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


-또 그 꿈이네.

  미주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잠에서 깼다. 목이 말랐다. 식탁에서 물을 마시며 시계를 보니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9월, 이제 낮은 점점 더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 것이다. 동이 트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잠깐 생각했다.

 뭔가 풀리지 않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늘 그 꿈을 꿨다. 화장실 꿈이었다. 꿈속에서 미주는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미주가 찾아다니는 화장실은 죄다 더럽고 막혀있었다. 방금 전의 꿈은 최악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대략 백 개 정도나 되는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닫기를 반복했다. 그 어디에도 깨끗한 화장실은 없었다.

-모든 게 다 걔 때문이야.

  미주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미주의 화장실 꿈은 나름의 역사가 있었다. 이것은 무려 30년 넘게 이어진 꿈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미주의 재수 시절부터였다. 의대 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부모님은 미주를 재수 학원에 밀어넣었다. 시 외곽에 있는 기숙 학원이었다. 재수 학원 근방에는 논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마치 외계 행성의 감옥처럼 보였다.

  미주는 학원 입학 시에 시험을 치룬 후, 특수반 A에 편성되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있는 반이었다. 그 아이는 일반반의 학생이었다. 155 정도의 키에, 약간 퉁퉁한 체격의 여자애는 빡빡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수반과 일반반 학생들은 서로 대화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기숙사의 방과 학급 배치, 식당의 동선도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미주가 그 빡빡머리의 여자애를 본 것은 단 한 번으로 그쳤다. 그리고 그것은 30년이 지나도록 미주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았다.

  4월, 2번째 모의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학원이 소란스러웠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1층 출입구에 보였다.

-죽으려면, 지네 집에나 가서 죽을 것이지. 재수 없게.

  1교시의 국어 선생이 찌그러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걔 맞지? 그 머리 다 밀어버린.

  미주는 뒷자리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6층 화장실에서 사고가 있었다. 그 빡빡머리 여자애가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미주가 화장실 꿈을 꾸게 된 것은. 빡빡머리의 여자애는 미주에게 화장실의 악령 같았다. 그렇다고 미주의 꿈에서 그 여자애가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그럼에도 미주에게는 그 여자애는 화장실과 단단히 결합된 불길함 그 자체였다. 미주는 화장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 여자애를 떠올리게 되었다.

-꼭 그렇게 죽었어야만 했을까...

  미주는 화장실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미주가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였고, 심연이기도 했다. 더러운 화장실의 문을 닫듯, 매번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미주의 화장실 꿈에는 어떤 죽음이 그렇게 또아리를 틀고 오래도록 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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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안녕하세요.
-아, 안녕. 12층 살지? 하도 인사를 예쁘게 해서 아줌마가 기억하고 있었어. 학교 갔다 오는 길이니?
-네.

 아이는 내 물음에 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정도나 되었을까? 이 꼬마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꼭 챙겼다. 볼 때마다 가정교육을 참 잘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근데 표정이 좀 시무룩해 보이네.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 그런 거야?
-네.

 나는 아이가 오늘 학교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와 가까운 이웃도 아니고, 거기에서 더 뭔가를 물어보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아이는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오늘 부반장 선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떨어졌어요.
-저런.

 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내,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어야 할까? 그건 뭔가 무성의한 위로처럼 여겨졌다.

-다음번에 또 도전해 보면 네가 되지 않을까?
-저 오늘, 3표를 얻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입술 가장자리를 꾹 깨물었다. 말끝이 떨리는 것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말투였다.

-3표도 많은걸. 아줌마도 학교 다닐 때 반장 선거 나갔었는데, 1표 얻었어.
-거짓말.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자그맣게 말했다.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이가 그 거짓말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이가 보여주는 솔직함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거짓말 맞아. 아줌마는 네가 기운을 좀 냈으면 싶어서 그랬어.
-네.

 아이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도대체 엘리베이터는 왜 내려오지 않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

-너무 챙피했어요. 속상해서 눈물이 나오는데, 짝이 내 눈물을 보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지우개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지우개를 천천히 주웠겠구나.
 
 아이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층, 17층... 이 아이는 집에 가서 나에게 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꼭 끌어안아 줄 터였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그만두었다.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에도 거리를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늘 편했다. 계기판이 1층을 가리키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12층에서 아이와 작별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아이는 자신이 좀 슬픈 오늘 같은 날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챙겼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낮 동안 나는 동생들과 3군데의 납골당을 돌아다녔다. 요양병원의 의사는 낙상 사고를 당한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차로 3시간이 넘게 시 외곽을 돌았다. 피로감과 함께 허기가 몰려왔다.

