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


올해는 감이 풍년이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곶감을 만들겠다고 베란다에 감을 깎아 걸어
두었다 70개의 감이 옷걸이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곶감은 바람이 불고 서늘한 날씨에
잘 마른다 그런데 올가을은 늦더위가 이어졌고
습도가 높았다 감에는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고
날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단맛에 환장한 날벌레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어
미친듯이 곶감에 들러붙었다 날벌레를 내쫓으려
선풍기를 틀고, 계핏가루를 뿌려 보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모기장조차 날벌레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베란다는 날벌레의 만찬장이었다 갑작스러운 한파
주의보에 날벌레들이 좀 얼어죽기는 했다 하지만
벌레들의 끈질긴 생존력은 놀라웠다 그들은 다시
풀린 날씨에 생기를 되찾고 마음껏 단맛을 빨아들였다
곶감은 단맛을 수탈당하면서 어설프게 말라갔다
나는 날벌레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너희들도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겠지 나는 문득 지나온 인생에서
단맛이란 것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단맛의 기억은
희미하고, 나이가 들수록 단맛이란 만병의 근원이
될 뿐이다 곶감 만들기는 실패했다 베란다의 곶감은
모두 냉동실에서 잠들어 있다 단맛을 잊지 못한
날벌레들은 곶감이 사라진 베란다를 일주일 넘게
떠나지 못했다 나는 벌레들의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식초와 설탕, 그리고 주방세제를 풀어서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단맛을 잊지 못한 날벌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눈이 내렸고, 가을이 서둘러 지나가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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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짜


오늘 내가 받은 고구마의 택배 운송장에는
'호박고구마 특상 사이즈 비품'이라고 되어있다
비품은 B급, 삐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고구마의 상품페이지에는 전혀 다른 말로
쓰여있다 실속절약형 로얄과, 도대체 이 상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입 고구마는 진짜로 새끼
손가락 크기의 고구마이며, 못난이 고구마는
정말로 지질하게 못생긴 고구마이다 이와는 달리
실속절약형, 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의뭉스러움은
약간 '흠' 있는 상품을 보내드린다는 판매자의 해명으로
해소가 된다 그렇다면 그 뒤에 붙는 로얄과의 뜻은?
그것은 운송장의 '비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무언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온 상품을 뜻하는 삐짜를
척하니 써놓은 판매자의 무신경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자기들 물류센터 알바가 혹시나 로얄과를 포장해서
보낼까봐 그렇게 확실하게 삐짜, 라고 글로 못을 박은
것이리라 그런데 고구마에는 로얄과, 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입, 중, 특상, 대, 특대, 이렇게 대략 5가지
크기로 판매된다 특상이 제일 비싸고, 아주 작거나
큰 것은 싸다 그러니까 내가 주문한 실속절약형 로얄과의
실체적 진실이란 '특상 크기의 삐짜'인 것이다 royal을
지향하지만 그 끄트머리에 닿을 수 없는 실속절약형
비품 고구마의 비애는 이 고구마의 못생긴 자태로도
입증된다 나는 아주 잘 드는 필러로 고구마 껍질을
박박 깎아내고는 모두 다 냉동실에 넣었다 주홍빛이
도는 호박고구마가 맛이라도 로얄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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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데 이제 막 담근 것처럼 보이는
김장 김치 한 포기가 버려져 있다 왜 버렸을까?
