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 임성한이 새로운 드라마로 다시 복귀한다는 뉴스를 얼마전에 읽었다. 5년 전, '압구정 백야'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에도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임성한 드라마의 위력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놓는 작품마다 각종 논란을 양산해내던 그에게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그 논란의 가장 정점에 있었던 사건을 꼽으라면, '오로라 공주(2013)'의 주인공 설설희의 대사가 떠오른다.


  "암세포들은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실제로 그 대사는 내게 꽤나 흥미롭게 들렸다. 뭐랄까, 임성한이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관이라면 저렇게 쓸 수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암투병을 하는 환자와 가족들 입장에서는 감정을 건드리는 대사였음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드라마 제작진에게 항의가 빗발쳤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일일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57.3%)을 기록했다는 "보고 또 보고(1998)"는 정말 매일매일이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나도 재미나게 보았었는데, 겹사돈이라는 좀 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기는 했어도 이른바 '막장'의 기운은 그때까지 감지되지 않았다. 나중에 한류스타로 뜨게 되는 배우 박용하가 비중이 작은 배역이었음에도 후반부에 눈길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후속작이었던 '온달왕자들(2000)'에서부터 뭔가 남다르게 비틀린 기이한 세계가 펼쳐졌던 것 같다. 그 드라마에서 제기된 논란을 가볍게 제압해버린 것은 '인어아가씨(2002)'였다. 항상 조연에 머물렀던 배우 장서희가 이 드라마의 '아리영'을 열연해서 진정한 국민배우로 부상했다.


  '하늘이시여(2006)'는 어떤 면에서는 '임성한 월드'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이 작품이 양산해낸 각종 논란과 화제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죽음은 혹평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기이한 팬덤도 낳았다. 어쨌든 재미가 있기 때문에 임성한이 쓴 드라마라면 꼭 챙겨본다, 는 시청자들이 꽤 많이 늘어났다.


  케이블 방송에서 임성한 드라마는 여러 드라마 채널에서 자주 재방송되고 있다. 오래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들을 '정주행'하며 챙겨본다는 감상평들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요새 개연성 없고 재미도 없는 그런 드라마들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보고 또 보고'의 짧은 감상평을 올린 그 시청자는 케이블 방송의 감질나는 매일 편성을 견디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남은 회차를 몰아서 다 보았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하늘이시여'를 아마도 3번 이상은 다시 보셨던 것 같다. 물론 나름의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도 그 드라마의 작품성을 높게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써본 물건이나 제품들, 음식들 좋은 점 언급하면서 시간 끄는 장면은 지금 보면 참 많이 우습기도 하고 그래." 


  이른바 제품의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를 임성한 식으로 직접광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장면들이 그의 드라마들 속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마치 방문 판매업체의 담당자 설명에 예능적 요소가 곁들여진 느낌 같다.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논란과 화제성을 독점하는 임성한을 모델로 새로운 후계자가 부상했다. '아내의 유혹(2008)'의 김순옥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당시에 저녁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운동을 하러 나갔는데, 트랙을 돌면서 걷기 운동을 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인가 해서 봤더니, 얼굴에 점 하나 찍고서 '난 이전의 당신 아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그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성공 이후로 김순옥은 '왔다! 장보리(2014)', '내딸, 금사월(2015)'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후배 작가들의 잘 나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고 있기가 괴로웠던 것일까? 곧 다시 임성한은 자신의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로서 세간의 화제를 독점했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의 평가를 받을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쓰지 않았던 지난 5년 동안에 임성한이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일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대중의 취향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임성한이 대중의 관심사를 얼마나 현시대의 드라마로 그려낼 수 있는지가 작품의 성패를 가늠할 것이다.


