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에 대한 글이 아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면 넘칠만큼 많으니, 혹시라도 영화와 관련된 글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쓰는 글은 대체적으로 길고 그다지 재미가 있지도 않다. 오늘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영화에 얽힌 오래전 이야기다.


  '동숭시네마텍'이라고 이제는 문닫은 영화관이 있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을 표방한 그 영화관은 1995년에 문을 열었다. 영화관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나는 그곳을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영화관 입구로 들어가는 그 벽에 붙은 비좁은 계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들어갈 때마다 꽤 불편했었다. 그곳에서 본 영화들 가운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 같은 영화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그 충격이란 좋은 영화를 보고 받은 감성의 충격이 아니라 '영화적 사기'라고 생각해서 받은 충격이었다. 1시간 반 가까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꼬마 아이가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영화. 당시 영화가 끝나고나서, 허망함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나즈막하게 불만을 말하던 관객들의 웅성거림을 나는 들었다. '이게 끝이야?', '무슨 영화가 이래?'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보기는 했어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의 영화들은 예술 영화라는 이름으로 번지르르하게 잘 포장된 거품낀 영화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 장면들이 가끔 떠올랐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언덕길을 열심히 뛰어가는 아이.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 친구가 혼날까봐 대신 숙제를 해갔던 공책을 펼치면 나오는 작은 풀꽃. 그 영화에 담긴 진정성이랄까, 그것들이 오랜 시간을 지나며 마침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상영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을 아직도 추억하는 사람은 많다.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이 흐르던 그 놀랍고 가슴 아픈 풍경 속의 어린 남매를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필름으로 상영된 그 영화를 본 것을 내가 만난 인생의 행운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영화들, 특히 필름으로 된 오래전 좋은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날들은 지나가버렸다.


  생각해 보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던 그 짧은 시기는 영화산업에 대격변이 몰려오기 이전의 폭풍전야같은 고요함, 아니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빛남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미 영화에서는 필름에서 디지털 기반의 산업으로 바뀌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영화에 불어닥치고 있는 그러한 거대한 흐름과는 상관없이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가 주는 모든 것이 무작정 좋았다. 좋은 영화가 있으면 어디든 보러 다녔고, 영화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서 읽었다.


  '동숭시네마텍'이 2000년, '하이퍼텍 나다'로 바뀌고 나서도 나는 그곳을 자주 갔었다. 그곳의 폐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좀 아쉽기는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복합상영관, 즉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쏟아져나오는 관객들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라는 매체, 산업 전반이 재편성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영화는 '예술'의 관점 보다는 '산업'의 시각에서 보아야하는 것이었음에도 나는 영화가 가진 진정성, 더 나아가 구원의 가능성까지 믿었던 순수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는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 가끔, 내 영화 사랑의 시작, 그 근원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어릴적부터 영화는 봐온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내가 명확히 인식하는 그 시작은 대학시절 학교 영화 동아리 시사회에서 본 어떤 영화 한편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편씩,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구해서 보여주던 그 시사회. 조악한 화질은 그냥 감수하고 보는 것이었다. 어느날, 학생회관을 지나다 그 동아리 시사회의 공지를 읽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7인의 사무라이'를 상영합니다. 시간은 저녁 7시 반, 장소는 학생회관 내 소강당입니다."


  나는 그 공지를 읽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소강당의 시설은 그리 좋지 못해서, 나는 그곳에서 개설되는 강좌는 가급적 신청하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삐걱거리는 의자, 좁은 통로, 높은 경사각, 그 모든 것이 다 싫었다. 그날 저녁에 가보니, 영화를 보러온 사람은 서른 명 정도나 되었을까? 보통 낮시간의 시사회 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화면 비율이 맞지 않게 프로젝터로 재생된 영화는 역시나 화질이 좋지 않아서 계속 비내리는 풍경같았다. 나중에 진짜 비내리는 장면에서는 그 안좋은 화질 때문에 마치 폭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영화는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고, 상영시간은 더럽게 길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가면, 집으로 가는 심야 좌석 버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고, 강당에 불이 켜지자 남아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 전철을 부랴부랴 타고 겨우 심야 좌석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나는 버스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제서야 그 영화를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느껴졌다. 그 영화에는 내가 그때까지 보아왔던 영화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딱히 어떻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영화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영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영화라는 세계에 대해 한번 새롭게 살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초대장을 보냅니다. 당신이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 영화가 보내는 초대장의 내용은 그런 것이었다. 초대장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초대장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었다. 당시에 내가 그 영화를 보고 꼭 무슨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면 저 '영화'라는 것을 배워야겠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렇게 내게 기이한 매혹의 영화로 남았다. 그리고 그 영화의 기억 때문에 몇년 후 나는 그 초대장을 열어보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아주 가끔은, 아니 요즘들어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영화 시사회의 공지를 못보았더라면,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그냥 중간에 나왔더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어떤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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