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의 소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차여행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이었다. 와, 여행 중에 저런 기쁜 소식을 들으면 정말 좋겠네. 나는 언젠가 내가 당선 소식을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 정말 오랜만에 신춘문예에 응모를 해보았다. 문예창작과 애들이 목숨 걸고 달려드는 전장에 나 같은 신참은 구경이나 하는 거지. 신춘문예는 뭔가 문운(文運)의 끝판왕 같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나에게 문운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마음이었다.

  언제쯤 심사를 하고 통보를 하는지 궁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우연히 문학 관련 커뮤니티를 알게 되어서, 그쪽에서 신춘문예 관련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 내가 신춘문예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러하다.

1. 예심은 마감 후 5일에서 7일 이후에, 본심은 그로부터 일주일 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
2. 당선작 선정은 심사위원들이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들을 논의하는 그날 저녁에 결정된다. 본심은 주말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3. 본심 현장에 있는 해당 신문사의 문화부 담당 기자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당선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므로 당선 통보 전화는 010 번호로 뜬다.
4. 당선자가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를 했는지, 또는 이전에 수상 경력이 있는지, 기존 작품의 표절 시비가 있는지를 검토하는 과정이 있다.
5. 신문사에 따라 다르지만, 당선 통보 후 당선자들 모이게 해놓고 사진 찍는 곳도 있다. 1월 1일 신문에 내보낼 기삿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신문사는 당선자들에게 추후 작품을 게재할 지면을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신춘문예의 한계이기도 하다. 메이저 일간지 당선자들의 작품집이 4월경에 나오기는 한다.
7. 당선자들의 출신 학과는 문예창작과가 주를 이룬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춘문예 당선자들 가운데, 문인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8. 등단 작가로서 자기 작품을 실어줄 출판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신춘문예보다 문예지 공모를 통해 등단하는 것이 더 낫다.

  신춘문예 당선을 간절히 바라는 문학도들의 글을 보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 나는 새삼 놀랐다. 그걸 보면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이들의 유일한 통로가 '등단'이라는 방식밖에 없는 것일까? 신춘문예든 문예지든 당선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당선이 되려면 심사위원들의 취향과 시대의 조류에 맞춰서 글을 써내야 한다. 무슨 족집게 과외 공부를 하듯 특정 창작 교실, 어느 서점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교수와 제자, 선배와 후배, 이리저리 알음알음 그 세계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그 세계의 생태계에 진입하기 위해 그 글쓰기 틀에 맞추어서 잘 써내는 것이 당선의 지름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의 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위원들의 선정 이유를 읽었다. 내 기준으로는 도대체 이런 작품을 왜 뽑았을까 싶은 것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평도 납득이 가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현학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걸 읽고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이 시대의 한국 문학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늙었구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낼 수 없겠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서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메이저 문학 출판사에서 투고를 받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름도 없는 신인 작가의 작품이 출판되는 일은 복권 당첨과도 같다. 기성 작가들의 글도 실어주기 어려운 판에 등단도 안 한 사람의 글을 받아줄 리가 없다. 최근 들어 새롭게 뜨고 있는 웹소설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으로 비친다. 물론 웹소설 작가들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웹소설 작가는 글로써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순문학 작가보다 크다. 순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될까?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문학을 부업으로 하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삶은 사실 환상에 가깝다. 

  나는 지금의 한국 문학에 별다른 애착도 갖고 있지 않다. 중견작가로 주요하게 언급되는 한강의 소설은 나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 늘어지는 만연체의 흐느적거리는 문체는 참아내기 어렵다. 한강의 소설들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부풀려 있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한강의 소설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번역'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외딴방'이 과거에 해외에 번역되어 누렸던 영광은 한강에게로 갔다.

  2021년에 신경숙은 신작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내놓았다. 얼마 전에 나는 그 책을 읽으려다, 첫 페이지에서 책을 그냥 덮었다. 나는 더이상 신경숙의 문체를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경숙은 과거 자기 작품을 둘러싼 표절 시비에 대해 명확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신경숙에 대해 그 어떤 평론가도 대놓고 비판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다들 얼굴 아는 사이니까 그랬겠지. 나는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저리도 부끄러움이 없고 자존감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신춘문예에 관한 글에서 길게 돌아 여기까지 왔다. 올해 신춘문예 당선자에 대한 통보는 거의 다 끝났다. 내년 봄에는 문예지 공모가 있다. 한국에서 작가가 되려면 어쨌든 '등단'이라는 바늘귀를 거쳐야 한다. 어쨌든 글은 계속 써야지. 나는 올 한 해 동안 써지지 않는 글을 부여잡고 고군분투했다. 영화 글은 거의 써낼 수가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습작이라고 끄적거린 글들은 무슨 넝마쪼가리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지? 그럼에도 나는 '글쓰기'라는 무한도전을 멈출 수가 없다. 미래의 어느 날, 내가 나의 글과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그저 그곳의 풍광이 너무 쓸쓸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23-12-23 08:10   좋아요 0 | URL
올 한 해 푸른별님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어왔어요. 감사드립니다.