  요새 국민방송(KTV)에서 재방영되는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를 틈틈이 보고 있다. '사랑과 진실(1984)'부터 김수현의 작품들은 빠지지 않고 거의 다 본 것 같다. 김수현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드라마계의 여제로 군림했다. 작가로서 나름대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중의 심리를 읽어내려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흐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작가 자신만의 가치관을 계몽적으로 전파하는 가족 드라마들을 만들어내면서 그는 화제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목욕탕집 남자들'은 3대가 모여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상을 담아내는데, 김수현은 가부장제에 대한 확고한 지지, 나이든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미, 젊은 세대들의 부박함에 대한 질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 그런거야(2016)'는 그런 김수현의 드라마와 이 시대가 결별하는 작품이었다. 저조한 시청률과 별다른 화제도 되지 못했던 그 드라마 이후로 김수현은 다음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작가가 젊은 세대의 의식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대개 유명 드라마 작가들은 보조 취재작가를 두는데, 젊은 취재작가가 젊은 세대의 이야기 소재를 취재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것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 노작가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김수현의 복귀작 편성에 난색을 표시하기 때문에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임성한이 다시 복귀작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과 관련업계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의 성패가 드라마 작가로서 임성한의 남은 경력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때 그의 드라마를 흥미있게 보았던 한명의 시청자로서 임성한의 복귀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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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음악 선생님이 여름방학 음악 숙제를 내주셨다.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 방송을 하나 정해서 듣고, 그 음악들의 곡명과 작곡가를 적어오는 숙제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숙제를 아주 지겹게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해온 음악 숙제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많은 아이들이 오전에 TV에서 막간을 이용해 잠깐 방송되는 5분 정도의 클래식 영상물을 시청해서 적어왔다. 그러니까 나처럼 매일 1시간씩 듣고 선곡표를 적어왔던 것이 아니라, 매일 한곡씩을 듣고 적어온 것이다. 그것도 서로 베껴서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숙제가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클래식 음악이 좋아졌다. 그래서 매일 듣는 1시간 방송 외에도 다른 방송을 더 듣는 때도 있었다. 물론 생소한 작곡가와 곡명을 적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클릭만 하면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선곡표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방송에서 들었던 음악을 확인하는 방법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해당방송 담당자와 통화를 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방송되는 곡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정확하게 받아적으려고 애를 썼다. 제일 싫은 것은 진행자가 노래를 틀기 전에 곡명을 한번만 알려주고, 끝날 때 말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제대로 듣지 못해서 확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짜증이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튼 집에 있는 인명 백과 사전까지 열심히 뒤적여가며 음악 숙제를 해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작곡가는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인데, 그의 오페라 '라 조콘다' 가운데 '시간의 춤'이 자주 나왔었다. 이 작곡가 이름을 펑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폰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백과 사전에 있으면 그대로 적었지만, 없으면 대충 적었다. 그럴 때마다 진행자들의 발음을 탓하곤 했다.


  어쨌든 그 방학 숙제 이후에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듣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요와 팝송을 듣는 동안, 내 취향은 클래식 음악으로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취향의 발견'이었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 '타인의 취향(2000)'에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미술 작품에 억지로 관심을 두게 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나중에는 정말로 미술 애호가가 되어버려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들을 사들이기까지 한다.


  지금은 음악 방송을 들을 때, 잘 알지 못하는 좋은 노래를 우연히 듣다가 진행자가 말해주는 노래 제목을 놓치게 되어도 괜찮다. 선곡표가 있는 세상. 그리고 가사 몇 마디, 노래 몇 소절만 알고 있으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이 노래를 찾아주는 시대이다. 내가 원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편지와 엽서를 써서 라디오 방송에 보내고, 그것을 녹음하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카세트 테이프의 REC 버튼을 누르려고 기다리던 아날로그의 시대는 지나가버린지 오래다.   


  선곡표가 없던 시대를 떠올리며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인터넷 댓글 사연이 있다. 노래에 얽힌 글타래에서 읽게 된 댓글이었다. 그 댓글을 쓴 이는 어느날 라디오에서 귀에 확 꽂히는 새롭고 놀라운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런데 노래 제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 노래의 소절을 들려주고 그 노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노력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따따 따라, 따따따, 이런식으로 이어지는 그 노래의 음조를 자신이 다니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서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우연히 듣게 된 음악 방송에서 그 노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노래의 제목을 알 수 있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보사 바로크(Bossa Baroque)',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이 1984년에 발표한 곡이었다. 노래 제목을 알아내기 위한 그의 지난한 대장정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신을 매혹시킨 노래를 향한 한 사람의 집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노래 제목을 알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을 것이다. 선곡표가 없었던 시대에 그가 겪어야했던 우여곡절이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웃음을 안겨주는 일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지식 하나를 얻기 위해 참으로 쉽지 않은, 번거로운 과정이 일상이었던 그 시대에는 그렇게 얻게 된 지식과 정보가 소중했고, 또 그것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손쉽게 얻고 알게 된 수많은 정보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보는 개념이 되었다.


