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학교에서 들었던 교양 수업 가운데 '영화의 이해'라는 수업이 있었다. 꽤 많은 학생들이 듣는 대강의 수업이었다. 어느날, 강의 끝무렵에 한 학생의 질문이 있었다.


  "교수님에게 '내 인생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야, 그런 질문 좀 하지 말아. 난 그 질문이 제일 웃기고 한심한 것 같더라. 자신이 보는 영화가 다 자기 인생의 영화가 되는 거지, 무슨 그런 걸 꼽아 보고 있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교수는 나가버렸다.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내 인생의 영화. 그건, MBC 라디오에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FM 영화 음악'의 아주 유명한 코너였다. 매주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내 인생의 영화' 5편에 얽힌 사연을 선정해서 들려주는 그 코너는, 영화팬들에게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코너일 것이다. 늦은 새벽에 나오는 그 방송을 매일 청취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코너가 나오는 요일에는 꼭 챙겨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코너에 흐르던 음악,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1993)'에서 나왔던 그 음악도 참 좋았다. 음악 때문에 앤디 가르시아와 맥 라이언이 주연했던 영화까지 찾아서 보았었다.


  아마 그 코너 사연에 선정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지 않았을까? 당시에 그 프로의 인기가 대단하기도 했고, 막상 선정된 영화들 이야기 듣다 보면 대개는 작가주의 예술영화 제목들이 줄줄이 나오기도 해서 때로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영화를 언급한 정도로는 선정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쨌든 유명인이 아닌, 영화를 사랑하는 일반 청취자들의 인생 영화들 이야기에는 뭔가 마음을 울리는 지점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내 사연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 5편에 무얼 넣어야할까 하는 생각은 많이 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의 그 마지막 방송을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정은임 아나운서의 '내 인생의 영화'도 그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마지막 방송은 좀 많이 가라앉았었고, 방송이 끝나자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많은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여러모로 나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이제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았을까? 가장 많이 보았던 시절은 영화 공부할 때였는데, 1년에 대략 사백편에서 오백편, 그 보다 더 많이 보았을 것 같기도 하다. 공부를 잠시 쉬었을 때도 영화는 계속 보았으니까 학교 다닌 기간에만 대략 삼천편 가까이 될 것 같다. 누구는 1만편을 보았고, 누구는 2만편을 보았다는 소리도 들어서, 내가 본 것은 영화를 많이 본 축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냥 평균 수준 같았다. 나는 영화가 너무 좋아서, 죽을 때까지 내가 볼 수 있는 영화가 과연 몇편이나 될까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좋은 영화란 영화는 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보았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2009)' 이후로 영화와는 거의 멀어졌다. 뭐랄까, 그 영화는 내 영화 사랑의 종언 같은 영화였다. 3D영화라니, 그런 영화는 내가 알고 있었던 이전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영화와 그 산업 전반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그 이후로 나오는 어떤 영화를 보아도 시들했다. 마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 영화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영화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영화의 제목을 적어두었다가 꼭 찾아서 보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케이블 영화 채널을 돌리다가 어쩌다 보게 되는 영화들도 별로 없다. 최근작들 위주로 나오는 그런 채널 보다는 국회방송(NATV) 명화극장에서 보여주는 1970, 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 국민방송(KTV)에서 보여주는 예전의 오래된 한국 흑백 영화 같은 것을 본다.


  내가 상업영화 감독이라며 그냥 외면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도 그렇게 보았다. 그걸 보면서 내 영화를 보는 눈의 편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혹평을 받았던 그의 '우주전쟁(2005)'도 내게는 남다르게 보였다. 미디어에 대한 스필버그의 통찰도 괜찮았고, 특히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전 보았던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수색자(1956)'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울컥하기까지 했다.


  가끔 해외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보고 나면, '아니 고작 저 이야기를 하자고 영화를 저렇게 끌고 간 거야?' 하면서 허탈할 때가 있다. 이야기의 깊이는 얕아졌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들은 한없이 미시적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대가 바뀌었으니 영화도 그에 맞게 바뀌어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내게는 그 영화들이 고전 영화들의 끝없는, 그다지 의미없는 변주같다. 마치 필립 글래스(Philip M. Glass)의 음악을 듣는 느낌이다.

