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시작 된 휴가. 2박 3일 동안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보려는 요량으로 산속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자다가 나왔다.

  사방을 둘러 봐도 푸른 산과 나무뿐인 작은 집.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산이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그 윤관을 드러냈다. 하늘도 산도 다 같은 검은 색이다. 다만 도화지에 그린 먹의 옅고 짙음이 차이나 듯 그 검은 빛이 달랐다.

  첫 날은 그냥 산을 마주 하고 있었다. 산은 그냥 거기에 있었고 나도 그냥 그 너머에 마주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둘째 날,  산이 날 보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전과는 그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그러더니 산이 나한테 말을 걸었다.

  “넌 누구니?”

  너무나 난데없는 물음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이 막히자 난 오히려 반문을 했다.

  “넌 누군데?”

  “난 산이지.”

  다 묻기도 전에 나와 버린 답. 난 더 당황해서 ‘뭐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이거냐?’ 하며 ‘그럼 난 그냥 나지.’ 라고 우겨 보려다가 너무 속보는 것 같아, 그냥 침묵으로 내 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산도 날 재촉하지 않았다. 그냥 날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산을 내려온 지 이제 6시간정도. 내 눈앞에 산은 없지만 난 아직도 산이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 모습 그대로. 마치 내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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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에 앉은 건 분명 네 사람이다. 근데 오르락내리락하는 밥숟가락은 하나뿐이다.

  “뭐야? 다들……. 밥은 먹으라고 있는 거야. 보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이는 자신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는 듯 먹는데 열심이다.

  “이름이 뭐니?”

  정아가 묻는다.

  “아줌마는 뭔데?”

  “아, 난 정아, 황보정아. 근데 나 아줌마 아닌데.”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아이가 정아와 정민을 번갈아보며 말한다. 

  “뭐야, 넌……. 넌 왜 네 이름 얘기 안 하는데?”

  그냥 넘어가는 걸 놓아 줄 정민이 아니다.

  “이 아저씨가, 정말. 나 밥 다 안 먹었어. 밥 먹을 때는 애도 안 건드린다는 말 몰라?”

  아이가 옆에 앉아 있는 마루를 가리키며 밥풀까지 튀기면서 정민을 향해 소리치고는 다시 밥숟가락을 뜬다. 고반장은 아이한테 연신 당하기만 하는 정민이 우습다.

  “아!”

  고반장은 그제야 은이가 생각나서 휴대폰 버튼을 누른다.

  “예 어머니, 접니다. 은이… 아직도 웁니까? 아, 예 좀 바꿔주세요. ……. 은아? 응, 그래, 괜찮아. 그래, 기다려 봐. 은이 미안하다는구나. 그리고 청이 찾아준 거 고맙다고도 전해 달라는구나. 나도 인사가 늦었지만, 고맙다.”

  그는 진심을 다해 얘기했다. 아이도 그 걸 느꼈는지 대답은 없지만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은이가 바꿔 달라는데 받을래?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다는 구나. 내가 말해도 원 듣지도 않으니…….”

  고반장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주춤거리면서 내민 고반장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듯 갖고 간다.

  “밥 먹어.”

  달랑 한마디 하고는 휴대폰을 고반장에게 다시 내민다.

  “그래, 은아 ……. 응, 그래 알았다. 늦었지만 밥 먹고 자라. 아빠 늦으니까, 할머니한테 그렇게 말씀 드리고. 그래, 알았다. 잘 자라.”

  잘 자라고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아이를 향한 정이 느껴진다.

  그새 아이는 밥을 다 먹고 물 한잔을 달게 마시고는 트림까지 하고 있다. 고반장은 아이가 처음 봤을 때보다는 훨씬 안정돼 보여 안심이 된다.

  아이가 입가를 손으로 쓱쓱 닦고는 고반장에게 손을 내보인다.

  고반장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진. 그것 때문이잖아. 나 가야 된다고. 지금도 너무 늦었단 말이야.”

