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벤치


  "아이구, 어르신. 날도 더운데 여기서 이렇게 앉아계세요?"

  양산을 쓰고 지나가던 중년의 여자가 연이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오후 2시, 실버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연이 할머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다. 9월이 되었지만, 늦더위의 기세는 맹렬했다.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고, 여자는 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이 할머니는 무어라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할머니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머쓱해져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10분 거리의 아파트 노인정에 가면 에어컨이 잘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연이 할머니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감때사나운 총무 인천댁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인천댁은 노인정의 살림살이를 꽉 틀어쥐고 그곳 할머니들에게 오만 참견을 했다. 연이 할머니는 그 여편네가 아주 싫었다. 집이 답답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나마 놀이터 옆의 벤치가 앉아있기에는 마음이 편했다. 벤치 옆의 보도블록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정신 사납게 내달리는 오토바이며, 시끄럽게 악을 쓰는 조그만 애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숨이 막히는 담배 연기를 맡을 때도 있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중생들이 연이 할머니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렸다. 그럴 땐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도 그냥 참았다. 막돼먹은 것들. 연이 할머니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일 뿐이었다.  

  "어머니, 우리도 더는 못 하겠어요."

  2년 전의 낙상 사고로 연이 할머니의 거동은 무척 불편해졌다. 부러진 다리뼈가 어렵사리 붙기는 했지만, 걷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원체 굽어진 허리에다 다리까지 말썽이니 연이 할머니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화장실 가는 일도 힘들어서 소변을 실수할 때가 많았다. 막내딸이 기저귀를 사서 부쳐주었다. 차곡차곡, 마치 시골집에 쌓여진 장작처럼 연이 할머니의 비좁은 방에는 기저귀 상자가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같이 사는 며느리는 집에서 지린내가 도무지 빠지지 않는다면서 싫은 소리를 자주했다. 그러던 것이 한 달 전, 연이 할머니가 이불에 실수하자, 집안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큰아들의 입에서 요양원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 할머니는 아들 내외에 대한 분하고 괘씸한 마음과 이렇게 내쫓김을 당하는 자신의 신세에 서글픔을 느꼈다.

  "승미야, 네가 이 에미하고 살면 안 되겠나?"

  휴대폰에 저장된 1번을 눌러서 연이 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엄마하고는 못살아'라는 짤막한 대답이었다. 내가 저것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매정할 수 있을까? 연이 할머니의 붉어진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배 아파 낳은 자신의 새끼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먼 곳으로 진작에 떠나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내일은 요양원에서 연이 할머니를 데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더운 바람이 연이 할머니의 얼굴을 휘감았다. 허연 머리가 끈적거리는 땀에 엉키며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손을 들어서 머리를 매만질 기운도 연이 할머니에게는 없었다. 더위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연이 할머니는 인견 치마의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엊그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길에 교회 선교를 하는 여자가 나눠준 사탕 하나가 손에 잡혔다. 사탕 껍질을 까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연이 할머니는 사탕 껍질을 호주머니에 다시 넣으려 했지만,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면서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그만 사탕이라도 하나 먹으니 침이 고이고,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제 부모를 어디 모르는 데다 내다버리는 몹쓸 종자도 있다는데, 그래도 내 자식은 그렇지는 않지. 연이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청포도의 신맛이 입안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자, 연이 할머니는 벤치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실버 유모차의 손잡이에 검버섯이 핀 양 손을 무겁게 얹었다. 꼬질꼬질 때가 탄 회색의 천 손잡이에는 '주인 정복연'이라는 매직펜 글씨가 삐뚤게 쓰여 있었다. 연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려다 말고는 잠시 벤치를 내려다보았다. 잘 있어라.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듯, 연이 할머니는 자신이 앉았던 벤치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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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


  "어우, 잘 잤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검정색 러닝셔츠 차림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누웠던 벤치에는 땀이 흥건했다. 9월 초, 한낮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더위가 이어졌다. 남자가 가고 난 자리에는 남자가 먹다 버린 캔 커피가 오뚜기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바닥에는 남자가 피우고 내던진 담배꽁초도 있었다. 늦여름의 더운 바람이 갑자기 훅, 하고 놀이터의 벤치를 지나갔다. 어제 놀이터에서 놀았던 어린아이가 버린 것 같은 뽀로로 스티커가 남자가 드러누웠던 자리에 들러붙었다.

