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목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환상을 없애는 것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또는 눈물로 그쳐선 안 될 일이었다. 만남도 눈물도 사랑에서 오고 또 사랑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랑은 사회 안에서 반드시 앙가주망(참여)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다만 '나 자신과 끝없는 싸움'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다니엘 에므리 교수의 사회에선 사랑의 앙가주망이 그 출발부터 가능했다면 우리 사회에선 우선 증오의 벽을 깨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강요된 증오의 벽은 워낙 두꺼웠기때문에 그 벽을 깨려는 몸부림은 흡사 달걀로 바위를 치는 행위와 같았다. 또 바로 그 증오의 그물에 걸릴 위험을 항상 안고 있었다.
에뜨랑제라는 말이 멋있게 들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일 때의 이방인은 다만 덧없는 외로움의 대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처지가 달라지면 의식도 달라진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를 통하여, 냉전논리의 골이 이젠 너무 깊어져 뒤집어도 날카로운 날이 서 있다는 것을 보아야 했다. 냉전의 이데올로기인 반공이 실제로 인간에 대한 증오로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반공논리의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 반공논리와 똑같이 인간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반대하고 비방하려는, 바로 반공논리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특히 해외에서 간첩이 아주 쉽게 만들어지듯이, 안기부의 끄나풀 또한 쉽게 만들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