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학교에서 들었던 교양 수업 가운데 '영화의 이해'라는 수업이 있었다. 꽤 많은 학생들이 듣는 대강의 수업이었다. 어느날, 강의 끝무렵에 한 학생의 질문이 있었다.


  "교수님에게 '내 인생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야, 그런 질문 좀 하지 말아. 난 그 질문이 제일 웃기고 한심한 것 같더라. 자신이 보는 영화가 다 자기 인생의 영화가 되는 거지, 무슨 그런 걸 꼽아 보고 있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교수는 나가버렸다.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내 인생의 영화. 그건, MBC 라디오에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FM 영화 음악'의 아주 유명한 코너였다. 매주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내 인생의 영화' 5편에 얽힌 사연을 선정해서 들려주는 그 코너는, 영화팬들에게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코너일 것이다. 늦은 새벽에 나오는 그 방송을 매일 청취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코너가 나오는 요일에는 꼭 챙겨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코너에 흐르던 음악,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1993)'에서 나왔던 그 음악도 참 좋았다. 음악 때문에 앤디 가르시아와 맥 라이언이 주연했던 영화까지 찾아서 보았었다.


  아마 그 코너 사연에 선정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지 않았을까? 당시에 그 프로의 인기가 대단하기도 했고, 막상 선정된 영화들 이야기 듣다 보면 대개는 작가주의 예술영화 제목들이 줄줄이 나오기도 해서 때로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영화를 언급한 정도로는 선정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쨌든 유명인이 아닌, 영화를 사랑하는 일반 청취자들의 인생 영화들 이야기에는 뭔가 마음을 울리는 지점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내 사연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 5편에 무얼 넣어야할까 하는 생각은 많이 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의 그 마지막 방송을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정은임 아나운서의 '내 인생의 영화'도 그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마지막 방송은 좀 많이 가라앉았었고, 방송이 끝나자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많은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여러모로 나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이제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았을까? 가장 많이 보았던 시절은 영화 공부할 때였는데, 1년에 대략 사백편에서 오백편, 그 보다 더 많이 보았을 것 같기도 하다. 공부를 잠시 쉬었을 때도 영화는 계속 보았으니까 학교 다닌 기간에만 대략 삼천편 가까이 될 것 같다. 누구는 1만편을 보았고, 누구는 2만편을 보았다는 소리도 들어서, 내가 본 것은 영화를 많이 본 축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냥 평균 수준 같았다. 나는 영화가 너무 좋아서, 죽을 때까지 내가 볼 수 있는 영화가 과연 몇편이나 될까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좋은 영화란 영화는 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보았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2009)' 이후로 영화와는 거의 멀어졌다. 뭐랄까, 그 영화는 내 영화 사랑의 종언 같은 영화였다. 3D영화라니, 그런 영화는 내가 알고 있었던 이전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영화와 그 산업 전반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그 이후로 나오는 어떤 영화를 보아도 시들했다. 마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 영화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영화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영화의 제목을 적어두었다가 꼭 찾아서 보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케이블 영화 채널을 돌리다가 어쩌다 보게 되는 영화들도 별로 없다. 최근작들 위주로 나오는 그런 채널 보다는 국회방송(NATV) 명화극장에서 보여주는 1970, 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 국민방송(KTV)에서 보여주는 예전의 오래된 한국 흑백 영화 같은 것을 본다.


  내가 상업영화 감독이라며 그냥 외면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도 그렇게 보았다. 그걸 보면서 내 영화를 보는 눈의 편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혹평을 받았던 그의 '우주전쟁(2005)'도 내게는 남다르게 보였다. 미디어에 대한 스필버그의 통찰도 괜찮았고, 특히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전 보았던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수색자(1956)'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울컥하기까지 했다.


  가끔 해외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보고 나면, '아니 고작 저 이야기를 하자고 영화를 저렇게 끌고 간 거야?' 하면서 허탈할 때가 있다. 이야기의 깊이는 얕아졌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들은 한없이 미시적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대가 바뀌었으니 영화도 그에 맞게 바뀌어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내게는 그 영화들이 고전 영화들의 끝없는, 그다지 의미없는 변주같다. 마치 필립 글래스(Philip M. Glass)의 음악을 듣는 느낌이다.

 

  오늘 문득 이문세의 오래된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을 떠올려 보았다. 영화에 대해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은 추억으로만 남은 것 같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지나간 사랑을 되돌리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내 인생의 영화'의 맨 마지막 편은 아직 쓰지 않고 남겨두었다. 미련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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