  실버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 하나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노인은 유모차를 세워놓고 벤치에 앉아서 하릴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후끈거리는 바람이 허옇게 세어버린 할머니의 머리를 정신없이 흩트려 놓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머리를 매만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기력도 없어 보였다. 10분, 20분... 노인은 더운 한낮의 벤치에 40분 정도 앉아있다가 힘겹게 유모차를 끌고 가버렸다. 노인이 떠난 자리에는 연두색의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굴러다녔다.

  "하여간 사람들이 배워처먹질 못해서 그래."

  주황색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들고 나타난 경비가 투덜거리며 벤치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경비는 버려진 캔 커피에 음료수가 남았는지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조금 남은 커피를 벤치 옆의 잔디밭에 쏟아버리고, 경비는 나머지 쓰레기들을 주황색 쓰레기통에 쓸어 넣었다. 뽀로로 스티커가 엉겨붙은 빗자루를 세워둔 채, 경비는 쓰레기통을 들고 사라졌다. 오후, 4시.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어느새 먹빛으로 변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지개색 우산을 쓴 늙은 아줌마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흰색의 천 가방에서 종이 책자 뭉치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이 없는 이들이 벤치로 몸을 피했다. 남자 중학생과 중학생의 엄마, 젊은 여자가 벤치에 앉았다. 퍼걸라(pergola)에는 무성한 등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심한 비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다.

  "저기, 시간 나면 이것 좀 봐요."

  늙은 여자가 '파수대' 책자를 중학생과 엄마, 젊은 여자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 벤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늘 출근하는 직장 같은 곳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여자는 선교의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출근했다. 중학생은 예의 바르게 책자를 받았다. 학생의 엄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책자를 신경질적으로 구겨서 쇼퍼백에다 넣었다. 젊은 여자는 표지를 짧게 쳐다보고는 곧 벤치 위에다 내려놓았다.

  "구원의 길이 거기 있어요."

  빗줄기가 점점 더 세어지자, 등나무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학생과 엄마가 자리를 떴다. 젊은 여자는 아까 내려놓았던 파수대 책자를 머리에 쓰고 빠른 걸음으로 뛰었다. 무지개색의 우산은 한 시간 정도 더 벤치에 머물렀다.

  저녁 7시 30분, 아파트 단지의 LED 가로등에 희미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노란색 우비에 헬맷을 쓴 배달 오토바이가 벤치 옆의 보도블록을 질주하며 무언가를 내던지고 갔다. 콜라 캔이 벤치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로등의 불빛에 콜라 캔이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젖은 담요를 두른 듯한 검정색의 고양이가 부주의하게 콜라 캔에 미끄러졌다. 허연색 배를 드러내며 뒤집혔던 고양이는 버둥거리다가 다시 일어났다. 고양이는 뒷다리 안쪽의 작은 상처를 연신 핥았다. 벤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에 놀란 고양이는 벤치 아래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빨강색의 우산을 쓴 세 명의 여중생이 벤치를 찾은 것은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여자애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자기들끼리 킬킬거렸다. 짧은 머리의 여자애가 백팩에서 휴지를 꺼내어 벤치의 물기를 닦았다.

  "민지, 너 교양인이네, 휴지도 갖고 다니냐?"
  "내가 너 같은 깡통인지 알아?"
  "이 년이 터진 아가리라고 아무 말 잔치네."

  키 큰 여자애가 짧은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라이터의 불빛이 짧게 켜지더니 꺼졌다. 때가 낀 흰색 캔버스화를 신은 여중생이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아까 그 아저씨한테 DM 보내봐."
  "안 할래. 영양가도 없을 거 같은데 뭐."

  짧은 머리는 벤치를 닦은 휴지를 작은 공처럼 뭉쳐서 내던졌다.

  "오늘은 허탕인가? 비도 오는데 그냥 일찍 집에나 가버려?"
  "가만있어 봐. DM 좀 더 뿌려보고."