-뭐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열자 지난 주말에 마트에서 세일할 때 사둔 무화과가 보였다. 나는 무화과가 든 밀폐용기를 꺼내어 식탁으로 가져갔다. 뚜껑을 열고 말랑해진 무화과를 골라내었다.

-이거하고, 이게 좋겠네.

 무화과 2개를 한꺼번에 꺼내려다 하나가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무화과는 둔탁하게 두어 번 구르더니 곧 멈췄다. 나는 무릎을 굽혀서 바닥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웠다. 문득, 12층 아이의 지우개가 보였다. 나는 아이가 지우개를 들고 얼마만큼 기다렸을까를 생각했다. 몽글몽글한 무화과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내 손안에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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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


-어서 오세요. 아니, 이게 누구야? 웬일로 여길?
-너 일 잘하나 감시하려고.

 민우는 진호가 눙치며 답하는 것을 보고는 웃었다. 자정이 좀 넘은 시각이었다.

-커피 줄까? 내가 살게.
-야, 그만둬. 내가 알바생 커피 한잔 사줄 돈은 있다고.

 진호는 냉장고에서 캔 커피 2개를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창가 옆의 간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놓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까지 회사에서 일한 거야?
-응. 국제 도서전 행사가 있어. 그거 준비하느라.
-인턴이라 그냥 마구 굴리는 모양이군.
-그런 셈이지. 공인된 회사 노비 같은 느낌.

 민우는 살짝 졸음이 오려던 참에 이렇게 찾아온 진호가 반갑고 고마웠다.

-복학은 언제 할 거야?
-글쎄. 좀 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학비는 학자금 대출 땡겨. 졸업을 빨리해서 취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취직이라...
 
 민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 그럼 글을 계속 쓸 생각이냐?
-글은 써야지. 어쨌든
-그렇다면 더더욱 학교로 돌아와야지. 등단을 빨리 하는 게 상책이야. 문창과 좋은 게 뭐냐. 등단 제조기 아니냐. 애들하고 부대끼면 뭐라도 써내게 되잖아.
-그야 그렇지. 넌 등단했으니까 좋겠다. 나도 지방신문이나 독립 문예지 어떻게 파볼까?
-야, 그런 거면 관둬. 지방신문 등단은 내놓은 자식 취급이야. 너도 잘 알잖아. 이건 골품제보다 더해. 성골 진골 나누듯 메이저 마이너 선 긋고, 마이너는 대놓고 무시하는 거. 할려면 한 방에 메이저로 가라고.
-그게 쉬운 것도 아니고...

  진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넌 그게 문제야.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복학을 또 늦추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금 우리 동기 가운데 학교에 남은 사람 수진이 뿐이야. 걔는 부모 돈으로 놀러 다니느라 그런 거고. 다들 진작에 졸업해서 어떻게든 그냥 비비고 사는데.
-그건 그래.

  민우는 진호가 후벼파내는 자신의 현실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넌 글을 안 쓸 생각이야?
-확실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지. 회사 적응하는 게 최선이야. 출판 시장 돌아가는 거 보면서 어떤 글 쓸지 생각하려고. 목표가 생겼어. 내가 보니까 출판사 편집장이 괜찮아 보여. 적당히 좋은 권력이라고나 할까. 여기 들어왔으니 한번 해볼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진호는 민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이 민우를 좀 몰아붙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손님 없을 때, 신간이라도 좀 읽으라고 챙겨왔어. 요새는 이런 감성 충만한 글이 먹혀. 낯 간지럽기 짝이 없지. 너도 유행을 따라가봐.
 
  진호는 서류 가방에서 책을 주섬주섬 꺼냈다. 책을 민우에게 건네주고는,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간다. 얼굴 좀 펴고. 난 자식도 없는데, 이상하게 네가 자식 같다. 그것도 아픈 자식. 걱정이 되.

  민우는 진호가 나간 편의점 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졸음은 진작에 달아나 버렸다. 편의점의 닫힌 문은 감옥의 창살처럼 보였다. 이번 달 월급은 부모님의 통장으로 가버렸다. 아버지의 항암 치료는 17차로 접어들었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민우는 눈꺼풀을 세게 비비며 쓸어내렸다. 회색의 더러운 비늘이 나방처럼 포스기 위를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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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의 키티짱


-어서 오세요.

