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안녕하세요.
-아, 안녕. 12층 살지? 하도 인사를 예쁘게 해서 아줌마가 기억하고 있었어. 학교 갔다 오는 길이니?
-네.

 아이는 내 물음에 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정도나 되었을까? 이 꼬마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꼭 챙겼다. 볼 때마다 가정교육을 참 잘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근데 표정이 좀 시무룩해 보이네.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 그런 거야?
-네.

 나는 아이가 오늘 학교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와 가까운 이웃도 아니고, 거기에서 더 뭔가를 물어보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아이는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오늘 부반장 선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떨어졌어요.
-저런.

 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내,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어야 할까? 그건 뭔가 무성의한 위로처럼 여겨졌다.

-다음번에 또 도전해 보면 네가 되지 않을까?
-저 오늘, 3표를 얻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입술 가장자리를 꾹 깨물었다. 말끝이 떨리는 것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말투였다.

-3표도 많은걸. 아줌마도 학교 다닐 때 반장 선거 나갔었는데, 1표 얻었어.
-거짓말.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자그맣게 말했다.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이가 그 거짓말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이가 보여주는 솔직함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거짓말 맞아. 아줌마는 네가 기운을 좀 냈으면 싶어서 그랬어.
-네.

 아이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도대체 엘리베이터는 왜 내려오지 않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

-너무 챙피했어요. 속상해서 눈물이 나오는데, 짝이 내 눈물을 보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지우개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지우개를 천천히 주웠겠구나.
 
 아이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층, 17층... 이 아이는 집에 가서 나에게 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꼭 끌어안아 줄 터였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그만두었다.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에도 거리를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늘 편했다. 계기판이 1층을 가리키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12층에서 아이와 작별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아이는 자신이 좀 슬픈 오늘 같은 날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챙겼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낮 동안 나는 동생들과 3군데의 납골당을 돌아다녔다. 요양병원의 의사는 낙상 사고를 당한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차로 3시간이 넘게 시 외곽을 돌았다. 피로감과 함께 허기가 몰려왔다.

-뭐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열자 지난 주말에 마트에서 세일할 때 사둔 무화과가 보였다. 나는 무화과가 든 밀폐용기를 꺼내어 식탁으로 가져갔다. 뚜껑을 열고 말랑해진 무화과를 골라내었다.

-이거하고, 이게 좋겠네.

 무화과 2개를 한꺼번에 꺼내려다 하나가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무화과는 둔탁하게 두어 번 구르더니 곧 멈췄다. 나는 무릎을 굽혀서 바닥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웠다. 문득, 12층 아이의 지우개가 보였다. 나는 아이가 지우개를 들고 얼마만큼 기다렸을까를 생각했다. 몽글몽글한 무화과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내 손안에 그렇게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