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
남편은 부산 출장 중이었다. 수영은 저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다. 자신은 그냥 과일이나 깎아서 먹고 말 심산이었다. 냉장고에는 복숭아가 있었다. 세 개의 복숭아. 그런데 복숭아는 모조리 멍이 들어서 물러지고 있었다. 한꺼번에 껍질을 까서 정리해 두는 것이 낫겠네. 너무나도 맛이 없는 복숭아였다. 설탕을 조금 뿌려 먹어야지. 밀폐용기에 복숭아를 담아놓고 복숭아 껍질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에는 전날의 바나나 껍질이 가득 차 있었다. 겨우 복숭아 껍질을 통에다 욱여넣고는 뚜껑을 닫았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은 남편 담당이었다. 내일 버릴까? 이런 쓰레기 버리는 일도 몹시 귀찮게 여겨졌다. 버리고 와야겠네. 후덥지근한 늦여름 날씨에 음식물 쓰레기를 이렇게 놔두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주섬주섬 반팔 카디건을 챙겨입었다. 시계는 밤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2주 전에 옆 단지 아파트에서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밤 10시에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던 주부가 괴한에게 두들겨 맞았다. 주부는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무슨 한밤중도 아니고, 이런 아파트 단지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묻지마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나름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수영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든 채, 도로 집으로 가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끼룩끼룩, 9월의 풀벌레 소리는 한여름 매미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거친 땅에다 쇠막대기를 갈아내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벌레가 수영의 옷자락에 들러붙은 것처럼 신경을 긁어대며 가깝게 들렸다.
"야, 임마. 네가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해."
1층 출입구 건너편에는 아파트 경로당이 있었다. 그 경로당 앞에서 중년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전화 통화 중이었다. 수영은 남자를 보고는 더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수영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아파트의 음식물 쓰레기통은 건너편 아파트의 1호 라인 쪽의 공터에 있었다. 원래는 5분 거리에 있던 것이 새롭게 전자 카드 인식 방식으로 바뀌면서 쓰레기통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면 10분은 걸어가야 했다.
경비실은 불이 꺼져있었다. 경비도 벌써 숙직실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경비실 앞에 주차된 자동차의 블랙박스 불빛이 깜빡거렸다. 그것은 마치 충혈된 빨간색의 눈알처럼 흔들렸다. 수영은 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다.
"투입하신 쓰레기의 중량은 750g입니다."
그냥 내일 버릴걸, 괜히 이 밤중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서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구나 싶어졌다. 수영은 출입구에서 아까 담배 피우던 남자가 아직도 있을지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때였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라기 보다는 마치 아파서 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수영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공터의 구석에서 여자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내저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여자는 옆 화단의 나무에다 고개를 짓찧었다. 그 모양새가 하도 기괴해서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여자는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는 매섭게 쏘아보았다.
"새댁, 내가 미친 사람 같지? 나도 내가 이렇게 살게 될 줄 정말 몰랐어. 새댁은 안 그럴 거 같아? 새댁이 나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어?"
흐트러진 머리의 중년 여자는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친 년이네.'
수영은 뭐라고 대거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여자가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급함으로 오그라붙었던 마음이 이상하게 여유로워졌다. 신경을 긁어대는 풀벌레도 눈에 보이면 가볍게 밟아 죽여줄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공터를 나오면서 수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경로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버리고 간 담배꽁초의 불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