-늘 사는 거. 알지?

-에쎄 멘솔, 레쓰비 마일드 캔, 하나씩. 이렇게 드리면 될까요?

-아냐, 잠깐만.

  남자는 편의점 안을 잠깐 둘러보더니, 고양이 간식 캔 하나를 들고 왔다.

-학생, 이것도. 그런데 오늘은 키티짱 안 보이네. 이때쯤이면 문 앞에서 졸고 있던데.

-사장님이 싫어하세요. 매장 위생 문제도 있고. 보면 내쫓으라고 당부하는 걸요.

-그렇군. 고양이가 좀 골치 아플 때도 있어.

  포스기에서 띡, 띡, 띡, 세 번의 기계음이 들렸다. 알바생이 남자에게 카드를 건넸다. 남자는 후줄근한 조끼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는, 캔커피를 뜯었다.

-이건 키티짱 오면 주라구.

-다음에 직접 주시면 키티짱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못 줄 거 같아. 내일 이사가.

-아, 그러시군요.

  알바생은 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자동에 쪽방촌이 있어. 거기로. 여기 고시원 살기는 괜찮았는데.

-거기 월세는 더 싼가요?

-아니, 더 비싸. 34만 원. 고시원보다 4만 원이나 더. 시설도 엉망이고. 취사실 옆에 바로 화장실이 있어. 문짝도 없고.

  알바생은 남자가 이사를 하게 되는 사연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더 물어보는 일은 꺼려졌다. 손님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편했다.

-일주일 전에 고시원 총무가 와서 나가달라는 거야. 항의가 들어왔다고. 알았다고만 했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다 마신 캔커피를 찌그러뜨렸다. 

-가봐야겠군. 키티짱 보이면 그거 줘.

-건강하세요, 형. 그런데 형이라고 불러도 되요? 누나라고 불러야 할지.

  알바의 마지막 인사에 남자의 구겨진 얼굴이 살짝 펴졌다.

-좋을 대로.

  남자의 샛노랗게 물든 땋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마스카라가 번진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거렸다.

-학생도 꼭 성공해.

  남자가 가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야옹,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알바생은 고양이 간식을 들고서 일어났다.

-키티짱, 왔구나. 자, 이거.

  고양이는 알바생이 뜯은 캔을 사부작사부작 조금 파먹더니,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알바생은 졸음을 내어쫓기 위해 기지개를 크게 켜보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라디오를 켰다. 이런 밤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덜 무섭게 느껴졌다. 뚜뚜뚜 뚜. 새벽 1시를 알리는 시보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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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표정


-아, 차라리 그냥 빨리 죽어버리면 좋겠어.

-아픈지 얼마나 되었는데?

-1년.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가.

-근데, 고향은 어느 나라?

-베트남.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엄마, 여기 커피. 누구야?

-남편이 여기 입원했대. 암이라고.

-여자가 못됬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자기도 살길을 찾아야 하니 그렇겠지. 늙은 남편한테 뭔 정이 얼마나 있겠냐. 애도 없다는데.

-남편이 몇 살인데?

-오십. 여자는 스물여덟. 자식이 있으면 좀 다르겠지. 자식이란 게 버팀목 같은 거야. 작은 버팀목. 그런 거라도 있으면 어찌어찌 살아가지. 그런데 그런 게 없잖아, 저 여자는. 그러니 남편이 죽어가도 데면데면한 거지.

-그래도 남들 앞에서 남편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난 무섭다. 무서워.

-내가 다시 볼 사람 아니니까 그렇겠지.

-부부란 게 정말 남남이네. 어쩌면 생판 남보다도 못한 거 같아.

-사람은 이기적이야. 결국은 다 자기 살 궁리를 하게 마련이니까.

  그날 오후에 베트남 여자의 남편이 임종실로 이동했다. 너무 말라서 뼈가 드러난 남자의 가느다란 팔이 그네처럼 흔들거렸다. 베트남 여자는 이불과 기저귀 가방을 들고서 호스피스 병실 앞에 서 있었다. 돌에게도 표정이 있다면 저 여자의 얼굴일 것이다. 검정 고무줄로 묶은 여자의 짧은 머리가 천천히 흔들거리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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