  아주 가끔은, 아날로그 시대의 불편함이 주었던 그 진정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제, 음악 방송에서 나오는 '보사 바로크'를 들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곡의 제목을 찾아 자신만의 긴 여정을 힘겹게 마친 어떤 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지금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선곡표를 좋아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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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두를 직접 사다가 집에서 커피를 볶아서 먹은 지는 어느덧 10년째다. 워낙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다양한 원두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것이 그리 되었다. 집에서 커피를 볶는 일은 생각보다 번잡스럽고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커피 볶을 때 나는 엄청난 연기와 냄새, 볶는 과정에서 떨어지는 생두 껍질(chaff)은 가장 큰 골칫거리다. 게다가 로스팅 업체에서 볶는 열풍 방식이 원두에 골고루 열을 가하는 것이라면, 팬에다 열을 가해서 볶는 방식은 원두가 균일하게 볶아지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홈 로스팅을 놓지 않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직접 볶는다'는 자기 만족감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번거롭기도 하고,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로스팅하고 난 뒤에 이삼일씩 집안에서 빠지지 않는 커피 냄새가 싫기도 해서 일년에 서너번 정도나 볶는다. 아주 날씨가 쾌청하고, 바람이 무지 잘 불어야 하며, 습도도 그리 높지 않은 날. 계절로 치면 봄과 가을의 몇일 정도나 될까. 그래도 그렇게 커피를 볶고 난 다음에는 한동안 마실 커피를 장만했다는 마음에 뿌듯해진다.


  그동안 많은 커피를 마셔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피는 미얀마 커피다. 아마도 7년 전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미얀마 생두를 수입하는 업체가 드물었다. 생두 목록에 올라온 미얀마 생두는 굉장히 저렴했다. 미얀마에서도 커피를 재배한다니 신기하기도 했고, 그 커피 맛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일단 2kg을 구매해 보았다. 


  받은 생두를 집에서 확인해 보니, 생두 상태가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벌레가 먹거나 곰팡이가 핀 것들, 모양이 불량인 생두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핸드픽(hand-pick)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상업용 생두(commercial)에서는 보통 kg당 50g 안팎으로 나온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생두의 경우는 건조 과정이 특수해서 더 많은 결점두가 생기기 때문에 100g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미얀마 생두에서는 결점두가 거의 300g을 넘었다. 정말 형편없는 커피를 샀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로스팅을 하고 나서 마셔본 미얀마 커피의 맛은 놀라웠다. 생두의 상태는 그렇게 엉망진창이었을 망정, 커피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그 맛은 풍부하고 깔끔했다. 나는 미얀마 커피가 그렇게 좋은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미얀마 커피 산업에 대한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글에는 미얀마 커피 농장을 직접 탐방한 내용이 있었다. 사진을 보니, 차도 들어가지 않는 오지 산골에서 쓰러질 듯한 오두막에 거주하고 있는 가난한 농부가 커피를 재배하고 있었다.


  커피도 농산물이라 비료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쳐야 한다. 미얀마 오지 산골의 농부는 말 그대로 비료는 커녕 농약을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커피콩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오직 땅이 가진 그 독특한 형질과 기운, 농부의 진심으로 커피를 재배했고, 그것이 좋은 커피 맛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커피 재배에도 와인 애호가들이 그렇게도 말하는 떼루아(terroir)가 있다고 한다면, 미얀마 커피에도 그토록 좋은 토양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KBS 2TV '세상의 모든 다큐'에 미얀마의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2부작 다큐가 방영되었다. 명목상의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극심한 빈부 격차와 크고 작은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내전, 군부의 입김이 지배하는 미얀마의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다큐였다. 문득 오래전 마셔보았던 미얀마 커피가 생각났다. 이제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글 속의 그 산골 커피 농장에도 거대 산업 자본이 들어가서 커피 농부의 삶의 여건이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미얀마는 급성장하고 있는 커피 생산국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이전처럼 결점두가 많은 커피를 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밖에 나가는 길에 주차장을 지나면서, 아주 인상적인 문구를 적어놓은 차를 보았다.


