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 전혜린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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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 외로운 목숨 하나 데리고 낯선 마을 낯선 들판을 호롤 헤매다 미움을 버리고 증오를 버리는 일이다. 오직 사랑과 그리움만을 간직하는 일이다.

주인공 - 작중 인물들 중에서 가장 목숨이 끈질긴 존재

*겹치는 불행 뒤에는 언제나 겹치는 행운이 뒤따른다. 만약 불행을 통해 자기를 반성하고 노력을 배가시킬 수만 있다면 누구든 불행이 그만한 크기의 행운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예비 관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정신병자 - 제 정신만으로 살아가는 인격자

식인종 - 인구증가와 식량증가를 동일시하는 종족

자살 -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명확히 증명해 보이는 일. 피조물로서의 경거망동. 생명체로서의 절대 비극. 그러나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

달팽이 - 한 여름의 고독한 여행자. 그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여행자

대학입시 - 대학생을 선발한다는 명목으로 재수생을 배출해내는 제도

불행 - 행복이라는 이름의 나무 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 나무만한 크기의 그늘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그 그늘까지를 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 - 신이 매사를 완벽하게 선처해 놓았는데도 이에 불만을 품은 인간들이 처우개선을 구두로 상소하는 행위.

주정뱅이 - 술이 인간을 마셔버리고 동물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하려고 발악적으로 애쓰는 사람

학구파 - 학점구걸파의 준말

편지 - 오늘날은 고독의 터널 속에 갇힌 사람들의 생존여부를 알리는 통지서로 널리 애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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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2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와 편지에 대한 내용이 맘에 드네요.
오랫만이네요.^^

젊은느티나무 2004-05-2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이죠 잉크냄새님! 무척 반갑습니다~! 잠시 저 외도(?!)를 했었더랬죠..*^^* 알라딘이 그리워져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여지만 발견할 수 있으면 이미 그건 극한 상황이 아니다. 농담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란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의 문 같은 거였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간에 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핏줄을 산산이 흩뜨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장독대 옆에 서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여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이질감이란 얼마든지 적대감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치사한 일인가.

정말 좋은 친구는  화제가 끊긴 동안이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가장 내밀한 소통의 시간이 되는 친구였다.

보셔요, 엄마, 두고 보셔요. 엄마가 그렇게 억울해하는 건 당신의 생살을 찢어서 남의 가문에 준다는 생각 때문인데 두고 보셔요. 나는 어떤 가문에도 안 속할테니. 당신이 나를 찢어 내듯이 그이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찢어 낼 거예요. 우린 서로 찢겨져 나온 싱싱한 생살로 접붙을 거예요, 접붙어서, 양쪽 집안의 잘나고 미천한 족속들이 온통 달려들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그들과 닮은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이 될 테니 두고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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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티베트는 영토가 남한의 12배에 달할  정도로 광대하지만 인구는 200만명 남짓이다. 장구한 독립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중국에  편입되어 서장 자치구로 전락했다. 중심 도시인 라싸에서 독립국의 흔적을 엿볼 수는 있지만, 티베트인은 이제 중국 내 55개 소수 민족 중 하나일 뿐이다.


  티베트는 평균 기온이 섭씨  1.1도에 불과하고 평균 고도는 4,000미터에 이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지만,  고지대 특유의 열악한 거주 환경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식물의 생장 한계선을 넘어선  고지가 대부분인 티베트에서 풍성한  곡물이 자라는 전답과 드넓은 숲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사실과 함께 티베트가 동쪽을 제외하고는 히말라야 등의 여러 산맥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고립과 단절은 티베트의 또 다른  지리적 특성이다. 그래서 고유의 물질 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흔하디 흔한 문명의 이기가 유입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티베트인들은 양가죽 옷 추빠를 입고,  가축인 야크의 분뇨까지 연료로 사용한다. 강을 건널 때는 야크 가죽으로 만든 배를  주로 이용하는데, 강을 건너는 동안 배에 스며든 물을  계속 퍼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철도는  찾아볼 수 없고 중심 도시도 1주일에 이틀 정도는 전기  공급이 끊긴다. 한없이 가난하고 고단한 일상이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나 티베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 문명이 크게 발전한 곳이다. 마치 천상의 세계에 속한 듯, 티베트의 모든 땅은 영혼과 정신이 지배한다.


