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


  "어우, 잘 잤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검정색 러닝셔츠 차림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누웠던 벤치에는 땀이 흥건했다. 9월 초, 한낮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더위가 이어졌다. 남자가 가고 난 자리에는 남자가 먹다 버린 캔 커피가 오뚜기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바닥에는 남자가 피우고 내던진 담배꽁초도 있었다. 늦여름의 더운 바람이 갑자기 훅, 하고 놀이터의 벤치를 지나갔다. 어제 놀이터에서 놀았던 어린아이가 버린 것 같은 뽀로로 스티커가 남자가 드러누웠던 자리에 들러붙었다.

  실버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 하나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노인은 유모차를 세워놓고 벤치에 앉아서 하릴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후끈거리는 바람이 허옇게 세어버린 할머니의 머리를 정신없이 흩트려 놓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머리를 매만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기력도 없어 보였다. 10분, 20분... 노인은 더운 한낮의 벤치에 40분 정도 앉아있다가 힘겹게 유모차를 끌고 가버렸다. 노인이 떠난 자리에는 연두색의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굴러다녔다.

  "하여간 사람들이 배워처먹질 못해서 그래."

  주황색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들고 나타난 경비가 투덜거리며 벤치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경비는 버려진 캔 커피에 음료수가 남았는지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조금 남은 커피를 벤치 옆의 잔디밭에 쏟아버리고, 경비는 나머지 쓰레기들을 주황색 쓰레기통에 쓸어 넣었다. 뽀로로 스티커가 엉겨붙은 빗자루를 세워둔 채, 경비는 쓰레기통을 들고 사라졌다. 오후, 4시.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어느새 먹빛으로 변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지개색 우산을 쓴 늙은 아줌마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흰색의 천 가방에서 종이 책자 뭉치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이 없는 이들이 벤치로 몸을 피했다. 남자 중학생과 중학생의 엄마, 젊은 여자가 벤치에 앉았다. 퍼걸라(pergola)에는 무성한 등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심한 비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다.

  "저기, 시간 나면 이것 좀 봐요."

  늙은 여자가 '파수대' 책자를 중학생과 엄마, 젊은 여자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 벤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늘 출근하는 직장 같은 곳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여자는 선교의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출근했다. 중학생은 예의 바르게 책자를 받았다. 학생의 엄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책자를 신경질적으로 구겨서 쇼퍼백에다 넣었다. 젊은 여자는 표지를 짧게 쳐다보고는 곧 벤치 위에다 내려놓았다.

  "구원의 길이 거기 있어요."

  빗줄기가 점점 더 세어지자, 등나무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학생과 엄마가 자리를 떴다. 젊은 여자는 아까 내려놓았던 파수대 책자를 머리에 쓰고 빠른 걸음으로 뛰었다. 무지개색의 우산은 한 시간 정도 더 벤치에 머물렀다.

  저녁 7시 30분, 아파트 단지의 LED 가로등에 희미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노란색 우비에 헬맷을 쓴 배달 오토바이가 벤치 옆의 보도블록을 질주하며 무언가를 내던지고 갔다. 콜라 캔이 벤치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로등의 불빛에 콜라 캔이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젖은 담요를 두른 듯한 검정색의 고양이가 부주의하게 콜라 캔에 미끄러졌다. 허연색 배를 드러내며 뒤집혔던 고양이는 버둥거리다가 다시 일어났다. 고양이는 뒷다리 안쪽의 작은 상처를 연신 핥았다. 벤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에 놀란 고양이는 벤치 아래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빨강색의 우산을 쓴 세 명의 여중생이 벤치를 찾은 것은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여자애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자기들끼리 킬킬거렸다. 짧은 머리의 여자애가 백팩에서 휴지를 꺼내어 벤치의 물기를 닦았다.

  "민지, 너 교양인이네, 휴지도 갖고 다니냐?"
  "내가 너 같은 깡통인지 알아?"
  "이 년이 터진 아가리라고 아무 말 잔치네."

  키 큰 여자애가 짧은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라이터의 불빛이 짧게 켜지더니 꺼졌다. 때가 낀 흰색 캔버스화를 신은 여중생이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아까 그 아저씨한테 DM 보내봐."
  "안 할래. 영양가도 없을 거 같은데 뭐."

  짧은 머리는 벤치를 닦은 휴지를 작은 공처럼 뭉쳐서 내던졌다.

  "오늘은 허탕인가? 비도 오는데 그냥 일찍 집에나 가버려?"
  "가만있어 봐. DM 좀 더 뿌려보고."

  담배를 비벼 끄면서 캔버스화가 스마트폰의 인스타그램 화면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캔버스화가 내던진 담배꽁초가 파수대 책자 위로 떨어졌다. 책자에는 빗물이 흥건했다. 꽁초는 표지에 인쇄된 예수님의 얼굴에 자리를 잡았다. 입가에 담배를 물은 예수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여학생들은 11시가 되어서야 벤치를 떠났다. 여학생들이 떠난 벤치에는 비어버린 빨강색 틴트 통 하나가 있었다. 틴트 통의 뚜껑이 천천히 시멘트 바닥을 굴러가더니 멈추었다. 등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틴트 통에 고였다. 분홍색으로 번진 물이 조금씩 흘러넘쳤다. 바닥에 놓인 파수대의 예수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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