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베이비 [dts]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힐러리 스웽크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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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두 장면.  

  둘은 같이 있으면 하나로 보이고 혼자 있으면 둘로 보인다.

 

  보고 싶지 않았었다.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끝이 어느 정도 짐작되는 영화들이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광보만 보고서도 단번에 후유증이 오래 갈 영화임을 알아 봤던 나. ‘보지말자. 후유증 오래가겠다.’ 생각하고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클린트가 나오고 그보다 더 좋아하는 모건이 나와도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는데……. 그런데 왜 비디오점을 나오는 내 손에 이게 들여 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후유증 오래 갈 것 같다. 슬프고 속상하고.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기처럼 “그때 등만 보이지 않았더라면…….”, 스크랩처럼 “체급을 올리지 않았더라면…….”, 프랭키처럼 “차라리 선수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수많은 만약을 혼자 만들어 가며 지금도 블루 베어를 향해 쌍소리(예:SOB)만 해대고 있다.

  

  그래도 난 매기가 좀 부럽다. 누군가를 그렇게 완벽히 가질 수 있다니. 또 반대로 그렇게 완벽하게 누군가에게 자신을 다 줄 수 있다니. 지금, 이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매기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매기, 사람들은 가끔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소리를 하곤 하는데 난 그 말에 반만 동의해. 물론 피가 물보다 진하긴 하지. 하지만 사람이 피로만 만들어 졌나? 우리 몸의 반 이상은 물인데. 양으로 말하자만 당연히 물이 더 많지 않겠어? 어떻게 생각 해? 모쿠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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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9-13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촌구석에서는 한참 지나간 영화나 그것도 텔레비전으로만 보고 산답니다.
이번 추석은 힘들 것 같고, 성탄절에 이거 볼 수 있을까나...^^

아라 2005-09-13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 여우님, 벌서 포기하신건가요, 늑대 목도리? 성탄절 영화프로그램을 지금부터 생각하시다니...^^;; 아직 포기하지 마세요, 아자아자!!!
 
네버랜드를 찾아서 - 할인행사
마크 포스터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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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ding Neverland
 

“Just" or "Not just"


  요정과 마법가루, 악어와 갈고리 손,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와 그 아이가 사는 곳 네버랜드. 자, 이 아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아마도 이 아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피터 팬!” 탄생된 후로 결코 사라지지도 변하지도 않는 이름. 단지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잠옷만 입은 채 런던의 빅벤 위를 날아다니는 게 상상이 됩니다. 마치 상상의 나라로 들어 갈 수 있는 주문과도 같은 이름 “피터 팬” . 바로 그 “피터 팬”이 만들어진  과정을 이 영화  <Finding Neverland>에서 만났습니다.

  

  사실 <피터 팬>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는지 몰랐던 저로서는 영화의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흥미가 갔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매력 만점의 남자배우인 조니 뎁을 <피터 팬>의 저자인 배리 역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습니다. 정말 이 배우는 보헤미안 느낌이 그대로 나는 해적 역에서부터 말쑥한 정장차림의 런던 신사까지 안 어울리는 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영화가 배리를 지적인 작가로서 보다는 순수함을 지키려는 사람으로서 더 가까이 바라봤기 때문에 조니 뎁에게 이 배역이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조니 뎁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 영화의 가중 큰 특징은 배리가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그 속에서 영감을 얻고 해적과 요정을 상상하고 하늘을 날고 칼싸움을 하는 등 상상의 나래를 펴는 장면이 현실과 상상의 구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연출이나 편집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흐름과 표현 기법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이 상황에 따라 배리도 되고 실비아도 되고 아이도 될 수 있게끔 감정이입을 적절히 유도하는데요, 그 부분이 절대로 과장되게 미화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나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영화는 눈앞에 있는 현실을 못 본체 하라고도 또 상상의 나라가 실제로 눈앞에 있다고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상상하라. 그리고 그냥 믿어라.”라고 얘기하는데요, 영어 자막으로 보면 이 부분이 더 명확해 집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똑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는데 바로 “just"입니다.