  티베트의 정신 문명은 거대한  사원과 궁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캉 사원도  티베트의 상징이지만,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포탈라궁이 단연 대표적인 티베트 건축물로 꼽힌다. 포탈라 궁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거처로 라싸에 있다. 높이 120미터에 달하는  이 궁전에는 999개의 방이 있고 2만개 이상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포탈라 궁을 지탱하는 기둥은 1만 5,000개나 되는데, 녹인 쇳물을 나무 기둥 속에 부어 지진에 대비했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고려해 보면 이렇듯  거대한 종교적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그들이 1,000년의 세월 동안 노동력과 물자를 투여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혹 지독한 정치 세력이라도 있어 그런 착취를 자행했던 것일까. 하지만  1,000년 동안 주민을 설득하는 일이, 어디 정치적 음모만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포탈라 궁의 위용에서  티베트인들의 신실한 믿음과 헌
신을 읽어 낸다 한들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의식주를 개선하는 활동 대신 종교적  상징물 건축에 헌신할 만큼 티베트인들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고을 향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티베트인들에게 일상화된 오체투지의 종교적 고행도 놀랍다. 오체투지는  무릎을 꿇고 팔꿈치와 이마를 땅에 붙여 종교적  신심을 표현한다.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은 유명  사원 앞에서라면 의당 목격하게  되지만, 티베트 전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오체투지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발짝 걷다가 오체투지를 반복하면서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만큼 오체투지는 티베트인의 일상이다. 국내 한 일간지 기자의 목격담에 따르면, 어떤 청년은 8개월째 오체투지를 계속하며  라싸를 향하고 있었는데, 식기와  침구를 실은 손수레를 밀며  약혼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또, 순레  기간 동안 구걸이 당연시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자기 것  지키기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  시민에게는 구걸이 무능력한 걸인의 모습이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교류이다.


  불교가 지배하는 티베트는 정신의 세계와 속세가 합치되어 있다.  공덕을 쌓으면 누구나 극락왕생하며 부활한다는 믿음이 강해,  척박한 환경 따위나 현실의 고통스런 고행 정도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서구 세계에 알려지면서 세상을 경악하게 했고,  티베트인들은 야만 민족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야기한 장례  풍습도 실은 정신이 현실을 지배하는 티베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티베트에서 가장 일반적인 장례 방식은 자토, 즉 조장이다.  `문명인`들은 상상만으로도 소스라칠 조장은 시신을 새의 먹이로 제공하는  장례 방식이다. 조장의 전문 장의사는 조자바인데, 며칠 동안 집 안에 안치되었던 시신은  조자바에 의해 조장터로 옮겨진다. 이제 두 가지의  소도구가 필요하다.  먼저 볶은 보리를 뿌린  소나무로 모닥불을 피운다. 다음으로는 라마승이 사람의 뼈로  만든 퉁소를 불어 댄다. 연기와 퉁소 소리로  먼 산의 독수리를 부르는 것이다. 이때 시신은 살갗을 벗기고 뼈와 살을 발라 놓는다. 티베트인들은 독수리가 먹기 좋게  하려고 시신의 살을 잘게 자를수록 좋다고 믿는데,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욱 잘게 잘린다. 단 한가지도  그냥 버리는 부분이 없는 게 티베트인들의 시신이다. 내장과 골수  등도 독수리에게 던져진다. 뼛조각마저 부수어 보리에 버무려 독수리에게 준다. 티베트인들은 생활의 편안함은 물론,  육신마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대신 시신으로 배를 채
운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면 사람의 영혼도 하늘을  항하며, 조장을 통한 마지막 선행이  망자의 부활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독특한 풍습을 가능하게 한 티베트 특유의 불교 문화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티베트에 불교가 전파된 시기는 7세기경이다.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캄포 왕 (617~641년 재위)은 당나라와 네팔의 왕실에서 왕비를 맞아들였는데, 당나라의 문성 공주가 중국  불교를 티베트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세기경 불교는 티베트에서 주도적인 종교로 자리잡는다.


  그런데 13세기경에 티베트  불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정치와 종교를 장악한 사캬파의  부패가 심각해지면서 국가적 위기를  야기한 것이다. 승려들 사이에서 음주나 결혼이  일반화되었으니 종교적 수행은 겉치레에 불과했고 세속적 사리사욕이 그들의 본심이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총카파가 등장하여 티베트 불교의 개혁을 주도한다. 그가 이끄는 교파를  흔히 황색 교단 또는 황모파라
고 부르는데, 주로 노란색의 모자를 썼기 때문이다.