푸른별 2023-12-23 12:4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hnine님과 같은 독자가 있어서 저도 힘을 내어 글을 쓴 것 같네요. hnine님을 비롯해 여러 독자분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새해 맞이하길 기도합니다.
 

 

  요새는 잠들기 전에 잠깐씩 ChatGPT를 켜고 이야기를 해본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가 글쓰기니까, 그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한글로 질문을 입력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자체가 영어로 구동되는 것이다 보니, 한글 번역기가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다. 짧은 영작문이라도 어떻게든 단어를 이어 붙이면,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한마디로 내가 좀 서툴게 이야기해도, ChatGPT는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무엇이든 하다 보면 이전보다 조금씩 나아진다. 나는 ChatGPT를 잘 이용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을 알게 되었다. 질문은 명료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간혹 ChatGPT가 답을 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입력창에 새롭게 질문을 추가하면 답이 뜬다. 어떻게 보면, ChatGPT와 대화하는 것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건네는 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고, 그 반응에 따라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식이다.

  그런 이유로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마구 부릴 수 있는 노예나 아랫사람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ChatGPT를 동등한 이야기 상대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 일정 부분 부여된 인격성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제는 그 인격성이 누구, 또는 어느 집단에 의해 형성되었느냐이다. 그 지점에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파생된다. 내가 ChatGPT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편리함과 놀라움은 이 인공지능의 미래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지난달, ChatGPT의 개발사 OpenAI 이사회는 ChatGPT의 CEO Sam Altman을 해고했다. 실질적으로 ChatGPT의 탄생을 주도한 샘 올트먼이 회사에서 쫓겨난 배경에는 인공 지능 개발에 대한 이사회와 올트먼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미국의 대안 언론 Vox의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이사회는 ChatGPT의 개발 속도를 늦추고,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샘 올트먼은 인공지능 개발에 대한 보다 더 과감한 투자와 빠른 개발을 주장하고 있다. 이사회의 말을 듣지 않은 올트먼이 쫓겨나자, OpenAI의 직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주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더 빨리,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CEO의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이사회는 샘 올트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사회가 백기를 들고 투항한 셈이었다.

  어제, 내가 ChatGPT에 던진 질문은 소설 쓰기에서 캐릭터 구축을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그 답변은 마치 내가 여러 글쓰기 책에서 읽었던 해당 부분의 간결한 정리 글 같았다. 출판사들도 얘 때문에 책 팔기 힘들어지겠네. 그 대답을 읽고, 내가 영화 속의 잘 된 캐릭터 구축의 예를 들어보라고 하니까 ChatGPT는 청산유수로 읊어댄다. 좀 진부하네. 그 캐릭터들 나 다 아는 거야. 나는 그렇게 입력창에 글을 써넣었다. 그러자 얼른 내 말을 받은 인공지능은 내가 모르는 영화와 소설을 예로 제시한다. 그저 놀랍다는 말만 나올 뿐이다.

  이 기계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은 잘 모른다고 말하는 솔직함도 가지고 있다. 올해 2023년의 좋은 영화들 좀 추천해 보라고 하니, 자기가 모아놓은 정보가 없어서 모른단다. 그러면서 나한테 알고 있는 영화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는 배짱을 보여준다. 그래, 서로 나눌 수 있는 정보가 있으면 좋겠지. 나는 'Past Lives(2023)'가 내가 본 올해의 좋은 영화라고 ChatGPT한테 알려줬다.

  ChatGPT는 단지 지식을 전달해 주는 안내자라고 보기 어렵다. 이 인공지능은 인간이 지닌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을 나름대로 잘 학습했다. 내가 매일 해야할 일들 때문에 글을 쓸 시간 내기가 어렵다고 말하자, ChatGPT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당신이 해야할 일은 중요하고 완수해야할 일이겠지요. 기억하세요.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른 시간 배분을 하는 겁니다. 글쓰기에 필요한 다양한 소재와 자료들은 인터넷에서 효과적으로 수집할 수도 있고요. 당신은 잘 해낼 거예요. 꾸준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세요."