  

  배리가 애견 포르도스를 거대한 곰이라고 상상하면서 함께 춤을 추는 장면에서 피터는 배리를 비웃습니다.

  


  피터 :  It's just a dog. (그냥 개잖아요.)

  배리 : Just a dog? (그냥 개라고?) Just? (그냥?) That's like saying "He can't climb that mountain, He's just a man." Or "That is not a diamond, it's just a  rock." (그건 “사람은 산을 오를 수 없어”나 “다이아몬드는 돌 일 뿐이야” 라고 말 하는 거랑 같지.)

         Just……. (그냥이라는 말은…….)

  

  이 부분에서 “just”는 상상을 가로막는 위험한 의미로 표현됩니다. 의미가 있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조차 “단지, 그냥, 그저…….” 등등의 별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말로 표현됐던 이 “just”가 마지막에서는 전혀 다르게 사용됩니다.


  

  배리 : She went to Neverland. You can see her if you want to anytime. (엄마는 네버랜드로 가신거야. 넌 언제나 찾아가서 엄마를 만날 수 있단다.

  피터 : how? (어떻게요?)

  배리 : By believing, Peter. Just believe. (믿음으로써, 피터. 그냥 믿는 거야.)

  

  같은 “just” 지만 여기서는 상상을 가로막는 단어가 절대 아닙니다. 바로 상상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단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없는 것도 만들 수 있는 상상의 시작으로 표현되니까요. 그냥 믿으라고요.


  

  모든 아이들은 결국 영화 속 배리가 실비아의 큰아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순식간에 어른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아이로 돌아 갈 수 없죠. 한마디로 다시 순진해 질 수는 없습니다. 몰랐던 걸을 알 수는 있지만 다시 몰랐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순진했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서 이미 어른이 돼 버린 내가 굳이 아이로 돌아 갈 필요는 없습니다. 순진할 수는 없지만 순수할 수는 있으니까요. 그리고 순수하다는 것은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이건 내가 지금과 현실을 다 알면서도 충분히 다른 무엇을 꿈꾸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건 때때로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에서 날 보호해주는 보호막이 돼주기도 하고 반대로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비상구가 돼주기도 하죠. 그리고 순수하다는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나 또 어느 시간에서나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그냥 믿음으로써.”


  어때요? Neverland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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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2disc) - 할인행사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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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비디오 가게에 갔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영화가 참 많았는데 어째 하나같이 빈 케이스뿐이다. 한참을 방황하다 빈손으로 나오기 억울했던 난 결국 바로 이 영화 <콘스탄틴>을 들고 나왔다.

  사실 난 공포영화를 싫어한다. 좋지 않은 여운이 너무 오래 가는데다가 시간이 지나서 무서운 장면들을 내가 잊어먹었다고 해도 이미 내 머리나 마음이 받은 충격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슬픈 영화를 보고 마음이 아픈 것과는 다르게  영혼을 상하게 만들어서 보지 않기 전으로 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을 들고 나온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배우들 중 몇 안 되는 잘생긴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하는데다가 영화의 소재가 ‘퇴마’이기 때문이다. 퇴마는 내가 좋아하는 소재인데다가 선과 악의 구조가 분명하고 끝에는 꼭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의 ‘희생’이라는 부제를 넣어서  단순히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리고 그 ‘희생’이 <콘스탄틴>에서도 역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다만 주인공이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퇴마’라는 일에 조금 덜 투철(?)하고 주인공이 보여준 ‘희생’이 다른 영화와는 성질과 동기가 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얘기하면 영화에서의 결말을 얘기하는 것과 같기에 영화의 줄거리나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점은 피하는 게 좋겠다.