  아이가 시계를 보며 재촉한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행동에 세 사람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다.

  “사진 안 보여줄 거면 나 그냥가고.”

  아이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옆에 있던 정민이 황급히 아이를 잡는다.

  “가긴 어딜……. 너… 너……. 여기가 어딘지나 알어? 쪼그만 게 이 저녁에, 혼자 어딜 간다고.”

  그가 말까지 더듬으며 아이를 말린다.

  “그럼 빨리 끝내자고.”

  아이가 다시 고반장에게 손을 내민다. 아이가 내민 손바닥을 가만히 보던 그는 주머니에서 뺀 자신의 손을 살며시 위로 올려놓는다.

  “이름… 아직 얘기 안 했는데……. 이름을 못 부르니까 너무 불편하구나.”

  고반장이 아이의 손을 잡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악수를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손이 수줍게 허공에 매달려 있다. 당연히 자신의 손에 사진이 올라 올 거라고 예상했던 아이는 좀 놀란 눈으로 고반장을 본다. 그를 보는 아이의 표정에 이상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망설이 듯 달싹거리던 아이의 입이 마침내 열린다. 

  “채희.”

  “그래, 채희야.”

  고반장이 기다렸다는 듯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너무 늦었다고 했지? 그래, 집에서 걱정하겠구나. 가자. 데려다줄게.”

  그는 그대로 채희의 손을 잡고는 부엌을 나간다. 두 사람이 나가자 부엌에 남겨진 정민과 정아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돈다.

  “오늘, 고마웠어. 갈게.”

  정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들리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그가 일어나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정아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내뱉어진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쉬고 계셨던 것 같은데 폐가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문 앞에서 고반장이 정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정민은 인사도 없이 빨리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듯 차에 시동까지 켜놓고 출발 대기상태이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정민이 때문에 고생 많으실 텐데. 정말 너무 감사해요.”

  “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 이제 그 녀석도 제법 형사 티가 납니다. 좀 컸다고 잔소리는 어찌나 심한지……. 어쩔 때는 녀석이 반장 같고 제가 꼭 신참 같다니까요, 허허”

  사람 좋은 고반장의 소리에 정아가 처음으로 밝게 웃는다. 그런 고반장 옆에 좀 불편하다는 듯이 손을 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주 잡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채희가 그의 옆구리에 붙어있다.

  “밥, 맛이 없었지?”

  “응. 반찬도 없었고.”

  대답이 너무 솔직하다.

  “피. 혼자 다 먹었으면서.”

  “그거야 배고프니까 먹은 거지, 뭐 맛있어서 먹은 건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말끝이 흐려진다.

  “다음엔 정말 맛있는 거 해줄게. 나 요리 잘해. 여기 이 번호 갖고 있다가 언제든지 뭐든지 뭐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화해줄래? 다 해줄게. 약속이야.”

  정아는 채희에게 준비해 둔 자신의 명함을 내민다. 채희가 선뜻 받지 않자 그녀가 명함을 채희 앞으로 더 바짝 내민다. 채희가 명함 쪽을 슬쩍 보고는 마지못해 받는다는 듯이 휙 가져가서 주머니에 그냥 마구 쑤셔서 넣어버린다. 정아는 그런 채희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장난을 친다. 채희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서 싫다는 표현을 해보이지만 되레 정아 눈에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더 귀여워 보여서 손이 쉽게 물려지지가 않는다. 고반장이 채희를 차에 올려놓고 옆에 앉자 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아만 남긴 채 왔던 길로 다시 사라져 버린다.

  세 사람이 떠나고 집으로 들어온 정아의 눈에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모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고반장이 갖고 온 모자를 아이가 잊어버리고 두고 간 모양이다. 정아는 소파에 털썩 앉아 한참 동안 모자만 이리저리 만져본다. 아까 채희에게 다 하지 못한 장난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여자 아이 모자치곤 너무 색깔이 어둡다. 그치? 마루야?”

