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아직도 잠자리가 불편해요, 리디아?”
레지나가 채희에게 가방을 매주며 다정히 묻는다. 채희는 아무 대답 없이 그냥 가방을 매고는 문을 나선다. 레지나의 입에서 짧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너무 걱정마세요, 레지나 수녀님.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만한 것도 다 수녀님 덕분입니다.”
어느 샌가 사택 문 앞에 마틴 신부가 나와 있다. 단정히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얇은 은테안경, 서른이 막 넘었을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레지나 보다도 더 어려 보인다.
“제 탓입니다.”
레지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걱정이에요. 어제 그 분들도 그렇고. 아무래도 다시 자리를 옮겨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 온지 이제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꾸 거처를 옮기는 건 리디아한테도 좋지 않아요.”
“아니에요. 아무래도 다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지나는 마틴 신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휴~~~”
마틴 신부에게서 아까 레지나에게서 나왔던 것보다 더 깊은 소리가 들린다.
터벅터벅. 은은 학교로 가는 길이 편치 않다. 마음이 무거우면 몸도 따라가는 법. 고개는 땅만 보고 있고 한 걸은 한 걸음 옮기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은이 막 문제의 학교 앞 모퉁이를 도는데 무언가와 부딪힌다.
“아, 미안…….”
은이 고개를 들고 사과의 말을 하는데 끝이 맺어지지가 않는다.
“어?”
은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힘들게 고개를 숙이고는 가던 길을 간다. 발걸음은 아까 보다도 더 무겁다.
“야, 넌 애가 인사도 안하냐?”
채희가 은을 막아선다.
“아는… 척 하지…말라고 했잖아.”
은은 채희랑 마주친 것뿐인데도 벌써 눈이 빨갛다.
“너, 또? 아침부터 정말 왜 그래? 인사를 해도 우냐, 넌?”
“몰라, 너만 보면 그냥 눈물이 난단 말이야.”
“그거야 니가 워낙 나한테 지은 죄가 있으니까…….”
채희의 말에 조금 가라앉았던 은의 눈가가 다시 빨개지자 채희가 말끝을 흐린다.
“됐다. 그만 하자. 그건 그렇고 너, 이 언니 알지?”
채희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은에게 건네자 은이 받아 본다. 명함이다.
“어, 정아 언니 알아. 이거 언니가 줬어? 나도 줬는데.”
채희와의 사이에서 뭔가 공통점을 찾은 은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 언니 어디 사는지 알아?”
“집은 모르는데.”
“그래?”
“근데 전화하면 언니가 와. 저번에도 내가 전화했는데 학교로 왔는걸.”
“그래? 그렇단 말이지…….”
채희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은을 빤히 쳐다본다. 은을 보는 채희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뭔가 마음을 정한 눈치다.
“너 학교 가는 거 싫지?”
채희가 은이 쪽으로 한발자국 다가서며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이 묻는다.
“아니.”
은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나랑 같이 가자.”
급기야 채희가 은의 손목을 잡고는 끌기 시작한다.
“안 돼. 너도 학교 가야하잖아.”
은이 억지로 잡힌 손을 빼면서 뒷걸음치자 채희는 그런 은을 순순히 놓아 준다. 그런데 어째 그게 더 수상하다.
“너 밤에 가끔 청이 안고 엄마 부르면서 울지? 혹시 그거 니네 경찰아빠도 아시니?”
은의 눈이 두 배만해진다.
“그냥 뭐. 그러지 말라고. 개도 당황하거든. 개는 모르잖아. 네가 왜 우는지. 물론 너희 아빠야…….”
고개를 이래저래 돌리며 짓궂게 애기하던 채희의 말은 다시 붉게 물든 눈망울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은의 눈물을 보고는 그냥 들어가 버린다.
“말하지 마. 아빠한테. 아빠가 알면…….”
은이 또 울먹인다.
그런 은을 보는 채희의 눈빛이 조금 씁쓸하다. 채희가 은을 본 게 세 번인데 볼 때마다 은을 울린다.
“알겠어, 야. 그만 좀 울어. 말 안 할 테니까, 그냥 학교 가라. 학교 가.”
채희가 은을 슬쩍 민다. 그러고는 뒤 돌아서서 학교 정문을 등지고 길을 내려간다. 채희의 뒷모습이 은의 뿌연 시야에 어른거린다. 은이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가며 학교 정문과 멀어져가는 채희를 번갈아 쳐다본다. 사실 은은 채희랑 가고 싶다. 하지만 엄마랑 한 약속이 자꾸 걸린다. 착한 아이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아빠랑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근데 학교를 안가는 건 아무래도 착한 아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은의 생각이다.
“채희”
갑자기 은의 입에서 아주 작게 부르는 소리가 난다. 마자 아이의 이름이 채희라고 했다. 아침에 아빠에게서 들은 아이의 이름이 이제야 또렷이 생각이 난다.
“채희야.”
은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크게 채희를 부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채희와의 거리가 제법 벌어졌다. 은은 학교로 향해 올라오는 아이들을 거슬러 내려가면서 채희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채희야. 채희야, 같이 가.”
은이 더 큰 소리로 채희를 부른다. 마침내 채희가 뒤를 돌아본다. 채희의 눈에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은이 보인다.
‘참, 은아. 어제 그 아이 이름 모르지? 이름이 채희란다. 집도 이 근처고. 어쩌면 자주 볼 지도 모르겠구나. 친하게 지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