 

  오늘 문득 이문세의 오래된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을 떠올려 보았다. 영화에 대해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은 추억으로만 남은 것 같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지나간 사랑을 되돌리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내 인생의 영화'의 맨 마지막 편은 아직 쓰지 않고 남겨두었다. 미련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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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KBS '다큐멘터리 3일' 공무원 기숙학원 편을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수험생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계속 떨어지니까 결국은 그만 두고 다른 길을 찾는 사람도 있었고, 마침내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된 이도 있었다. 그 사람에게 공무원 합격하고나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삶의 안정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그 점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삶의 안정감'이라니,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어서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삶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면 저런 감정을 느낄 수가 있는 걸까?

 

  학교를 휴학하고 잠시 공공 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뭐랄까 '공무원의 세계'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른바 '칼퇴근'이 보장되고, 이런저런 수당도 괜찮게 주어지며, 자기 업무만 잘 해내면 그렇게 싫은 소리 들을 일도 없는 나름대로 좋은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조직사회의 특성상 나로서는 좀 견디기 어렵겠구나 하는 점도 있었다. 그 세계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사회, 개인의 창의성 같은 것은 전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막힌 사회로 보였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어느날 아침에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마침 그곳 기관장의 관용차가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직원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기관장에게 인사를 하는데, 그 장면이 마치 영화 같았다. '출근하셨습니까?'하고 외치자, 기관장은 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 '구역'의 왕은 그 기관장이었다. 속으로 '대체 뭐하는 거야'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내게는 무척이나 생경스러운 풍경이었다. 날더러 저렇게 하라고 하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물어보기도 했다. 못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공무원이 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공부를 그만 두고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공무원 시험이 떠올랐다. 그런데 알아보니 나는 시험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연령에 제한이 있었다.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해서 시험도 치루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것이 아닌가? 그 말도 안 되는 법령이 폐지되려면 그로부터 몇년이나 더 있어야 했다. 마침내 공무원 응시 연령 상한제가 폐지되고 나자, 4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합격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늦깎이' 합격자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 즈음에 나는 공무원으로 살아가기에는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며칠 전, 동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일찍 공무원이나 될걸 그랬어." 


  "공무원도 5급 이상은 월화수목금금금, 이렇게 산다고 하더라. 일이 그렇게 많고 힘들대. 그래도 공무원 연금 보면서 그냥 견디는 거지 뭐."


  동생은 그렇게 대답했다. 동생에게는 정부 부처의 5급 공무원 친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그 삶도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만난 영화 쪽 사람들의 삶은 대개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무슨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고, 말못할 밥벌이의 괴로움을 다들 떠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가장 안정적인 자리라면 대학의 교수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에는 열정만으로도 자신의 작품을 만들던 이가 교수 자리에 안착하고서는 아무런 작품을 만들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양날의 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안정적인 삶이란 도달하기 힘든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설프게 무언가에 의지하려 한다거나, 한 자리에서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흔들리다'라는 동사를 내 인생의 동사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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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먼저 쓴 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7인의 사무라이(https://blog.aladin.co.kr/sirius7/12058094)'와 연결되는 글이다. 이 글에는 뛰어난 영화 감독이자 배우였던 오손 웰스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에게 무슨 도움이 될 만한 글은 아니며, 그에 얽힌 개인의 후일담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쩌면 이 글을 읽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읽고나면 약간은 슬퍼지고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뒤로 가기 버튼을 살짝 누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강의를 들었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좋은 강의들이 있다. 러시아 영화사 수업도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강의였다. 나는 그때 수업시간에 받았던 프린트 자료들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세 시간 짜리였던 그 수업은 두 시간은 영화를 한편 보고, 나머지 한 시간은 짧은 강의와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강의를 맡은 N선생은 러시아 유학파 출신으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러시아 영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보았던 좋은 영화들이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다. '학은 날아가고(1957)', '병사의 노래(1958)', '나는 쿠바다(1964)', 같은 영화들.