  정말 대답을 듣자고 물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대답도 없이 텅 빈 공간 구석 구속에서 메아리치는 자신의 물음을 견디기가 유난히 힘이 든다. 그녀는 모자를 움켜쥐고는 옆에서 내내 그녀 옆을 지키고 있던 마루를 힘주어 앉는다.

  “괜찮을꺼야. 그래, 괜찮을꺼야.”

  그녀의 고개가 꽉 안고 있는 마루의 목덜미에 묻혀서는 한참동안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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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를 찾아서 - 할인행사
마크 포스터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Finding Neverland
 

“Just" or "Not just"


  요정과 마법가루, 악어와 갈고리 손,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와 그 아이가 사는 곳 네버랜드. 자, 이 아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아마도 이 아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피터 팬!” 탄생된 후로 결코 사라지지도 변하지도 않는 이름. 단지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잠옷만 입은 채 런던의 빅벤 위를 날아다니는 게 상상이 됩니다. 마치 상상의 나라로 들어 갈 수 있는 주문과도 같은 이름 “피터 팬” . 바로 그 “피터 팬”이 만들어진  과정을 이 영화  <Finding Neverland>에서 만났습니다.

  

  사실 <피터 팬>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는지 몰랐던 저로서는 영화의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흥미가 갔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매력 만점의 남자배우인 조니 뎁을 <피터 팬>의 저자인 배리 역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습니다. 정말 이 배우는 보헤미안 느낌이 그대로 나는 해적 역에서부터 말쑥한 정장차림의 런던 신사까지 안 어울리는 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영화가 배리를 지적인 작가로서 보다는 순수함을 지키려는 사람으로서 더 가까이 바라봤기 때문에 조니 뎁에게 이 배역이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조니 뎁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 영화의 가중 큰 특징은 배리가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그 속에서 영감을 얻고 해적과 요정을 상상하고 하늘을 날고 칼싸움을 하는 등 상상의 나래를 펴는 장면이 현실과 상상의 구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연출이나 편집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흐름과 표현 기법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이 상황에 따라 배리도 되고 실비아도 되고 아이도 될 수 있게끔 감정이입을 적절히 유도하는데요, 그 부분이 절대로 과장되게 미화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나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영화는 눈앞에 있는 현실을 못 본체 하라고도 또 상상의 나라가 실제로 눈앞에 있다고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상상하라. 그리고 그냥 믿어라.”라고 얘기하는데요, 영어 자막으로 보면 이 부분이 더 명확해 집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똑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는데 바로 “just"입니다.

  

  배리가 애견 포르도스를 거대한 곰이라고 상상하면서 함께 춤을 추는 장면에서 피터는 배리를 비웃습니다.

  


  피터 :  It's just a dog. (그냥 개잖아요.)

  배리 : Just a dog? (그냥 개라고?) Just? (그냥?) That's like saying "He can't climb that mountain, He's just a man." Or "That is not a diamond, it's just a  rock." (그건 “사람은 산을 오를 수 없어”나 “다이아몬드는 돌 일 뿐이야” 라고 말 하는 거랑 같지.)

         Just……. (그냥이라는 말은…….)

  

  이 부분에서 “just”는 상상을 가로막는 위험한 의미로 표현됩니다. 의미가 있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조차 “단지, 그냥, 그저…….” 등등의 별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말로 표현됐던 이 “just”가 마지막에서는 전혀 다르게 사용됩니다.


  

  배리 : She went to Neverland. You can see her if you want to anytime. (엄마는 네버랜드로 가신거야. 넌 언제나 찾아가서 엄마를 만날 수 있단다.

  피터 : how? (어떻게요?)

  배리 : By believing, Peter. Just believe. (믿음으로써, 피터. 그냥 믿는 거야.)

  

  같은 “just” 지만 여기서는 상상을 가로막는 단어가 절대 아닙니다. 바로 상상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단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없는 것도 만들 수 있는 상상의 시작으로 표현되니까요. 그냥 믿으라고요.