고춧가루 양념이 적은지 그 배추는 허여멀건했다
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고춧가루를 좀 듬뿍 넣고,
젓국도 좋은 걸 쓰고, 갓도 싱싱한 것으로 썰어넣어야지
버려진 김치에서도 나는 엄밀하게 맛을 감지해낸다
2주일째 베란다 우수관으로 흘러내려가는 어느 집
배추 절인 물냄새를 맡으니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는 아랫집에서 멸치젓국을 끓였는데, 그 역겨운 냄새가
온 집안에 광기처럼 스며들었다 남도 사람인가 보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엄마도 김장을 할 때 그렇게 멸치젓국을 끓였다
이제 엄마는 김장하는 법을 잊어버렸고, 나는
엄마에게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매운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김치 없이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도 엄마의
친정에서 보내준 남도 김장 김치 한 쪽을 대충 잘라서
밥도 없이 그냥 먹었다 알싸한 눈물이 나는 맛이었다
김장을 해서 택배 상자가 터지도록 꽉꽉 눌러서 보내준
오래전 그 엄마의 마음이 있던 날도 함께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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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베란다 앞쪽 감나무는 올해 그 혹독한 여름 더위를
견뎠다 가을로 넘어가면서 감이 주홍색으로 익어갔는데,
그것이 멀리서 보면 고운 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그 감나무에
눈독을 들인 누군가가 죄다 따서 가져간 것 같았다
화단은 주기적으로 수목 소독을 하는데, 독한 농약
뒤집어쓴 감을 따다가 뭘 얼마나 먹겠다고 저러는가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밖에서 웬 남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다
동대표 마누라면 다야? 어디서 경비를 종 부리듯 부려?
울그락불그락한 남자 옆에서 늙고 키 작은 경비 할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네가 뭔데 참견을 해?
여자도 지지 않고 뻔뻔하게 대거리를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동대표 마누라가 경비에게 감을 따게 시켰던 모양이다
그걸 본 어떤 주민이 분노해서 그렇게 싸움이 벌어졌다
감나무를 보면, 가끔 그 일이 생각난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라 감도 싼데, 소독약 범벅인 감나무에서
감을 악착같이 따가는 사람이 있다 그나마 따기가
힘들었는지 꼭대기에 감 한 개가 덩그마니 남아있다
겨울에 새들이 잠시나마 단맛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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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머리를 자르러 가야 한다
시장 뒷편에 있는 작은 미용실은 언제나 손님으로 복작댄다
9시, 미용실 아줌마가 문을 여는 시간이다 시장통(市場通)은
한산하다 그래도 댕기 머리 여자의 가게는 손님이 좀 있다
여자는 십몇 년째 댕기 머리 가발을 쓰고 있다 가발에는 언제나
먼지가 그득했다 하지만 가져다 놓은 채소는 정갈했고, 가격도
저렴했다 그래서 손님이 많은 것이다 전에는 좌판에서 팔더니,
이제는 번듯한 가게도 갖고 있다 여자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아들 하나가 법대에 갔다고 자랑했다 이제 세월이 흘렀으니
그 법대를 졸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자의 먼지 낀 댕기 머리는
여전했지만, 찌들린 얼굴은 조금 펴졌다 조금 지나가면 반찬 가게가
나온다 그 집에서는 전도 부쳐서 파는데, 더럽게도 맛이 없다
어느 해 명절에 엄마는 더이상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며,
그 가게에서 전을 샀다 그 집 전에는 맛의 영혼이라고는 1그램도
들어있지 않았다 주인 여자는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여자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새 남편의 재산을
자기 아들 앞으로 해놓으려고 애를 썼다 새 남편의 자식은
구박을 받고 산다고 들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소문이란 연기처럼
흐르며 스며든다 드디어 미용실이 보인다 가게 문 앞에 덥수룩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다 남의 가게 앞에서
저게 뭐람, 그런데 미용실의 네온등이 돌지 않는다 가게 안에는
수건이 줄줄이 널어진 건조대가 보였다 10시에 온대요, 10시
남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남자도 아침 일찍 머리를
자르러 와서는 미용실 문이 닫혀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을 것이다
남자의 외투에는 허연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었다 몸을 쓰는 거친
일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 머리 자르는 일은 글렀네 나는 얼른
발길을 돌린다 다음번에는 아줌마가 제 시간에 나오겠지
늘 TV 조선을 틀어놓고, 야당놈들은 죄다 나쁜 놈이며, 돈 벌어서
땅과 집을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미용실 아줌마의
정갈한 커트 솜씨는 여전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시장통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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