  총카파의 황모파가 일군  개혁의 핵심 내용은 세속화한 불교에 금욕주의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음주나 무절제를 비난하고,  종교적 지위가 세습되던 폐해를  막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의 의무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엄격한 종교적 수행을 강조한다.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을 의무화한 조치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교와 정치에서 세습제가  사라진다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고,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특수한 교리가 유래되었다.


  총카파의 개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환생 개념이 크게 강화된다.  종교적 지도자는 죽음의 장벽을 넘어 환생함으로써 현실 세계 속에 영원히 현현한다는 것인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반 불교에서도 환생을  종교의 내적 원리로 설정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처럼 죽음과 환생이 하나의 과정으로 밀착되어  있지는 않다. 지난 500년 동안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죽음과 함께 곧바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죽음이란 곧 새로운 출발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환생의 대표적 주체이자 종교적  지도자가 바로 달라이 라마인데, 제1대 달라이  라마는 총카파의 조카  게둔두프(1391~1475)이다. 달라이는 `바다` 또는  `넓고 깊음`을 뜻하고,  라마는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당대의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면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그의 환생자를 찾아 내고,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달라이 라마의 지위를 상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에까지 이르게 된다.

  티베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달라이 라마는 제5대  달라이 라마(1683~1706)이다. 그는 티베트 전체의 경쟁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세속적 권력까지  완전히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제 명실상부한 정치.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제5대 달라이 라마는 또 다른 권력 주체까지 창출한다. 판첸 라마를 지정한 것인데, 티베트의 제2인자 격인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순수하게 정신적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1인자와 2인자로 또는 정치, 종교의 지도자와 정신적  지도자로 구분되어 설명되지만, 또 다른 구분 방법도 있다. 자비와  관용을 표상하며, 현세에 관계하여 중생들을 고난에서 구하는 존재인  관음 보살이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다는 게 티베트의  믿음이다.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환생자로  여겨지는데, 아미타불은 관음 보살과는 달리 현세에  개입하지 않고 서방정토 극락에 살고 있는 부처이다.


  지금의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1935년  티베트 동북부 타크셀에서 출생했으며 속명은 텐진 캇초이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가부좌를 튼 채 열반에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이 향해 있던 호수에 몇 가지 글과 그림 등 징표가 나타났다는데, 고승들이  이 징표를 해석하여 한농가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어린 텐진 캇초에게 염주 등 제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들을 다른 물건과 섞어 내놓았는데, 그 꼬마아이가 정확히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구별해 냈다는 것이다. 이런 심사 과정을 거쳐 텐진 캇초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되었고, 수도 라싸로 옮겨가 13년간의  교육 과정을 거쳐서 1950년 티베트의 절대적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

  중국의 침략과 티베트의 저항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러나 티베트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했다.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직후 중국이 침략했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중국은 티베트를 제국주의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평화의 땅을 무력 침공했다.

  수백 년 동안 사법 제도와 입법 제도는 물론, 독자적인  군대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독립 국가 티베트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된다. 탱크를 앞세운 강대국 군대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티베트인들의 항쟁은 1959년 라싸의 무장 봉기에서 절정을 이루지만 이내  진압되고 만다. 중국의 침략 이후 1959년까지 무려 20만 명에  이르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항쟁이 얼마나 격렬했
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항쟁에 실패한 달라이 라마는 같은 해 8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1965년에는 티베트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후에도  항쟁은 계속되었고 중국의 무자비한 탄압도 멈추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티베트 승려와 불교 신도들이 처형되었으며 6,000여 곳의 티베트 사원과 문화 시설이 파괴되거나 글자 그대로 돼지 우리로 변했다. 국제  사면위원회는 1959년에서 1979년까지 중국 정부에 의해 살해된 티베트인들이 100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티베트 국민의 투쟁 방법은 두 가지였다. 네팔과 티베트 접경 지역의 무스탕에 근거지를 둔 `평화의 전사`라는 게릴라가  무력 투쟁을 대표하였다. 이들은 대만의 비공식적  지원을 받았고 미국 CIA로부터는 무기를 공수받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국과 대만이 후퇴하자 폭력적 방법은 쇠퇴하고 만다.