  

  모든 아이들은 결국 영화 속 배리가 실비아의 큰아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순식간에 어른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아이로 돌아 갈 수 없죠. 한마디로 다시 순진해 질 수는 없습니다. 몰랐던 걸을 알 수는 있지만 다시 몰랐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순진했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서 이미 어른이 돼 버린 내가 굳이 아이로 돌아 갈 필요는 없습니다. 순진할 수는 없지만 순수할 수는 있으니까요. 그리고 순수하다는 것은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이건 내가 지금과 현실을 다 알면서도 충분히 다른 무엇을 꿈꾸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건 때때로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에서 날 보호해주는 보호막이 돼주기도 하고 반대로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비상구가 돼주기도 하죠. 그리고 순수하다는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나 또 어느 시간에서나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그냥 믿음으로써.”


  어때요? Neverland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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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반장의 말을 들은 정아도 얘기를 마친 고반장도 한 동안 말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니...놀라운 일이군요.”

  “뭐야, 그게 다야?”

  정아의 반응이 정민이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자 오히려 그가 더 놀란다.

  “그게 뭡니까?”

  “말 그대로 동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죠. 동물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같이 사소한 것을 주인에게 전달해 주기도 하지만 아픈 곳이나 불편한 곳을 알려줘서 병을 호전시키거나 예방을 하기도 하고 나쁜 버릇이나 성격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요. 그 중 몇몇은 사진만 보고서도 실종 된 동물을 찾아줄 만큼 동물과의 교감이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찾은 동물도 있고요.”

  “웃기지마. 그걸 다 믿는단 말이야? 그게 말이 되냐고? 동물이랑 어떻게 대화가 된단 말이야?”

  정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정아가 어이가 없다.

  “그건 저 애가 일어나면 애한테 물어 봐. 나한테 묻지 말고.”

  흥분해서 말하는 정민과 다르게 정아의 목소리는 전 보다 더 덤덤해진다.

  “언제쯤 일어날까요?”

  “큰 문제만 없다면 곧 일어날 거예요.”

  “혹시 제가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준 게 아이가 쓰러진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고반장은 자신이 너무 성급히 사진을 들이 밀며 아이를 다그친 게 못 내 신경이 쓰인다.

  “글쎄요, 전혀 아니라고 할 수 는 없을 것 같아요. 아이가 정말 동물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영향을 받았겠죠. 아시겠지만 사진 속에 강아지 상태가 정상은 아니니까요.”

  “영향을 미쳤다면 그게 어디까지일까요? 그게... 저는 아직도 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는 단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확히 청이가 어디 있는지를 은이에게 말해줬습니다. 대화가 된다는 건 적어도 말이 오고 가는 것 아닙니까?”

  “정민이랑 같은 걸 물으시는군요.”

  고반장의 물음에 정아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고반장님의 말씀이 맞아요. 대화라고는 해도 사실 일방적이긴 하죠. 저도 사람이 동물의 생각과 의사를 읽을 수는 있어도 그 반대가 가능하다는 사람은 아직 들은 적도 본적도 없으니까요.”

  “그 반대가 뭐야? 다른 게 또 있어?”

  “간단히 얘기하면 동물의 마음을 알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각을 동물에게 전달해서 상황을 이해시키거나 행동을 유발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야. 한마디로 그 누구도 타잔은 아니라는 거지. 이쪽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어도 저쪽이 이쪽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어.”

  가만히 정아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고방장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만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이 상황을 완벽히 받아들이고 있으며 자신은 보고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아이의 일까지도 완전히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거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제가 하는 말이라지만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인데 의학공부까지 하시는 학자로서 이렇게 간단히 믿을 수 있다니……. 혹시 전에도 이런 케이스, 있으셨습니까?”

  고반장의 의문에 정민도 묻고 싶은 걸 놓쳤다는 듯이 한마디를 더한다.

  “내 말이... 어쩐지 너무 담담하더라니……. 뭐야?”

  정민까지 가세하자 정아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연다.