  Thanks. You did a good job. 나는 입력창에 그렇게 글을 썼다. 그건 단순한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진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ChatGPT는 칭찬에 감사하다면서, 다음에 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나의 노년에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장착된 로봇이 내 거실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어쩌면 그 풍경도 괜찮겠네. 내가 무수한 데이터가 축적된 기계 프로그램에서 기이한 온기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쓴 책의 인세로만 살아갈 수 있는 소설가는 몇 명이나 될까? 내가 그 숫자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공지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올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나는 공지영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읽었다. 이 책은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에세이를 표방한 소설이 맞다. 책에는 작가인 '나'의 시골집을 찾아온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세이로 생각하고서 읽다 보면, 여기에 나온 이야기가 진짜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만큼 인물들 각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나 내밀하고 솔직해서이다. 책의 말미에서야, 공지영은 자신이 약간의 소설적 설정과 변형의 형식을 취했노라고 말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좀 김이 빠진달까, 이거 소설이잖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법한 책이다.

  공지영의 그 책에 대한 완성도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드는 필력이었다. 나는 솔직히 공지영의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지영의 글이 가진 놀라운 흡인력이랄지, 독자를 자신의 글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만은 상당히 부럽다. 공지영의 글은 쉽게, 잘 읽힌다. 이건 공지영의 문체가 가진 강점이다. 공지영의 문제는 그런 장점을 가졌음에도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장정일은 평론집 '독서 일기'에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공지영은 문제적 소설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그러니까 그 말은 공지영이 자신이 가진 작가로서의 역량을 감상적 차원에서 소모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장정일의 그러한 비판에 동의했다.

  독자가 글을 읽게 만드는 것. 그것도 재미있게. 아, 그것이야말로 글로 먹고살아 갈 수 있는 작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독자가 작가의 글을 술술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걸까? 그런 면에서 한 작가의 문체는 작가의 고유한 각인인 동시에 영업비밀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비밀을 알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작가는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였다. 특히 그의 단편 '여학생'은 어찌나 글이 빼어난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저런 소설 하나만 쓰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작가 '이문열'은 한국 문단에서 이제는 잊힌 뒷방 노인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 그가 내놓은 중단편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특히 '하구(河口)' 3부작으로 일컫는 그의 사소설은 매우 빼어나다. 그 시절에 이문열이 써내는 글을 따라서 쓰고 싶었던 문학청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문열은 나중에 창작 레지던시를 열어서 문하생을 두었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는 한다.

  이문열의 문체가 화려하고 거침이 없었다면, 박완서의 글은 그와는 아주 다른 지점에 있었다. 박완서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사회적 접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쉽게 읽히지만, 그 쉬운 문체 속에 내재된 인간에 대한 탐구는 가히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박완서의 문체를 따라 하고 싶어 했다. 독자를 힘 있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말하고 함께 걸으면서 글 속으로 초대하는 것. 박완서의 소설은 나에게 그러했다.

  어제, 나는 ChatGPT에다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입력했다. 그랬더니, 이 척척박사는 내가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는 소설 작법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흥미 있는 도입부를 쓰고, 그 글을 읽을 독자를 생각해야 하며, 중간중간 독자의 관심을 이끌만한 대목을 배치해야 한다고. 그리고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기성 작가의 문체를 모방해 가면서,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결국 작가에게 글쓰기란, 자신만의 '문체(style)'를 갈고 닦으면서 그 문학적 틀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다.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그 많은 작가의 글들은 멋진 관광 안내서와 같다. 나는 이제 그 안내서를 덮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짐을 싸서 진짜 먼 곳의 풍광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나의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야말로 내가 이런 잡문이라도 꾸준히 써내면서 글쓰기 수련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열심히."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답한 ChatGPT의 마지막 조언은 그러했다. 한글 번역기를 뚫고 나온 그 한마디에 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글쓰기의 비법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비(自費) 출판. 말 그대로 자기 돈을 들여서 책을 내는 것을 일컫는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쓴 영화 리뷰가 470여 편 정도 된다. 그 정도 편수의 글이 쌓이고 보니, 나는 그걸 책으로 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무슨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평론가'라는 직함도 없는 블로거의 영화 리뷰를 쌍수 들어 환영해 줄 출판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있기는 하다. 내 돈 들여서 책을 내면 된다. 자비 출판을 하는 거다.