  #인생은

  #언제나

  #흐린 후 맑음


  얼굴도 알지 못하는 차주가 뒷면 유리창에 적어놓은 그 정감있는 글귀 덕분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미얀마라는 나라에 잔뜩 끼어있는 구름이 사라지고, 그 나라의 사람들이 맑은 하늘 아래 웃을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바램을 가지게 만든 데에는 아마도 오래전에 마셨던 그 놀라운 미얀마 커피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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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02 18:26   좋아요 0 | URL
집에서 커피를 볶다니... ㅎㅎ 전 한번 해보고 다시는 안합니다. 집에서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는 맛은 기가 막혔지만 그 노동이 정말 장난 아니었기에말이죠. ㅎ 미얀마 커피는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는데 궁금하네요. 세계 어디든 커피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그 정당한 대가를 받는 곳은 거의 없지싶어요. 그래서 달콤한 커피의 맛이 때때로 씁쓸하기도 한듯요
 

 

  몇해 전부터 나던 흰머리가 올해 들어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꽤 많이 나고 있다. 나이들수록 그렇게 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고, 볼 때마다 뽑을 수 있는 정도도 이젠 넘어섰다. 자주 가는 사이트 게시판에도 '흰머리 어떻게 하세요?'라는 질문은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글들 가운데 하나다. 언젠가 이런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십대에 접어든 그는 자신의 초등생 딸에게 가끔씩 흰머리를 뽑게 하는데, 어느 날 딸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이제 더이상 흰머리를 뽑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너무 많아."


  그렇다. 어느 때가 되면 흰머리를 뽑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임계점 같은 순간이 꼭 온다. 흰머리 뽑다가 모근이 손상되면, 나중에는 머리숱이 적어져 머리가 휑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흰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내버려 둔다.


  흰머리가 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후천적인 영향 보다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의 흰머리 나는 시기를 대략적으로 따라간다고 보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일찍부터 머리가 세셨다. 열살 무렵, 어머니의 흰머리를 열심히 뽑아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이제는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내 흰머리가 이리 극성인 것도 나름 납득이 간다. 얼마전, 요새 들어 흰머리가 너무 많이 나고 있다고 어머니와 전화 통화 끝에 말이 나왔다. 


  "염색을 하려므나."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간단하고 명료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염색할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내가 대학시절에 보았던 어떤 영화 한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가 대학교 동아리에서 사회과학 분야의 전성기 였다면, 1990년대는 영화와 관련된 동아리의 전성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커지던 시기였다. 다니던 대학교에는 몇 개의 영화 동아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동아리가 일주일에 한편씩,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었다. 대개는 복제본 비디오 테이프를 프로젝터로 재생하는 수준이라서 화질은 기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DVD가 보급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 영화 동아리에서는 정기 시사회에 열심이었다. 상영 장소도 구하기 힘든지 도서관, 소강당, 대강의실을 오가며 자신들의 영화 열정을 전파했었다.


  나는 심심하면 읽던 영화 잡지에서 언급되는 유명 고전 영화들을 가끔씩 그 동아리 시사회를 통해 보곤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었다. 도서관 영상자료실에서 보았었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꽤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영상자료실이 새롭게 개관한지 얼마 안되어서 시설은 좋았다. 문제는 화질이었다. 정말로 지지직 거리는, 등장 인물의 얼굴이 가끔씩 뭉개져서 보였으며, 영화 내내 비가 오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영화가 가진 엄청난 흡인력은 그런 것조차 무시하게 만들었다. 미소년 타지오 역의 배우가 내뿜었던 빛나는 아름다움이 스크린 전체를 휘감았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외모였다. 그런 그에게 매혹당한 작곡가 아센바흐의 늙음과 절망이 영화 내내 절규하듯 울려퍼졌다. 


  그 마지막 장면. 사랑의 열정에 미친 아센바흐는 젊게 보이려고 염색을 하고, 잔뜩 성장한 채 타지오가 있는 해변으로 나간다. 검은 염색약이 오물처럼 얼굴을 흘러내리고 눈물과 비탄 속에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그를 배경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의 4악장이 흐른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서 늙음이란 비정한 추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할 정도로 슬펐다. 그때 본 염색약의 엄청난 영화적 효과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나는 염색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늙음이란 이런저런 말로 좋게 포장하려해도 결국은 이 악물고 견뎌야하는 괴로운 통과의례일 뿐이다. 노안이 온 지도 꽤 되어서 모니터 화면의 글씨를 크게 해놓고 보아야 편하다. 활자가 작은 책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어느날 변해버린 현실에 조금씩 적응하며 사는 것이다.


  "포기하면 편해."