  담배를 비벼 끄면서 캔버스화가 스마트폰의 인스타그램 화면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캔버스화가 내던진 담배꽁초가 파수대 책자 위로 떨어졌다. 책자에는 빗물이 흥건했다. 꽁초는 표지에 인쇄된 예수님의 얼굴에 자리를 잡았다. 입가에 담배를 물은 예수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여학생들은 11시가 되어서야 벤치를 떠났다. 여학생들이 떠난 벤치에는 비어버린 빨강색 틴트 통 하나가 있었다. 틴트 통의 뚜껑이 천천히 시멘트 바닥을 굴러가더니 멈추었다. 등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틴트 통에 고였다. 분홍색으로 번진 물이 조금씩 흘러넘쳤다. 바닥에 놓인 파수대의 예수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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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


  남편은 부산 출장 중이었다. 수영은 저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다. 자신은 그냥 과일이나 깎아서 먹고 말 심산이었다. 냉장고에는 복숭아가 있었다. 세 개의 복숭아. 그런데 복숭아는 모조리 멍이 들어서 물러지고 있었다. 한꺼번에 껍질을 까서 정리해 두는 것이 낫겠네. 너무나도 맛이 없는 복숭아였다. 설탕을 조금 뿌려 먹어야지. 밀폐용기에 복숭아를 담아놓고 복숭아 껍질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에는 전날의 바나나 껍질이 가득 차 있었다. 겨우 복숭아 껍질을 통에다 욱여넣고는 뚜껑을 닫았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은 남편 담당이었다. 내일 버릴까? 이런 쓰레기 버리는 일도 몹시 귀찮게 여겨졌다. 버리고 와야겠네. 후덥지근한 늦여름 날씨에 음식물 쓰레기를 이렇게 놔두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주섬주섬 반팔 카디건을 챙겨입었다. 시계는 밤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2주 전에 옆 단지 아파트에서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밤 10시에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던 주부가 괴한에게 두들겨 맞았다. 주부는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무슨 한밤중도 아니고, 이런 아파트 단지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묻지마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나름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수영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든 채, 도로 집으로 가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끼룩끼룩, 9월의 풀벌레 소리는 한여름 매미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거친 땅에다 쇠막대기를 갈아내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벌레가 수영의 옷자락에 들러붙은 것처럼 신경을 긁어대며 가깝게 들렸다.

  "야, 임마. 네가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해."

  1층 출입구 건너편에는 아파트 경로당이 있었다. 그 경로당 앞에서 중년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전화 통화 중이었다. 수영은 남자를 보고는 더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수영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아파트의 음식물 쓰레기통은 건너편 아파트의 1호 라인 쪽의 공터에 있었다. 원래는 5분 거리에 있던 것이 새롭게 전자 카드 인식 방식으로 바뀌면서 쓰레기통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면 10분은 걸어가야 했다.  

  경비실은 불이 꺼져있었다. 경비도 벌써 숙직실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경비실 앞에 주차된 자동차의 블랙박스 불빛이 깜빡거렸다. 그것은 마치 충혈된 빨간색의 눈알처럼 흔들렸다. 수영은 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다.

  "투입하신 쓰레기의 중량은 750g입니다."

  그냥 내일 버릴걸, 괜히 이 밤중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서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구나 싶어졌다. 수영은 출입구에서 아까 담배 피우던 남자가 아직도 있을지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때였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라기 보다는 마치 아파서 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수영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공터의 구석에서 여자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내저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여자는 옆 화단의 나무에다 고개를 짓찧었다. 그 모양새가 하도 기괴해서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여자는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는 매섭게 쏘아보았다.

  "새댁, 내가 미친 사람 같지? 나도 내가 이렇게 살게 될 줄 정말 몰랐어. 새댁은 안 그럴 거 같아? 새댁이 나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어?"

  흐트러진 머리의 중년 여자는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친 년이네.'

  수영은 뭐라고 대거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여자가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급함으로 오그라붙었던 마음이 이상하게 여유로워졌다. 신경을 긁어대는 풀벌레도 눈에 보이면 가볍게 밟아 죽여줄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공터를 나오면서 수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경로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버리고 간 담배꽁초의 불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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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


-또 그 꿈이네.

  미주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잠에서 깼다. 목이 말랐다. 식탁에서 물을 마시며 시계를 보니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9월, 이제 낮은 점점 더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 것이다. 동이 트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잠깐 생각했다.

 뭔가 풀리지 않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늘 그 꿈을 꿨다. 화장실 꿈이었다. 꿈속에서 미주는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미주가 찾아다니는 화장실은 죄다 더럽고 막혀있었다. 방금 전의 꿈은 최악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대략 백 개 정도나 되는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닫기를 반복했다. 그 어디에도 깨끗한 화장실은 없었다.

-모든 게 다 걔 때문이야.

  미주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미주의 화장실 꿈은 나름의 역사가 있었다. 이것은 무려 30년 넘게 이어진 꿈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미주의 재수 시절부터였다. 의대 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부모님은 미주를 재수 학원에 밀어넣었다. 시 외곽에 있는 기숙 학원이었다. 재수 학원 근방에는 논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마치 외계 행성의 감옥처럼 보였다.