  <콘스탄틴>을 보고 먼저 느낀 건 장르가 장르인 만큼 DVD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질이나 음향도 생생하고 그래픽도 어색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악의 세계인 불의 붉은 빛과 촉매의 역할을 하는 물의 투명한 특성을 잘 매치해서 적당히 음침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촌스럽지 않게 표현했다. 특이한 점은 공포영화지만 무서운 장면이나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긴장감, 순간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이 영화 <콘스탄틴>에는 없다. 그런 재미를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좀 실망할 것이다. 반대로 난 영화의 처음부터 무서운 장면이 나오자 괜히 빌렸다 싶었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반대로 건진 게 더 많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솔직히 <콘스탄틴>은 공포 영화를 못 보는 내가 봐서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이유가 쉽게 짐작이 가겠지만  이건 앞에서 언급한 주인공의 캐릭터와도 연관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선한 쪽도 악한 쪽도 너무 싱거워서 부딪히는 매력이 감소한 것. 어쩌면 주인공 안에 진정한 ‘선’ 이 없으니 영화 속에도 ‘악’ 다운 ‘악’이 없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에 영화에서 얘기하는 메시지를 생각해 볼 때 이 점은 정말 아쉬운 점이다.

  무섭지도 않고 주인공도 약한 <콘스탄틴>에서 뭘 건질까 싶지만 이 영화에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있다. 몇 개 안되는 간단한 문장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성경책이 갖고 있는 주제의 요약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인간과 선택이다.

  영화에서 가브리엘이 말한다.

  “너희는 크나 큰 은총을 받았어. 주의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살인마든 강간범이든 회개만 하면 주의 품에 안길 수 있지. 우주만물 중 인간만이 그런 큰 혜택을 받았어.”

  대사를 하는 가브리엘을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대천사 가브리엘조차 인간을 질투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마치 영화<트로이>에서 브래드 피트가 신들은 실상 인간을 질투한다고 말하는 부분과 묘하게 비슷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 말은 사실이다. 사실 종교를 떠나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살고 있는 생명체는 세상에 인간밖에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의지를 갖고 선택할 수 있으면 또 자신이 선택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인간만이 갖는 이 혜택이 얼마나 큰가하면 이 선택 안에는 신도 들어가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엔 종교의 자유가 있다. 이는 헌법에도 명시된 것이다. 어떤 종교든지 신이 창조주이고 인간이 피조물이거늘 피조물이 창조주를 선택하다니! 이보다 더 큰 선택권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가브리엘의 말처럼 바로 이 선택이 완전히 인간의 몫이어서 항상 바른 길로만 갈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어렵고 중대한 결정이라도 신조차 나를 대신해서 나에게 어떠한 것이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이건 나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결과도 책임져야할 의무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만약에 무엇이든지 가야할 길만을 날 대신해서 알려주는 신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신의 꼭두각시일 뿐 그 신이 사랑하는 주체인 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내가 신이 보여준 최선의 길을 알고서도 내가 다른 것을 선택했을 때조차 날 버리지 않고 그 의사를 존중받을 때 비로소 난 인형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창조주조차 이렇듯 소중히 아끼고 존중하는 ‘나’이고 ‘너’인데 세상에 사람만큼 귀한 것이 또 있겠는가!

  그렇지만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 콘스탄틴이 얘기한 것처럼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건 마치 내가 하늘을 보는 것과 하늘이 날 보는 것이 같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난 눈에 보이는 하늘만 보이겠지만 하늘은 나와 다른 것과 모든 것이 다 보일 것이다. 여기서 콘스탄틴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고 했지만 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선택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어떠한 것이든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사실 나도 나의 신을 생각 할 때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걸 주는데도 받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면 주는 쪽은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럼에도 난 나의 신이 날 사랑한다는 걸 알기에 나도 사랑하기로 선택한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기에…….

  사랑하기로 ……. 자신조차 선택 안에 넣으신 ....나의 조물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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