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벤치
"아이구, 어르신. 날도 더운데 여기서 이렇게 앉아계세요?"
양산을 쓰고 지나가던 중년의 여자가 연이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오후 2시, 실버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연이 할머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다. 9월이 되었지만, 늦더위의 기세는 맹렬했다.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고, 여자는 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이 할머니는 무어라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할머니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머쓱해져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10분 거리의 아파트 노인정에 가면 에어컨이 잘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연이 할머니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감때사나운 총무 인천댁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인천댁은 노인정의 살림살이를 꽉 틀어쥐고 그곳 할머니들에게 오만 참견을 했다. 연이 할머니는 그 여편네가 아주 싫었다. 집이 답답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나마 놀이터 옆의 벤치가 앉아있기에는 마음이 편했다. 벤치 옆의 보도블록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정신 사납게 내달리는 오토바이며, 시끄럽게 악을 쓰는 조그만 애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숨이 막히는 담배 연기를 맡을 때도 있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중생들이 연이 할머니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렸다. 그럴 땐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도 그냥 참았다. 막돼먹은 것들. 연이 할머니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일 뿐이었다.
"어머니, 우리도 더는 못 하겠어요."
2년 전의 낙상 사고로 연이 할머니의 거동은 무척 불편해졌다. 부러진 다리뼈가 어렵사리 붙기는 했지만, 걷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원체 굽어진 허리에다 다리까지 말썽이니 연이 할머니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화장실 가는 일도 힘들어서 소변을 실수할 때가 많았다. 막내딸이 기저귀를 사서 부쳐주었다. 차곡차곡, 마치 시골집에 쌓여진 장작처럼 연이 할머니의 비좁은 방에는 기저귀 상자가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같이 사는 며느리는 집에서 지린내가 도무지 빠지지 않는다면서 싫은 소리를 자주했다. 그러던 것이 한 달 전, 연이 할머니가 이불에 실수하자, 집안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큰아들의 입에서 요양원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 할머니는 아들 내외에 대한 분하고 괘씸한 마음과 이렇게 내쫓김을 당하는 자신의 신세에 서글픔을 느꼈다.
"승미야, 네가 이 에미하고 살면 안 되겠나?"
휴대폰에 저장된 1번을 눌러서 연이 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엄마하고는 못살아'라는 짤막한 대답이었다. 내가 저것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매정할 수 있을까? 연이 할머니의 붉어진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배 아파 낳은 자신의 새끼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먼 곳으로 진작에 떠나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내일은 요양원에서 연이 할머니를 데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더운 바람이 연이 할머니의 얼굴을 휘감았다. 허연 머리가 끈적거리는 땀에 엉키며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손을 들어서 머리를 매만질 기운도 연이 할머니에게는 없었다. 더위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연이 할머니는 인견 치마의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엊그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길에 교회 선교를 하는 여자가 나눠준 사탕 하나가 손에 잡혔다. 사탕 껍질을 까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연이 할머니는 사탕 껍질을 호주머니에 다시 넣으려 했지만,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면서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그만 사탕이라도 하나 먹으니 침이 고이고,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제 부모를 어디 모르는 데다 내다버리는 몹쓸 종자도 있다는데, 그래도 내 자식은 그렇지는 않지. 연이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청포도의 신맛이 입안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자, 연이 할머니는 벤치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실버 유모차의 손잡이에 검버섯이 핀 양 손을 무겁게 얹었다. 꼬질꼬질 때가 탄 회색의 천 손잡이에는 '주인 정복연'이라는 매직펜 글씨가 삐뚤게 쓰여 있었다. 연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려다 말고는 잠시 벤치를 내려다보았다. 잘 있어라.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듯, 연이 할머니는 자신이 앉았던 벤치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