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마음이 시끄러웠다.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생각은 맥없이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무엇이든 현상이 있으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요새 나는 H의 소식을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다. 몇년 전, 신문을 읽다가 H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H가 등단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문에서까지 그 작품 세계와 인생을 인터뷰로 실을 만큼 인정받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H는 글쓰기 수업에서 알게 되었다. 타과 학생으로서 그 글쓰기 수업을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명 뿐이었다. 중견 작가 선생이 맡은 그 수업은 일주일 동안 한편의 글을 써오고, 그것을 수강생들이 합평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학과의 수업방식에 적응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글쓰기 과제는 어렵지 않았으나, 합평 시간은 전쟁터 같았다. 그 학과의 학생들은 서로의 글을 거침없이 비난했고, 그렇게 오가는 합평 속에서 냉소와 조롱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매 수업시간을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헤맸다.
H의 글은 항상 작가 선생의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 글에서 느껴지는 현학적이고 젠체하는 오만함이 싫었다. 그러나 작가 선생은 H의 글은 조금만 다듬는다면 조만간 등단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하나의 글에 대해서도 저렇게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싫어한 것은 H의 글 뿐만이 아니었다. H를 더 싫어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양한 삶과 지적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서, 나와 그 학과 학생들과의 나이차는 꽤나 컸다. 적게는 네다섯, 많게는 열살 차이까지 났다. 나보다 한참 아래 연배의 H는 합평을 하면서 늘 내 호칭을 '아무개 씨'라고 지칭했다. 그 학과 학생들 가운데 대놓고 나한테 '아무개 씨'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태여 내 글을 언급할 때, 호칭을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H에게 따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H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일로 나는 H를 자기주관이 뚜렷한, 그러나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합평 시간에 나는 H의 유려하지만 현학적이고 공허한 문체를 지적했고, H는 내 글의 감상성을 비꼬고 배격했다. H는 자신의 글에 늘 자신만만했으며, 이미 등단한 작가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가 등단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 선생의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양반도 한가지 잘못 본 것이 있기는 하다. 그 수업을 들었던 S의 등단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S의 글은 진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S의 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조차 꺼려했다. 한마디로, 말할 거리가 못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작가 선생의 평가는 더 신랄했다. S의 글은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했다. 나도 그 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랬기에 나중에 S가 등단했고, 자신의 책을 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도 한 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주목받는 작가로 계속 이어서 내고 있었다. 한국의 문단이 그런 독특함도 수용할 수 있을만큼 새로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글이라도 내놓고 연명할 정도로 퇴보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합평 시간의 S는 자신의 글이 얻어터지는 만큼, 다른 사람의 글도 거리낌없이 두들겨댔다. 그러나 S는 내 글에 대해서는 무딘 날을 들이댔다. 어쩌면 S가 보기에 내 글은 맹물같은 무색무취의 것이어서, 그다지 말할 게 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S에 대해서는 희한하다고 생각했을 뿐, 안좋은 감정은 없었다. 모두에게 맹공격당하는 S와 그 글에 한편으로는 측은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S는 한때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 소식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에 반해 H는 아주 잘 나가고 있다. 나는 신문과 방송에서 H의 글과 그 근황을 어쩔 수 없이 읽고 듣고 있는 판국이다. 오늘도 H의 소식을 듣게 되어 아주 속이 불편하고 시끄러워졌다. 나는 H의 글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글인가를 생각해 본다. 내가 어떤 평가를 하든지 간에, H는 등단했고, 자신의 책을 계속 써내고 있고, 인정받고 있다.
"어쨌든 나는 계속 글을 썼고, '컬럼비아 스펙테이터'지에 서평과 영화평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기사는 제법 자주 실렸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폴 오스터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을 회고한 책 '빵 굽는 타자기'의 일부분이다. 오늘, 예전에 읽은 그 책을 다시 떠올렸다. H의 소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H와 나는 같은 시합을 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만의 글쓰기 경주를 하고 있고, 중요한 것은 완주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매일 쓰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