  흰머리 뽑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 본다. 흰머리가 서리내리듯이 머리를 뒤덮는다고 해도 나는 염색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도 당신의 흰머리를 견디질 못하신다. 어쩌면 늙음의 과정이란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어 내는 의지력의 시험을 매일매일 치루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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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선생에게 사과의 말부터 해야할 것 같소. 어느날 TV를 틀었는데 선생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소. 선생의 얼굴은 반쪽이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었소. 그런데 그 모양이 너무 흉해서 정말 보는 것이 괴로웠다오. 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TV화면으로 보는 것 자체가 괴롭다고 느껴졌소. 나는 즉시 채널을 돌렸다오. 하지만 리모컨을 계속 눌러봐도 달리 볼 것이 없었고, 결국엔 다시 선생의 얼굴이 나오는 채널로 돌아왔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계속 트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괜찮았소. 나는 그렇게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는 다큐를 보게 되었소. 마침내 다 보고나서 마음 한켠이 저릿해지고야 말았소. 미안하오. 선생의 얼굴을 처음 보고 흉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말이오.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거대 트럭으로 화물을 운송하는 선생에게는 Diesel Gypsy라는 별칭이 붙어있더이다. 참, 선생이란 호칭이 실례가 되지 않으면 좋겠구려. 선생이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듯하여 그 호칭을 쓰기로 했소. 사실 나는 선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오. 그것이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이란 것을. 삼십대 초반에 겪은 뇌졸중 이후로 선생은 거울을 안본다고 했소. 유학을 다녀오고 자신의 사업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리 되었으니 선생이 겪었을 충격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나는 조금은 알 것도 같았소. 어쩌면 조금 보다는 더 많이 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도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동병상련. 참으로 가슴 절절한 고사성어가 아니오?

  서른 일곱, 초봄의 그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오. 나는 일주일 넘게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소. 평소에도 긴장성 두통이 자주 있는 편이고, 진통제를 먹으면 나아지곤 했소.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이어진 두통에 도통 약이 들어먹질 않는 거요. 마치 누가 와서 도끼로 내 머리를 쪼개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었소. 그러다 귀까지 욱신거리고 아프길래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고, 삼차 신경통이라는 말을 들었소. 처방받은 약을 먹었지만 통증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소. 이비인후과에 다녀온 다음날 아침, 나는 뭔가 얼굴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소. 차가운 것도 같고, 뜨거운 것도 같고, 아무튼 몹시 이상한 느낌이었다오. 양치질을 하는 동안 물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내렸소. 거울을 보니 얼굴이 약간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도 같았소. 아주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결국 급하게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소.

  "대상포진입니다."

  신경과 주치의는 아주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소. 나는 대상포진이라는 것이 발진과 수포가 몸에 띠처럼 생기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소. 피부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는데, 무슨 대상포진인가 싶었지. 귀에 생긴 대상포진이었소. 알고보니 대상포진은 신체 어디에나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이다. 수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어느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나타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Ramsay Hunt syndrome. 그것은 귀에 생긴 대상포진을 지칭하는 병명이라오. 당장 입원을 해야한다고 의사가 말했소. 신경절을 뚫고 나온 바이러스가 안면신경을 따라 퍼지면서 얼굴이 마비되고 있었고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오. 입원 당일 저녁무렵에는 오른쪽 눈이 감기지 않았고, 입은 심하게 비뚤어져 있었소. 나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얼굴이 돌아오는 거냐고 물었소.

  "불가능해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무지막지한 적개심이 들더이다. 그냥 예후가 나쁘다고만 말했어도 될 일이었소. 저런 callous한 인간이 의사라는 것이 참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아픈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예의를 갖고 있었다면 그런식으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소.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한 항바이러스제 주사를 정해진 시간마다 맞았고, 무시무시한 통증을 잠재우려고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야 했소. 그 약도 듣질 않아서 통증 때문에 머리가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소.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소. 새벽마다 잠이 깨서 앉아있다가 통증을 잊으려고 라디오를 들었소. 이어폰에서 Maroon 5의 Maps가 흘러나오던 것이 기억나오.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이다. 이 병으로 인해서 내 인생의 지도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소.

  일주일 후 퇴원을 했지만 마비된 얼굴은 그대로였소. 어머니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었는데, 아들이 대학병원 신경과 의사로 있었소.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을 때 보고 거의 삼십년만에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나는 마침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오. 아주 영민하고 친절한 그 친구는 내가 병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답해주었소. 다만 그가 대답을 머뭇거렸던 한가지 질문이 있었소. 얼굴이 돌아올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소.