  나는 가장 좋았던 그 수업을 들으면서, 영화를 공부하던 첫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영화와의 결별을 계속 생각했다. 러시아 영화사의 마지막 수업이 있던 12월의 어느 날 저녁, N선생에게 인사를 하면서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선생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쎄, 내 생각은 그래. 하나의 과정을 시작했으면 그걸 끝마치는 게 좋아. 좀 힘들고 괴롭더라도 말이지. 일단 이 공부를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치자면, N선생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 가방 하나 싸들고 영화 공부하겠다고 러시아로 떠났던 그는, 힘들게 공부하면서도 재미있었다고 회고하던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언대로 한 과정을 끝마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그만 두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고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K의 경우도 그러했다. 


  "이 학교 다니면서 매일 매일 울지 않은 날이 없었네요.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학교 계속 다녀야하나 물었어요."

 

  K와는 학과 동기이기는 해도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K가 그렇게 고민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K의 기도는 결국 응답을 받았고, 그 말을 끝으로 1년 동안 다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명문대 출신으로 중등 교사 자격증이 있었던 K가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다. 경계선 밖에서 보는 것과 그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의 차이. 영화의 세계로 들어온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다시 경계선 밖으로 나갈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글 제목 낚시꾼이 되지 않기 위해, 오손 웰스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러시아 영화사와 함께 내가 들은 좋은 강의 가운데에는 미국 영화사도 있었다. 나는 영화사 수업을 참 좋아했다. 영화의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열정과 그 놀라운 순간들의 기록들을 복기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미국 영화사는 매 강의시간마다 과제로 주어지는 영화가 적게는 두세 편, 때로는 네다섯 편까지 되었다. 그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도 지겹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오손 웰스에 대해 무슨 발표 과제를 맡았던 것 같다. 강의를 맡은 평론가 선생이 과제 발표에 포함하라면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건넸다. 미국에서 만든 오손 웰스 다큐였는데, 자막은 없었다. 이 다큐는 오손 웰스가 직접 자신의 영화 인생을 회고하면서, 중요한 영화적 순간들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무자막이기는 해도, 오손 웰스의 영화들은 거의 다 본 것들이어서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오손 웰스는 작은 영사기 앞에서 자신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담담하고도 차분하게 이야기를 끌어갔는데, 다큐의 끝부분에 그가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가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었나를 말하는 부분이었다. 


  "이 망할 놈의 마법 상자가 결국 내 인생을 망쳐놓은 거요."     


  주먹에 든 무언가를 부숴뜨릴 것처럼 꽉 힘을 주며 팔을 흔드는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시울에는 눈물까지 맺힌 것 같았다. '망할 놈의 마법 상자'는 영화를 이르는 말이었다. F***ing magic box. 그 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오손 웰스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나는 다큐내내 드문드문 알아듣던 영어를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아주 명료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동시통역이 이루어지 듯, 그가 토로하는 말의 토씨 하나 하나가 귀에 와서 박혔다.


  "이봐. 자네는 영화가 자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가? 내가 말하는 것이 연기로 보이지는 않겠지. 결국 영화가 나한테 남긴 것은 회한과 고통 뿐이라네."


  오손 웰스는 마치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진심을 읽었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그러나 믿을 수는 없었다. 앎과 믿음은 다른 것이다. '믿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말하는 진실을 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나보다 훨씬 앞서 영화 세계로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시민 케인(1941)'으로 영화사에 위대한 감독으로 남았으며, 뛰어난 성우이기도 했고, 배우, 제작자로서 자신의 일생을 오롯이 영화에 바친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결국 영화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회고했다. 그 다큐는 그의 말년에 제작된 것이었다.


  나는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자퇴서 같은 휴학계를 냈다. 정해진 계획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났으며,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과정을 시작했으면 끝마치는 것이 좋다는 N선생의 조언은 마치 낚싯줄의 납추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 납추는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있었고, 나는 가끔 그것을 보더라도 무시했다. 그것을 다시 건져 올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납추는 썩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들어 올려질 날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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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종일 마음이 시끄러웠다.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생각은 맥없이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무엇이든 현상이 있으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요새 나는 H의 소식을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다. 몇년 전, 신문을 읽다가 H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H가 등단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문에서까지 그 작품 세계와 인생을 인터뷰로 실을 만큼 인정받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H는 글쓰기 수업에서 알게 되었다. 타과 학생으로서 그 글쓰기 수업을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명 뿐이었다. 중견 작가 선생이 맡은 그 수업은 일주일 동안 한편의 글을 써오고, 그것을 수강생들이 합평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학과의 수업방식에 적응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글쓰기 과제는 어렵지 않았으나, 합평 시간은 전쟁터 같았다. 그 학과의 학생들은 서로의 글을 거침없이 비난했고, 그렇게 오가는 합평 속에서 냉소와 조롱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매 수업시간을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헤맸다.