  “사실 한국에서는 처음이지만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면 만난 적이 있어요. 재작년인가? 미국 학회 때, 현지 교수님댁에 초대를 받아 댁을 방문했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 이웃에 사신다면 어떤 사람을 소개해주셨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바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였었죠.”

  그제서야 정민은 정아의 반응이 이해가 가는 듯 고개만 조금 끄덕이고는 그냥 지나갔지만 그가 놓친 걸 고반장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보박사는 이미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무언가를 그 사람에게서 봤다는 말이군요.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 저나 정민이가 겪고 있는 혼란과 의심과 같은 감정을 단번에 무마시킬 만큼 확실한 그 무엇을! 그런 건가요?”

  고반장의 물음에 정아가 정민을 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정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지만 웬지 정민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황하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만 있던 정민의 눈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반짝인다. 바로 말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못 마땅한 것이 짐작된다는 듯 그의 눈살이 잔뜩 구겨진다.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자 고반장은 뭔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듯싶어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던진 말이니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말해.”

  정민이 기대있던 소파에서 몸을 조금 뗀다.

  “말하라고. 그게 뭐야. 뭐냐고? 그 자식한테 보여준 게 뭐냔 말이야?”

  정민의 물음에 끝가지 정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서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녀의 팔목을 거칠게 잡아 올린다.

  “아”

  “정민아.”

  정아의 아픈 소리와 정민을 말리는 고반장의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어느 샌가 세 사람 모두 소파에서 일어나서는 어정쩡한 자세로 시선이 빗나간 체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다.

  “배고파.”

  그 순간 어디선가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한마디가 불쑥 튀어나온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아의 방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아이가 열린 방문에서 막 나오더니 세 사람 앞에 선다.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아 옆 빈자리에 털썩 앉고는 다리까지 소파위로 올린다. 정아 옆에 있는 줄 알았던 마루는 언제 아이가 있는 방으로 갔었는지 아이와 같이 방문에서 나오더니 아이가 소파 위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위로 올라가서는 아이를 따라 앉는다. 아이를 보는 마루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순간 끊어질 듯 팽팽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느슨해진다. 아이는 세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더니 다시 한 마디 던진다.

  “배고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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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으면…….


  낯선 땅에서 날 처음으로 반겨 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반갑게 인사해 주고 따뜻하게 웃어줬던 그 사람. 많이 가지지도 넉넉하지도 않았지만 식사 때 찾아가면 상위에 숟가락 하나 더 올려 주고 빈손으로 그냥 올라치면 이것저것 챙겨가라며 봉투에 음식도 담아주고 허전한 손도 잡아줬지요. 그 사람이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야 늘 다른 사람만 챙기던 그 사람 옆에도 그 사람을 챙겨 줄 사람이 생겼다는 얘기니까요.

  작은 교회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나누어서 결혼식이 올려졌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정성스레 꽃꽂이한 꽃들이 놓여지고 강당에는 색색종이가 예쁘게 깔린 식탁들이 줄을 지어 펴졌습니다. 누가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하나씩 준비해 온 음식들이 하나 둘씩 식탁위에 올려지자 예배당은 어느새 축하객들로 발 딛을 틈도 없어졌습니다. 이것저것 뒤에서 준비하느라 이미 시작한 식의 앞부분을 조금 놓쳤지만 저도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 속에 끼여 그 사람을 그 날 처음으로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바로 이 찬양이 축가로 불러졌습니다.



내가 천사의 말 한다 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소용 없으니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나 있는 모든 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영원하네.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치 않으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불의 기뻐하지 아니 하니 내가 천사의 말 한다 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 소용없으니
산을 옮길 믿음 있어도 나 있는 모든 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영원하네.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나 있는 모든 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 영원하네...영원하네... 영원...영원히


 

  누구보다도 그 사람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곳보다도 그 장소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찬양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있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으니까요. 제가 이때까지 참석한 어떤 결혼식보다도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 안에...또 내 안에…….

  


 

http://music.bugs.co.kr/Info/album.asp?cat=Base&menu=m&Album=1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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