  "차차 나아질 겁니다."

  그 친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렇게 대답했소. 그때 알아챘지. 시간이 지나도 얼굴이 돌아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염증으로 눌려있던 신경이 서서히 펴지면서 마비된 상태가 나아지기는 했지만. 내 얼굴은 예전의 얼굴로 돌아가지 못했다오. 감기지 않는 눈에는 안구건조증이 왔고, 밤에는 안대를 하고 자야했소. 음식물을 먹다가 흘리는 일은 일상이었고.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아 양치질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결국 오른쪽 치아들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흔들거리기 시작했소. 바이러스가 청신경에도 침범을 해서 소리를 듣는 감각에도 이상이 왔소. 청각과민증.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irreversible.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소. 신경 손상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회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전과 동일하게 회복될 수 없다오. 선생과 나의 얼굴에 생긴 변화는 그런 것이오. 생각해보면 우리들 인생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시간을 거슬러 되돌릴 수 없소. 그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거나 그것으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라오.

  선생의 인터뷰를 찾아서 읽어보니, 선생은 그렇게 변해버린 얼굴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에 부딪히느라 상처를 입었다고 했소. 회사를 그만 두고 트럭 운전으로 직업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소. 나는 선생처럼 직업을 바꿀 필요는 없었소. 전부터 하던 번역일을 계속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해서 먹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소. 어느해는 일이 들어오지 않아 책 한권을 번역한 것이 전부였소.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언어의 집에 칩거하기 시작했소. 활자 속에서 내가 자유롭게 숨쉴 수 있었던 것처럼 선생은 '돌쇠'라고 부르는 자신의 트럭안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소. 그것은 생계 수단이기도 했고 선생의 일상 대부분을 함께 하는 친구같기도 한 존재였을 거요. 나에게는 그 트럭이 선생을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선생의 진짜 집,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소. '돌쇠'의 할부금을 갚느라 빡빡한 운행 일정을 감내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트럭 운전을 하면서 만난 미국과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은 선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보듬어주었소.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이 없다오. 선생도 잘 알거요, 기이한 것,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천박한 관심에 대해서. 선생이 그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갔던 캐나다에서는 선생을 보고 그 누구도 얼굴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고 들었소. 나는 TV의 여행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보았다오. 세계 테마기행, 걸어서 세계 여행, 이런 프로그램이었소. 그런 프로들을 10년동안 보고나니, 이젠 어느 여행지에 가서는 어딜 꼭 가야하고, 어디를 들러서 뭘 먹어야하는지에 대해 줄줄 읊어댈 정도가 되더이다. 마이애미 비치에서는 'Roberts is here'이라는 과일 가게에 들러서 다양한 과일빙수를 먹어봐야 한다던지, 베니스에서는 세계 최초의 카페를 방문해봐야한다던지 하는 것 말이오. 마카오의 육포거리와 아몬드 쿠키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소. 여러번 나온 여행지는 지겹기까지 했지. 예를 들면 터키의 파묵칼레 온천이라던지,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체험, 베니스의 곤돌라 유람 같은 것은 안보게 된다오. 어느날은 킬리만자로 산을 오르는 여행기를 보고 있었소.

  "아, 저긴 가봤잖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오. 그곳에 간 사람의 여행기를 읽었던 기억이 났소. 정말로 실감나고 재미있게 잘 쓴 여행기여서 마치 내가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라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던 거요. 나는 그렇게 TV와 글을 통해 전세계를 유랑하고 다녔소. 선생도 14년 동안 trucker로 일하면서 유명 관광지를 가본 적이 없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보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 들었소. 내게도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는 하오. 페트라. 그곳에 가서 고대 페트라인들이 세운 신전들을 직접 보고 싶다오.

  선생, 혹시 인터넷에서 선생에 대해 검색을 하면 뜨게 되는 연관 검색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소? 결혼, 나이, 연봉, 이런 것들이라오. 뭐랄까,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보는 적나라한 관점을 알게 된 느낌이었소.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검색어가 '결혼'이었소. 다큐에는 장거리 운행을 떠나기 전에 선생이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이 나왔소. 주방에서 밥과 반찬을 능숙하게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김치와 소분해서 밀폐용기에 담아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선생의 혼자살이가 꽤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소. 평균적인 삶의 행로, 그러니까 대략 몇살 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워서 독립시키고, 편안한 노후를 맞는 그런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행로를 찾아 갈 수 밖에 없소. Personal velocity. 다른 길로 가게되면 그 길을 가는 속도도 달라지는 것 같소. 가끔은 내 나이가 아직도 삼십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아마 아이가 있었다면 커가는 아이를 보며 내 나이를 실감했을지도 모르오.