  H의 글은 항상 작가 선생의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 글에서 느껴지는 현학적이고 젠체하는 오만함이 싫었다. 그러나 작가 선생은 H의 글은 조금만 다듬는다면 조만간 등단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하나의 글에 대해서도 저렇게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싫어한 것은 H의 글 뿐만이 아니었다. H를 더 싫어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양한 삶과 지적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서, 나와 그 학과 학생들과의 나이차는 꽤나 컸다. 적게는 네다섯, 많게는 열살 차이까지 났다. 나보다 한참 아래 연배의 H는 합평을 하면서 늘 내 호칭을 '아무개 씨'라고 지칭했다. 그 학과 학생들 가운데 대놓고 나한테 '아무개 씨'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태여 내 글을 언급할 때, 호칭을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H에게 따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H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일로 나는 H를 자기주관이 뚜렷한, 그러나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합평 시간에 나는 H의 유려하지만 현학적이고 공허한 문체를 지적했고, H는 내 글의 감상성을 비꼬고 배격했다. H는 자신의 글에 늘 자신만만했으며, 이미 등단한 작가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가 등단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 선생의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양반도 한가지 잘못 본 것이 있기는 하다. 그 수업을 들었던 S의 등단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S의 글은 진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S의 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조차 꺼려했다. 한마디로, 말할 거리가 못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작가 선생의 평가는 더 신랄했다. S의 글은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했다. 나도 그 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랬기에 나중에 S가 등단했고, 자신의 책을 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도 한 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주목받는 작가로 계속 이어서 내고 있었다. 한국의 문단이 그런 독특함도 수용할 수 있을만큼 새로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글이라도 내놓고 연명할 정도로 퇴보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합평 시간의 S는 자신의 글이 얻어터지는 만큼, 다른 사람의 글도 거리낌없이 두들겨댔다. 그러나 S는 내 글에 대해서는 무딘 날을 들이댔다. 어쩌면 S가 보기에 내 글은 맹물같은 무색무취의 것이어서, 그다지 말할 게 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S에 대해서는 희한하다고 생각했을 뿐, 안좋은 감정은 없었다. 모두에게 맹공격당하는 S와 그 글에 한편으로는 측은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S는 한때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 소식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에 반해 H는 아주 잘 나가고 있다. 나는 신문과 방송에서 H의 글과 그 근황을 어쩔 수 없이 읽고 듣고 있는 판국이다. 오늘도 H의 소식을 듣게 되어 아주 속이 불편하고 시끄러워졌다. 나는 H의 글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글인가를 생각해 본다. 내가 어떤 평가를 하든지 간에, H는 등단했고, 자신의 책을 계속 써내고 있고, 인정받고 있다.


  "어쨌든 나는 계속 글을 썼고, '컬럼비아 스펙테이터'지에 서평과 영화평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기사는 제법 자주 실렸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폴 오스터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을 회고한 책 '빵 굽는 타자기'의 일부분이다. 오늘, 예전에 읽은 그 책을 다시 떠올렸다. H의 소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H와 나는 같은 시합을 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만의 글쓰기 경주를 하고 있고, 중요한 것은 완주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매일 쓰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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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에 대한 글이 아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면 넘칠만큼 많으니, 혹시라도 영화와 관련된 글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쓰는 글은 대체적으로 길고 그다지 재미가 있지도 않다. 오늘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영화에 얽힌 오래전 이야기다.


