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멋대로 살아왔어.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 대학도 다니다 때려쳤거든. 그러다 '누리'라는 이름의 그 남자를 알게 되었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쿠르드족 출신 전직 마약상. 직업이 좀 그렇지? 그런데, 난 괜찮았어.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구. 남자는 새출발하려고 감옥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어. 뭔가 의지가 있어 보였지. 결혼식장은 교도소 안이었어. 장소 따위가 중요한가? 어쨌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냐? 난 그렇게 생각했어.

  곧 아이가 생겼어. '로코'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착하디 착한 아들. 이제 6살이 된 그 아이는 한 번도 내 속을 상하게 한 적이 없어.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떤 괴로움도 잊을 수 있었어. 내게도 온전히 나만의 것,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내 것이 생긴 거야. 남편도 마음잡고 착실히 잘 살아주었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때론 그런 불안감이 들기도 했지.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일은 드무니까. 
 
  그날도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지. 친구와 만나고 남편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는데, 길이 다 막혀있었어. 경찰차와 경찰들이 그득한 거야. 폭발 사고가 있었대.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어. 그때 직감했어. 불안하게 이어지던 내 행복이 끝났다는 것을. 경찰이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더군. 못으로 만든 사제 폭탄이 온몸을 갈기갈기 다 찢어놓았다는 걸, 나중에 재판정에서 들었어.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죽는 것도 쉽지가 않아. 눈을 떠보니 살아 있었어.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누리와 로코는 왜 죽어야 했지? 경찰은 동유럽 마피아 짓이래. 웃겨, 미리 범인을 다 정해놓은 거 같아. 그날, 로코를 누리에게 데려다 주고 나오는데 백인 여자 하나를 길에서 만났었지. 새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도 않고 어딜 가려고 했어. 도난당할 수 있으니 자물쇠를 채우라고 알려줬지. 좀 이상하게 보였어. 거긴 이민자들이 사는 곳인데, 저런 백인 여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했어. 그 여자,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어. 분명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야.

  변호사가 용의자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알려줬어. 죽지 않고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 그 짐승같은 것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길바닥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지. 내 짐작이 맞았어. 새 자전거에 실었던 건 폭탄이었어. 백인 여자와 그 남편이 저지른 짓이었어. 쓰레기 같은 나치 추종자들. 아무 것도 모른다는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것들의 면상을 죄다 칼로 긁어버리고 싶었지. 나는 참고 또 참았어.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 편이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재판이 이상하게 흘러가. 집에서 나온 마약을 가지고 날 마약중독자로 몰아가고 있어. 여자를 봤다는 내 증언은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악마같은 것들의 변호사 놈은 뻔뻔한 얼굴로 나를 더 몰아붙였고, 난 결국 법정에서 그 짐승들에게 욕을 퍼붓고 말았어. 견딜 수가 없었지.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어. 질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어. 그 악마들이 사건 당시 그리스에 휴가차 있었다는 증언을 그리스 숙박 업자가 했고, 그게 먹혔어. 웃으면서 그것들은 법정을 떠날 수 있었지.

  항소를 하자고 변호사한테서 자꾸 연락이 와. 항소? 그런 게 의미있어? 난 이길 수 없을 거야. 내 방식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어. 사제 폭탄을 만드는 법을 찾아봤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 로코의 찢겨나간 부드러운 살과 혈관들을 떠올려 봤어. 그것들도 그렇게 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모든 걸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거야. 어쩌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 그리스, 거기에 그 나치 패거리들이 있어. 그 더러운 것들이 도피 여행을 떠났더군.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로코를 위해서, 누리를 위해서. 목숨값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줄 참이야.

  결국 난 그 악마들을 찾았어. 그리스 파시스트 놈한테 붙잡힐 뻔 했지만 용케 빠져나왔지. 해변가 캠핑카에 그 짐승들이 숨어있더군. 멀쩡히 잘 살아있었어. 매일 건강을 위해 해변을 달리더군. 난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폭탄은 완벽하게 준비됐어. 그런데, 좀 무섭고 떨려. 왜 그럴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쉬울 리가 없잖아. 그것들이 없는 사이 차 밑에 폭탄을 넣어두었어. 그대로 돌아서서 오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근처 나무에 새 둥지가 있었거든. 아기새를 어미새가 보듬고 있었어. 폭탄이 터지면 새들도 죽겠지.

  해낼 수 있을까? 로코와 누리를 생각해야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구. 저 미친 쓰레기들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난 죽은 거나 다름없어. 난 해야할 일을 할 뿐이야. 되돌려 주는 거지. 내 소중한 모든 걸 앗아간 악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는 거야.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 끝내야 해...


  파티흐 아킨의 2017년작 '심판(Aus dem Nichts, In the Fade)'의 주인공 카티야의 이야기다. 이 글에서 카티야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티야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카티야 역을 맡은 다이앤 크루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에게 있어 영혼을 불사르는 '인생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찾아볼 법 하다. 내 생각에 다이앤 크루거가 앞으로 어떤 배역의 연기를 하든 이 영화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카티야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독일어 제목 'Aus dem Nichts'의 뜻은 '무
()로부터'이다. 영어 제목 'In the Fade'의 의미가 더 명징하게 다가온다. 소멸, 사라짐의 의미이다. 



*사진 출처: cinema.de



*내일은 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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