  문득 이십대 때의 일이 생각나오. 대학 때, 희곡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소. 칠순이 가까운 극작가 선생님이 수업을 하셨소. 같이 수강하던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고 여겼소. 그래서 지들끼리는 '영감님이 집에서 손주나 보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수업을 하겠다고'하면서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았소. 처음에는 스무명쯤 되던 수강생이 나중에는 서너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가운데 한명이 나였소. 나는 그 수업이 아주 재미있었다오. '영감님'은 결코 꼰대같은 분이 아니었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알았고 좋은 유머감각도 있었소. 그리고 오랫동안 문단에 있으면서 여러 이야깃거리를 알고 있어서, 나는 마치 용사의 무용담을 듣듯이 수업을 즐겁게 들었소. 나중에는 '영감님'과 꽤 가까워졌소. 한번은 그런 질문을 했더랬소.

  "인생의 의미가 뭘까요?"

  뭔가 중 2병스러운 질문이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영감님의 대답은 이러했소.

  "글쎄다, 내가 이 나이만큼 살아보니까 그게 그렇더라. 자신의 혈육 한점 남기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

  영감님에게 드라마 작가인 따님이 한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소. 따님은 그분의 자랑이기도 했소. 당시 나는 비평 수업도 들었는데, 비평가 선생님과도 친했었소. 영감님의 인생철학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 했더니, 비평가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소.

  "그 양반은 첫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하나 있어. 워낙 방랑벽이 심해서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지. 지금은 어떤 젊은 여자와 같이 산다는 말이 들리던데."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 자녀들이 영감님을 아버지로서 그다지 잘 대우해줄 것 같지 않았소.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삶이었소. 그런데도 영감님이 자식을 남기는 일을 인생의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 말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어떤 생의 이면은 그토록 복잡하다오. 혈육 한점 없는 삶이면 뭐 어떻소.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이다. 자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요양원에 보러올 사람이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라고. 언젠가 할머니들이 있는 요양원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소. 할머니들은 한달에 한번 오는 자식들의 방문을 그야말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더이다. 자식들이 오는 날은 무슨 잔칫날처럼 즐거웠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뒤의 할머니들의 표정은 너무나 애잔했소.

  "그게 그렇게 슬프세요? 다음에 자녀분들이 또 올 거잖아요."

  감독의 질문에 할머니가 대답했소.

  "슬퍼. 그냥 슬퍼. 가고나면 보고파."

  아마 나는 그 할머니의 심정을 앞으로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거요. 그렇다고 그것이 괴롭지는 않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많은 경험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오직 그것만이 인생의 참된 경험인 것처럼 어줍잖은 동정과 연민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소. 그 편협하고 오만한 시선이 나는 참으로 싫다오.

  혼자 산다는 것. 선생, 나는 그 삶이 가져오는 '외로움' 보다도, 아프다가 홀로 죽게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렵소. 선생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소? 최근에 아주 주의깊게 읽은 신문 기사는 고독사 청소부의 인터뷰였소. 경찰과 유족, 건물주의 의뢰로 고독사 현장을 청소하는 사람이 전해주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서늘한 슬픔이 느껴졌다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무엇인지 아시오? 특히 건물주들이 한결같이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걸 글로 써보면 이런 걸거요.

  "재수도 더럽게 없지. 죽을려면 어디 딴데 가서 죽지, 하필이면 여기서 죽고 말이야. 어이, 이봐. 자넨 이런 일 많이 해봤으니 잘 알 거 아냐. 거 뭐냐, 혼자 죽을 것 같은 사람들 특징 같은 거. 그런 것 좀 알려줘. 그래야 다음에 이런 고약한 일 안겪지."

  그런 건 없다, 고 아무리 말해줘봐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런 속물들이 보기에 뭔가 외모도 이상하고, 수입이 일정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가장 첫번째로 꼽을 것 같았다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소름이 끼쳤소.