  '동숭시네마텍'이라고 이제는 문닫은 영화관이 있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을 표방한 그 영화관은 1995년에 문을 열었다. 영화관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나는 그곳을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영화관 입구로 들어가는 그 벽에 붙은 비좁은 계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들어갈 때마다 꽤 불편했었다. 그곳에서 본 영화들 가운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 같은 영화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그 충격이란 좋은 영화를 보고 받은 감성의 충격이 아니라 '영화적 사기'라고 생각해서 받은 충격이었다. 1시간 반 가까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꼬마 아이가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영화. 당시 영화가 끝나고나서, 허망함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나즈막하게 불만을 말하던 관객들의 웅성거림을 나는 들었다. '이게 끝이야?', '무슨 영화가 이래?'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보기는 했어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의 영화들은 예술 영화라는 이름으로 번지르르하게 잘 포장된 거품낀 영화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 장면들이 가끔 떠올랐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언덕길을 열심히 뛰어가는 아이.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 친구가 혼날까봐 대신 숙제를 해갔던 공책을 펼치면 나오는 작은 풀꽃. 그 영화에 담긴 진정성이랄까, 그것들이 오랜 시간을 지나며 마침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상영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을 아직도 추억하는 사람은 많다.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이 흐르던 그 놀랍고 가슴 아픈 풍경 속의 어린 남매를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필름으로 상영된 그 영화를 본 것을 내가 만난 인생의 행운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영화들, 특히 필름으로 된 오래전 좋은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날들은 지나가버렸다.


  생각해 보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던 그 짧은 시기는 영화산업에 대격변이 몰려오기 이전의 폭풍전야같은 고요함, 아니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빛남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미 영화에서는 필름에서 디지털 기반의 산업으로 바뀌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영화에 불어닥치고 있는 그러한 거대한 흐름과는 상관없이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가 주는 모든 것이 무작정 좋았다. 좋은 영화가 있으면 어디든 보러 다녔고, 영화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서 읽었다.


  '동숭시네마텍'이 2000년, '하이퍼텍 나다'로 바뀌고 나서도 나는 그곳을 자주 갔었다. 그곳의 폐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좀 아쉽기는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복합상영관, 즉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쏟아져나오는 관객들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라는 매체, 산업 전반이 재편성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영화는 '예술'의 관점 보다는 '산업'의 시각에서 보아야하는 것이었음에도 나는 영화가 가진 진정성, 더 나아가 구원의 가능성까지 믿었던 순수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는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 가끔, 내 영화 사랑의 시작, 그 근원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어릴적부터 영화는 봐온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내가 명확히 인식하는 그 시작은 대학시절 학교 영화 동아리 시사회에서 본 어떤 영화 한편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편씩,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구해서 보여주던 그 시사회. 조악한 화질은 그냥 감수하고 보는 것이었다. 어느날, 학생회관을 지나다 그 동아리 시사회의 공지를 읽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7인의 사무라이'를 상영합니다. 시간은 저녁 7시 반, 장소는 학생회관 내 소강당입니다."


  나는 그 공지를 읽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소강당의 시설은 그리 좋지 못해서, 나는 그곳에서 개설되는 강좌는 가급적 신청하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삐걱거리는 의자, 좁은 통로, 높은 경사각, 그 모든 것이 다 싫었다. 그날 저녁에 가보니, 영화를 보러온 사람은 서른 명 정도나 되었을까? 보통 낮시간의 시사회 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화면 비율이 맞지 않게 프로젝터로 재생된 영화는 역시나 화질이 좋지 않아서 계속 비내리는 풍경같았다. 나중에 진짜 비내리는 장면에서는 그 안좋은 화질 때문에 마치 폭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영화는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고, 상영시간은 더럽게 길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가면, 집으로 가는 심야 좌석 버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고, 강당에 불이 켜지자 남아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 전철을 부랴부랴 타고 겨우 심야 좌석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나는 버스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제서야 그 영화를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느껴졌다. 그 영화에는 내가 그때까지 보아왔던 영화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딱히 어떻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영화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영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영화라는 세계에 대해 한번 새롭게 살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초대장을 보냅니다. 당신이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 영화가 보내는 초대장의 내용은 그런 것이었다. 초대장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초대장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었다. 당시에 내가 그 영화를 보고 꼭 무슨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면 저 '영화'라는 것을 배워야겠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렇게 내게 기이한 매혹의 영화로 남았다. 그리고 그 영화의 기억 때문에 몇년 후 나는 그 초대장을 열어보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아주 가끔은, 아니 요즘들어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영화 시사회의 공지를 못보았더라면,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그냥 중간에 나왔더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어떤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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