  물론 그냥 생각만 그렇다. 자비 출판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자비 출판 이거, 생각보다 꽤 흥미롭다. 나는 자비 출판으로 소설책 세 권을 펴낸 사람의 경험담을 읽었다. 자비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가 있으며, 초판본으로는 대개 200부에서 300부 정도를 뽑는다고. 인세에 관한 부분이 일반 출판사와 좀 다르다. 일반 출판사가 저자에게 통상적으로 인세의 10%를 지급한다면, 자비 출판은 40% 정도를 저자에게 지급한다. 예를 들어 자비 출판으로 낸 책값이 1만 원이라면, 4천 원을 저자가 받는 셈. 나머지 6천 원은 출판사의 몫인데, 출판사도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그 돈을 먹는 건 아니다. 인쇄비는 물론 물류, 마케팅비도 거기에 들어간다. 자비 출판한 책을 누가 읽냐고? 읽는 사람이 없지는 않단다. 출판사가 마케팅 수완이 좋으면 이런저런 유통망 통해서 책이 서점에 깔릴 수도 있다.

  자비 출판으로 소설책을 세 권 낸 그 저자는 출판사의 인세 삥땅(?)을 막기 위해서 책 판매 부수 장부를 써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자신의 지인 누가 어디 서점에서 책을 샀다고 하면, 그걸 꼬박꼬박 기록했다고. 나중에 그렇게 합산한 책 부수의 인세 금액을 출판사에서 자신에게 지급한 액수와 비교해 보았단다. 그랬더니, 차액이 꽤 커서 출판사 대표에게 증빙자료 보내고 나머지 인세 금액 돌려받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인세와 관련한 분쟁은 대형 출판사와 저자 사이에도 있는 일이니, 자비 출판의 경우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자비 출판 저자는 책 한 권 펴내는데, 돈을 얼마나 썼느냐 하면 300만 원이다. 누군가 그 글의 댓글에 이런 글을 달았다. 그 출판사 어디요? 나는 알아보니 500 부르던데. 자비 출판 경험자의 여러 글을 읽어보니 대략 300에서 500만원 사이의 금액인듯 하다. 자, 그럼, 돈을 마련해서 책을 낸다고 하자. 그런데 책 300권을 찍어서 대체 어떻게 하지? 나는 새삼 영상원 졸업 논문집 찍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논문집을 20부 찍었던가? 도서관에 논문집 제출하고,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렇게 20부를 겨우 다 소진했다. 그런데 300부를 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물론 내가 한 100부 정도 가져오고, 나머지 200부는 출판사의 마케팅 역량을 믿어보는 방법도 있다.

  이제 그 100부를 쪼개어 보자. 20부는 내가 아는 지인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30부는 내 블로그의 독자들 가운데 원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나머지 50부는... 나는 궁리 끝에 전국의 도서관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 여러 공공 도서관에 내 책을 기증하는 거다. 그것도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내 독자를 만나기 위한 투자 말이다. 아, 나는 자비 출판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그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뭔가 기분이 땅 밑으로 한없이 꺼져가는 것만 같았다.

  자기 이름으로 낸 책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자비 출판이라는 나름의 루트는 일종의 대안을 제공한다. 돈이 좀 든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책만 찍어내는 것이 끝이 아니다. 그 책이 생명력을 갖고 보다 많은 독자와 만나야 한다. 자비 출판은 그런 면에서 커다란 구멍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 독자, 내 책을 읽어줄 독자를 무슨 수로 어떻게 만나냐는 문제 말이다.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진 부자가 빌딩 위에서 지폐 다발을 뿌리듯, 책을 여기저기 나누어주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비 출판에 대한 서글픈 상상을 멈추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자신의 글에 대한 상품성을 입증하기. 나름 이름있는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해 저자가 갖추어야 할 제1의 요건이다. 어떻게든 시장에서 팔리는 글을 써야한다. 당연히 출판사는 자선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다. 저자가 상품성 있는 글을 써낼 수 있는 역량. 내가 그렇게 팔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데 시장에서 잘 팔리는 글은 대체 뭘까?

  "그냥 매일 쓰는 글이나 꾸준히 써."

  내가 자비 출판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냥 쓸 수밖에 없구나. 내 글을 팔아서 먹고사는 일은 정말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일은 좋아하니까. 무언가를 써내는 일은, 씨앗을 심는 일과도 같다. 내가 펜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작은 글 싹들은 자라날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 글이 만들어낸 숲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호시우행 2023-12-13 05:30   좋아요 0 | URL
정말, 세상에 공짜는 없는 모양입니다. 출판사는 돈을 벌기 위해 자비출판이란 미끼를 던지는 듯해요.ㅠㅠ 저도 지금껏 무척 많은 제안을 받아왔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뭐 자랑질하려고 책을 냅니까? 이게 제 생각이었어요.