  미주는 학원 입학 시에 시험을 치룬 후, 특수반 A에 편성되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있는 반이었다. 그 아이는 일반반의 학생이었다. 155 정도의 키에, 약간 퉁퉁한 체격의 여자애는 빡빡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수반과 일반반 학생들은 서로 대화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기숙사의 방과 학급 배치, 식당의 동선도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미주가 그 빡빡머리의 여자애를 본 것은 단 한 번으로 그쳤다. 그리고 그것은 30년이 지나도록 미주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았다.

  4월, 2번째 모의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학원이 소란스러웠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1층 출입구에 보였다.

-죽으려면, 지네 집에나 가서 죽을 것이지. 재수 없게.

  1교시의 국어 선생이 찌그러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걔 맞지? 그 머리 다 밀어버린.

  미주는 뒷자리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6층 화장실에서 사고가 있었다. 그 빡빡머리 여자애가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미주가 화장실 꿈을 꾸게 된 것은. 빡빡머리의 여자애는 미주에게 화장실의 악령 같았다. 그렇다고 미주의 꿈에서 그 여자애가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그럼에도 미주에게는 그 여자애는 화장실과 단단히 결합된 불길함 그 자체였다. 미주는 화장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 여자애를 떠올리게 되었다.

-꼭 그렇게 죽었어야만 했을까...

  미주는 화장실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미주가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였고, 심연이기도 했다. 더러운 화장실의 문을 닫듯, 매번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미주의 화장실 꿈에는 어떤 죽음이 그렇게 또아리를 틀고 오래도록 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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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안녕하세요.
-아, 안녕. 12층 살지? 하도 인사를 예쁘게 해서 아줌마가 기억하고 있었어. 학교 갔다 오는 길이니?
-네.

 아이는 내 물음에 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정도나 되었을까? 이 꼬마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꼭 챙겼다. 볼 때마다 가정교육을 참 잘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근데 표정이 좀 시무룩해 보이네.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 그런 거야?
-네.

 나는 아이가 오늘 학교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와 가까운 이웃도 아니고, 거기에서 더 뭔가를 물어보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아이는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오늘 부반장 선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떨어졌어요.
-저런.

 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내,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어야 할까? 그건 뭔가 무성의한 위로처럼 여겨졌다.

-다음번에 또 도전해 보면 네가 되지 않을까?
-저 오늘, 3표를 얻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입술 가장자리를 꾹 깨물었다. 말끝이 떨리는 것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말투였다.

-3표도 많은걸. 아줌마도 학교 다닐 때 반장 선거 나갔었는데, 1표 얻었어.
-거짓말.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자그맣게 말했다.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이가 그 거짓말을 빨리 알아차리는 것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이가 보여주는 솔직함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거짓말 맞아. 아줌마는 네가 기운을 좀 냈으면 싶어서 그랬어.
-네.

 아이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도대체 엘리베이터는 왜 내려오지 않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

-너무 챙피했어요. 속상해서 눈물이 나오는데, 짝이 내 눈물을 보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지우개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지우개를 천천히 주웠겠구나.
 
 아이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층, 17층... 이 아이는 집에 가서 나에게 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꼭 끌어안아 줄 터였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그만두었다.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에도 거리를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늘 편했다. 계기판이 1층을 가리키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12층에서 아이와 작별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아이는 자신이 좀 슬픈 오늘 같은 날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챙겼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낮 동안 나는 동생들과 3군데의 납골당을 돌아다녔다. 요양병원의 의사는 낙상 사고를 당한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차로 3시간이 넘게 시 외곽을 돌았다. 피로감과 함께 허기가 몰려왔다.

-뭐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열자 지난 주말에 마트에서 세일할 때 사둔 무화과가 보였다. 나는 무화과가 든 밀폐용기를 꺼내어 식탁으로 가져갔다. 뚜껑을 열고 말랑해진 무화과를 골라내었다.

-이거하고, 이게 좋겠네.

 무화과 2개를 한꺼번에 꺼내려다 하나가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무화과는 둔탁하게 두어 번 구르더니 곧 멈췄다. 나는 무릎을 굽혀서 바닥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웠다. 문득, 12층 아이의 지우개가 보였다. 나는 아이가 지우개를 들고 얼마만큼 기다렸을까를 생각했다. 몽글몽글한 무화과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내 손안에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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