  티베트를 떠나 인도 북부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적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 티베트인들이 선출한 43명의 의원과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3명의 의원 등 총 46명이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의회가 최고 결정 기관이며, 내각은  8개 부처로 구성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의 대표로서 중국과의 협상과 국제 여론 조성 등을 주로 담당한다.


  한 국내 주간지(<시사저널>1996년 7월 31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달라이 라마는 불교의 연기법에 근거해 비폭력 투쟁의 당위성을 설명한 바 있다. 무력의  행사는 보통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절멸시키려는 경향을 띠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이를 분리된 존재로  여기는 시각이다. 이에 반해 달라이 라마는 나와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인연에 얽
혀 생성되는 만물은 결국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타자를 해치는 일은 곧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침략자 중국마저도 티베트인들과 공존해야 할 존재이므로, 무력이 아니라 설득과 화해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게 달라이 라마의 생각이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투쟁  전략은 서구 세계에서 특히 환영받아,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비롯해 파리 인권상과 미국의 위런버그 인권상 등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달라이 라마의 유명세 덕에 티베트 불교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티베트 불교 사원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전세계에 600여개가 세워졌고 티베트 불교의 추종자도 전세계에서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한편, 스매싱 펌킨스, 레스 핫 칠리 페퍼스, 푸지스, 오노 요코 등 미국의 대중 음악인들은 1996년 6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부근에서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티베트 해방 기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를 가졌다. 이는 1985년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라이브 에이드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다.


  티베트에 대한 호의적인 국제 여론은 결국 뒤집어 보면 중국을  향한 비난이 된다. 중국은 80년대 초 국제적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티베트 불교의 종교 행위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부흥은 곧 티베트의 분리 독립 요구를 낳을  것이 분명하기에 티베트 불교의 탄압은 중국의 대 티베트 정책의 기조가  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티베트에서의 종교 활동은 엄격히 통제되며 사원 재건축과 승려 수도 제한의 대상이다.


  국제 연합과 전세계 사회 단체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촉구하였고,  지난 40년간 협상이 이어졌지만 티베트 독립이 이루어질 징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중국의 등소평이나 이붕 총리는  티베트가 독립 요구를 포기한다면 점진적인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측에서 보면 독립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구호이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살아 있는  부처이고 절대적인 지도자이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한 자치구의책임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포탈라 궁을 세울 때처럼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편이 티베트인들로서는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국과 티베트의  시각에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근본적인 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재의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중에서

 

TIP!!

티벳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는 http://tibet.or.kr  에 자세히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방문해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 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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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갈 길이 멀고 험해도 지금 들어선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안정되고 여유로울까.

어렵고 힘든 순간들을 겪으면서도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생각 하나때문이었다.

꿈은 아름답다. 무언가를 꿈꾸고 있는 삶은 아름답다. 자기의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그러나 꾸준히 앞으로 나가는 것은 더없이 멋지고 값진 일이다.

자기 나라를 몽고라 부르지 말고, 반드시 몽골, 혹은 몽골리아로 불러달라는 것이다. 어리석고 낡았다는 뜻의 몽고는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를 무시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했다.

릴리가 내 친동생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말해주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편안한 삶, 결혼을 해서 아이들 낳고 남편의 울타리 속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갈 길이 열려 있는 친동생에게도 모두 버리고 홀로서기의 험한 길을 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 적어도 내 동생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해내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면 나는 망설이지 말고 홀로 거친 바다로 나가보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결혼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동생이 하려는 결혼이 자기 성장을 막을 것이 뻔하다면, 함께 커나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자기 배의 노를 스스로 저어가 보라고 말할 것이다. 십몇 년을 더 산 인생의 언니로서, 여자라는 동료로서, 그리고 비록 험하고 힘들지만 그 길을 택한 한 사람으로서 나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족 모두가 빨리 돌아오기를 염원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대체 누구인가. 이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부처님의 화신이자 종교 자유의 상징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16세기 중엽의 몽골의 알타칸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바다와 같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 나이에...'라는 말이다. 앞으로 더 나이들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바로 '이 나이'가 그 사람의 인생으로서는 제일 젊은 나이인데도 말이다. 바로 '이 나이'가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돌아가고 싶은 '참 좋은 때'인데도 말이다. 스스로 자신을 '이 나이에'라는 올가미로 얽어매지 않는다면 나이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언제 어느때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중국 격언이 있다. '늦게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하다 중단할 것을 두려워하라' 나도 늘 명심하고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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