 말을 믿어 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리곤 아이가 학교 간 사이에 아픈 남편의 병문안을 핑계 삼아 방문한 친척들을 대접한다며 음식을 먹을 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는 아기가 태어 날 때부터 그 집에 있었던 개 한마리가 이미 목에 줄이 감긴 채로 나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오히려 그 때를 맞춘 거죠.”

  “어떻게 그런 일이…….”

  고방장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의 비명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달려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그 집에서 데리고 나온 그날 노인은 숨을 거뒀습니다. 미망인은 서둘러 장례를 치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남은 재산을 정리해서 마을을 떠났고요. 땅을 잃은 사람들도 곧 마을을 떠났죠.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그 미망인이 아이를 찾으러 온다면 법적으로 당연히 보호자니 내주어야 할 판인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아이의 고모가 아이를 찾으러 마을로 왔습니다.”

  “레지나 수녀군요. 채희를 찾아 갔다는 고모.”

  정민이 고개를 숙인 채 묻는다.

  “채희의 말을 믿지만 채희가 힘들어지니 사실을 밝힐 수도 없고 설사 밝힐 수 있더라도 자신의 친어머니니 쉽지가 않았겠군요. 그쪽에서 채희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채희가 아무 상관없게 되면 그야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니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고 혹시 채희에게 남은 재산이 있다면……. 그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요.”

  정민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짐작되는 나머지 일들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테이블 위로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힘겹게 말들을 쏟아내던 정민이 고개를 들어 마틴 신부를 본다.

  “처음 사람들이 리디아를 봤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피를 흘리는 줄 알고 기절할 만큼 놀랬다고 하더군요. 피 흘리며 죽은 개에게서 역시나 피범벅이 된 아이를 떼어 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고……. 그날 아이가 지른 비명소리가 온 산을 울리고도 마을 사람들 귀에서 며칠을 맴돌았다고요. 레지나 수녀님과 제가 리디아를 찾아 갔을 때 리디아는 꼭 짐승 같았습니다. 옷도 그 때 입었던 옷, 그대로 입고 있었죠.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면 머리를 벽에 찧고 손가락부터 어깨까지 물어뜯어서 양 팔은 다 상처투성이였습니다. 하지만 리디아를 데리고 계셨던 노부부도 리디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리디아를 건드릴 수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 리디아를 다시 밖으로 내놓은 건 레지나 수녀님입니다. 지금 리디아의 몸에는 상처 자국이 거의 없지만 레지나 수녀님 몸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많습니다. 리디아가 회복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변명처럼 들리는군요.”

  “변명이 아닙니다. 레지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리디아를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어머니에게서까지. 레지나가 집을 비운 건 1년도 체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만하세요, 마틴 신부님.”

  세 사람의 고개가 소리가 난 문 쪽을 향해 일제히 돌아간다.

  “리디아 어디 있습니까?”

  고반장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S동물병원에 있습니다. 바리를 보고는 움직이질 않아서…….”

  그녀가 고반장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다.

  “레지나 수녀님.”

  마틴 신부가 그녀를 부르며 계단을 뛰어 오르고 그런 그의 뒤를 고반장과 정민이 뒤따른다.

  “잠시 기다리세요. 차 갖고 오겠습니다. 같이 가셔야지요. 혼자서는 못 가십니다.” 

  막 성당 문을 나가 계단을 내려가는 레지나 수녀를 마틴 신부가 잡고는 돌려 세운다.

  “마틴 신부님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제 밤에 떠났어야 했던 것을…….”

  “그랬다면 당신 어머님의 일도 아무도 몰랐겠지요? 어제 밤에 떠나야 했었다고요? 어제 밤일이라면 오히려 제가 더 아쉽습니다.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결코 채희를 데려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보호자는 접니다.”

  “아니, 당신 어머니겠지. 그리고 세상에서 그 사람만큼 채희에게 위험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정민아.”

  고반장이 정민을 말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레지나 수녀를 마틴 신부가 잡고 있다.

  “정민아. 그만 해라. 채희한테 가는 게 먼저다.”

  고반장이 혹시 정민이 더 뭐라고 할세라 그의 팔뚝을 잡고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의 잠바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느껴진다.

  “네. 일산 경찰서……. 뭐라고?”

  그가 계단을 다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서서는 전화기를 반대편 귀로 고쳐 받는다.

  “정말이야? 알겠어. 알겠다고.”

  그가 알겠다는 말만으로 전화를 끊고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레지나 수녀와 마틴 신부를 향해 몇 계단을 거슬러 올라간다.

  “죄송하지만 병원은 두 분이서 먼저 가셔야겠습니다.”

  고반장의 말을 들은 정민이 급히 계단을 뛰어 오른다.

  “무슨 일이야?”

  정민이 묻는다.

  “CCTV를 알아 본 사람이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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