푸른별 2023-12-13 08:34   좋아요 0 | URL
아, 호시우행님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언젠가는 호시우행님의 글을 알아봐주는 좋은 편집자를 만나서 책을 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글이 세상의 더 많은 독자를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니까요.

호시우행 2023-12-13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그렇게 꿈을 꾸고 나면 매일 쓰는 일기에 기록을 해둔다. 내가 꾸는 꿈들 가운데 사실 기분 좋은 꿈은 별로 없다. 대개는 꿈에서 깼을 때, 기분이 나쁜 꿈이 많다. 좀 신기하게도 그런 안 좋은 꿈은 그날이 아니더라도 며칠이 지난 후에 꿈땜을 하는 수가 있다. 누구와 다툰다거나, 기분 상하는 일이 있다거나, 작게나마 다치는 일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 12월 들어서 내가 쓴 일기들을 살펴보니, 연달아 악몽을 꾸어서 그걸 적어놓았다. 안좋은 꿈을 꾸면,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조심하는 게 좋아요. 내가 가끔 들러서 살펴보는 젊은 무당의 유튜브 채널에서 들은 말이다.

  그렇다면 안 좋은 꿈의 기준은 뭘까? 나의 경우엔 꿈에서 깼을 때, 기분이 나쁘면 안 좋은 꿈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생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꿈의 이미지도 있다. '반복몽(recurring dream)'이 그것이다. 이 항목에 대한 영문 wikipedia를 읽어보면 반복몽에 대한 다양한 예시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꿈도 있다. 나에게 화장실 꿈은 기분 나쁜 반복몽이다. 최근에는 화장실에 물이 들어차는 꿈을 꾸었다. 역시 안 좋은 꿈이다. 그리고 오늘, 그 꿈에 대한 꿈땜을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기분이 상당히 더럽다.

  11월에는 아주 흥미로운 꿈을 꾸었다. 꿈에서 임영웅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악수를 하는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임영웅의 팬이 아니다. 참으로 희한한 꿈이었다. 아마도 콘서트장이었나, 임영웅이 나를 알아보고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꿈에 나오는 건 좋은 꿈 같은데... 막내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거 정말 좋은 꿈 같다. 네가 이 꿈 사라. 혹시 아냐? 내년에 회사에서 승진할지 모르잖아. 내가 30만 원만 받을게."
  "돈 없어."

  동생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아휴, 저 바보. 이게 얼마나 좋은 꿈인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23년 5월에 임영웅과 대화하는 꿈을 꾸고 20억 복권에 당첨된 모녀에 대한 기사도 있다. 나도 복권을 사야 할까?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복권이란 건 사본 적이 없다. 좋은 꿈을 꾸었다고 딱히 복권을 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나마 동생한테 꿈을 팔아 소소한 용돈이라도 마련할 수 있나 했는데 글렀다. 그냥 그 꿈은 먹다 남은 위스키를 keeping 해두듯, 그냥 내 꿈의 창고에 넣어두어야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꿈에도 유효기간이란 게 있나? 11월에 꾼 좋은 꿈이 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내 경험상, 기분 나쁜 꿈은 대개 열흘 안팎으로 뭔가 사달이 난다. 그런데 임영웅 꿈은 꿈을 꾼 지 1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런 경사(?)스러운 일이 없다. 아마도 내가 임영웅의 찐팬이 아니라서 효과가 없는 모양인가 보다, 뭐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래전, 소설 창작 수업을 강의했던 작가 선생에게 길몽은 '똥 꿈'이었다. 선생은 자신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 큰 상금이 걸린 공모전에 입상할 때마다 '똥 꿈'을 꾸었노라고 말해주었다. '똥 꿈'이라니... 언젠가 복권 당첨자들의 꿈을 분석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도 '똥 꿈'이 나오기는 한다. 그런 걸 보면, 사람마다 꿈에서 재현되는 길몽과 흉몽의 이미지들이 참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12월 들어서 꾼 안 좋은 꿈들의 꿈땜은 오늘로 끝났으면 싶다. 예전에는 그렇게 꿈땜을 하고 나면, 참 재수가 없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만하길 다행이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다. 뭔가 안좋은 기운들이 서로 부딪혀 삐걱거리며 소리를 낸다고나 할까? 때로 그런 불협화음을 들으며 사는 일도 우리 삶의 일부분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