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여지만 발견할 수 있으면 이미 그건 극한 상황이 아니다. 농담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란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의 문 같은 거였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간에 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핏줄을 산산이 흩뜨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장독대 옆에 서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여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이질감이란 얼마든지 적대감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치사한 일인가.

정말 좋은 친구는  화제가 끊긴 동안이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가장 내밀한 소통의 시간이 되는 친구였다.

보셔요, 엄마, 두고 보셔요. 엄마가 그렇게 억울해하는 건 당신의 생살을 찢어서 남의 가문에 준다는 생각 때문인데 두고 보셔요. 나는 어떤 가문에도 안 속할테니. 당신이 나를 찢어 내듯이 그이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찢어 낼 거예요. 우린 서로 찢겨져 나온 싱싱한 생살로 접붙을 거예요, 접붙어서, 양쪽 집안의 잘나고 미천한 족속들이 온통 달려들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그들과 닮은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이 될 테니 두고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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