  선생, 선생도 알다시피 뭐 달리 방법이 없소. 그 역겨운 편견의 시선을 견디며 사는 수 밖에. 문득 서른 일곱, 그 고통스러웠던 봄날의 일이 생각나오. 입원했던 병원 건물 7층은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소. 통증에 시달리다 지치면 나는 그곳에 가서 앉아있곤 했소. 입원한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나,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소. 꽃샘추위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꽤나 추웠던 기억이 나오. 정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소.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거치대를 끌고 좀 걷다가 의자에 앉아있었소. 뭔가 인기척이 나서 보니 내 건너 옆자리에 누가 털썩, 소리를 내며 앉더이다. 아직 스물은 되지 못한 것 같은, 열 일고여덟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학생. 찬바람도 불었고 통증 때문에 더 앉아있기 힘들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소. 수액 거치대를 끌고 가려는데 수액줄이 엉켜서 그걸 좀 풀고 있었지. 그때 학생이 입을 열었소.

  "다리를..."

  학생은 고개를 수그리고 울먹이는 것 같았소.

  "다리를 잘라내야 한대요, 이젠 방법이 없다고. 골육종인데... 5년동안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그러더니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소.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요?"

  나는 수액줄을 풀다 말고 잠시 가만히 있었소.

  "학생."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는 말을 이어갔지.

  "학생, 내 얼굴을 좀 봐봐. 난 얼굴을 잃었어.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가게 될 지도 몰라. 학생이 나라면 어떻게 삶을 견디며 살아야할 것 같아? 나도 정말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거야.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남은 삶을 견딜 수 있을까?"

  황망해진 표정의 학생을 뒤로 하고 나는 걷기 시작했소.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소. 아직도 그 봄밤을 떠올리면 그 때의 고통과 매화꽃 향기가 같이 뒤엉켜 떠오른다오.

  작년에 번역한 추리소설이 하나 있었소. 주인공의 직업은 detective. 그는 여덟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느라 소설 내내 고군분투한다오. 마침내 범인을 검거하고 3개월만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소. 키우던 고양이는 옆집에 맡겼는데 도망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혼한 아내와의 양육권 소송은 재판기일에 출석도 제대로 못해서 패소했소. 먼지구덩이가 되어버린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그가 하는 말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었소.

  "It was a very long haul."

  a long haul. 장거리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나 꽤나 품이 드는 힘든 일을 뜻하는 관용구. 선생이 하는 트럭 운송도 long-haul이라고 하지요. 정말로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라고만 번역하자니 뭔가 밋밋하고 싱거운 문장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소. 나는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그냥 이틀동안 내버려두었소. 그 문장은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괴롭게 느껴지더이다. 주인공의 혼잣말이 내 지난 10년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르오.

  불시에 들이닥친 도적처럼 불행과 고통이 찾아왔고, 그것을 견디려고 무척 애를 썼소. 새옹지마, 전화위복 같은 말로 고통에 쓸데없는 덧칠을 하고 싶지 않다오. 어떤 불행과 고통은 한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회복될 수 없게도 만들지요. 그래서 그건 신이 인간에게 보이는 아주 순전한 조롱과 악의같다는 생각도 들었소.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느냐고 물었던 10년전 학생의 물음에 답할 그 무엇도 나는 찾지 못했소.

  "참으로 길고도 지독한 날들이었군 그래."

  지난 10년의 시간에는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건 오직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 거요. 어쨌든 지금 살아있다는 것,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 말고 중요한 사실은 없다는 생각도 드오.

  선생이 한국에서 처리해야할 일 때문에 7월에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 미친 전염병의 시대에 선생의 생업도 부득이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이곳에서 잘 지내다 캐나다로 무탈히 돌아가길 바라오. 선생이 나온 다큐를 보면서 고통을 견디며 살아낸 사람의 기개와 강인함이 느껴져서 참 보기 좋았소.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썼다오. 멀리서, 응원하리다.



                                                                   2020년 8월

                                                                   행운을 빌며

                                                                   R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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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트럭커 유투버 '디젤 집시' 최창기 씨의 다큐(KBS 1TV의 다큐세상 '디젤 집시의 대륙횡단기', 2020년 2월 7일 방영분)를 보고 지난 8월에 쓴 짧은 소설이다. 그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다. 그의 블로그에 발인 날짜가 9월 30일로 적혀있었다. 인생이란... 타국이 아닌 고향 땅에서 영면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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