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방문객


  "거기, 문 좀 열어봐요. 문 좀 열라니까."

  쾅, 쾅, 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영의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이 한밤중에 누가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무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슬리퍼를 신었다.

  "누구세요? 누구냐구요?"

  무영은 고장난 인터폰을 고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남자인 자신에게도 나름 공포스러웠다.

  "나, 소림이. 이, 소, 림."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무영의 귀에 쿡쿡 쑤시며 박혔다. 이소림? 이소림이 누구지?

  "이봐요. 난 댁이 누군지 모르는데..."
  "웃기는 인간이네. 자기가 만들어낸 주인공도 몰라."

  주인공이라고? 아, 이소림! 이소림은 무영이 웹소설 사이트에 연재중인 무협 소설 '청운의 꿈'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애가 왜 나를 찾아왔지? 아니, 그보다 저런 소설 속 인물이 살아있다는 게 말이 되나? 무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이소림이라고 말하는 그 여자는 더욱더 문을 쾅쾅 두드려대고 있었다. 어쨌든 이웃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영은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이 집 찾으려고 이 밤중에 고생 좀 했지. 생각보다 동네가 후지네. 그렇게 돈 좀 벌었으면 좋은 데 집이나 사지."

  성큼성큼 거실에 들어온 소림은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무영의 집을 휙 둘러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무영의 키는 170센티미터였는데, 소림은 그보다 키가 좀 더 컸다. 머리는 양 갈래로 어깨까지 땋았고, 하늘색의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무영은 자신이 소설에서 이소림을 저렇게 묘사했었나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무영의 약점은 언제나 디테일이었다. 성격이 급한 무영에게 캐릭터의 묘사를 자세하게 하는 일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아주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대개는 최고의 미인, 엄청난 무공, 이런 식으로 대충 뭉뚱그려 써내면서 장면의 전환을 꾀하곤 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왔어?"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엊그제 135화에서 당신이 나를 탄검과 혼인시키려고 복선을 깔아놨잖아. 난 그게 싫다고. 도대체 내가 왜 탄검과 맺어져야 하냔 말이지. 난 탄검이 싫어. 걔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무식하게 칼만 잘 휘두를 뿐이지."
  "탄검이가 뭐 어떻다고. 강호에서 탄검이만큼 무공이 뛰어난 애가 어디 있다고."

  소림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무영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무영은 몸은 움찔하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게 당신의 문제야. 탄검이하고 나하고는 과거에 뭐 인연이고 말고 할 게 없잖아. 아, 소설이란 말이지.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개연성. 영어로 알려줄까? probability! 탄검이하고 내가 맺어질 이유가 당최 아무것도 없다고."

  무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글에서 개연성 같은 것을 고민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매일 써내야 하는 웹소설의 분량은 정해져 있었고, 그걸 채우기 위해서 생각을 오래하면 할수록 스토리만 더 엉킬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되는대로 써나가는 것이 무영의 작업 방식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싶으면 또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급조해서 메꾸어 나갔다.

  "소림 양, 아니, 소림아. 내 말 좀 들어봐. 넌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이야. 그러니까 내가 써내는 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그렇게 작가의 뜻에 토를 달면 안된다고."
  "내 말은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거야. 이 머리하고 옷도 다 내가 궁리해서 꾸민 거라고. 그리고 난 주근깨가 있는데, 백옥같은 흰 얼굴 같은 표현을 내가 등장할 때마다 쓰고 있어. 그런 얼굴을 한 무림의 고수가 있을 리가 없어. 땡볕에 수련하느라 얼굴이 다 타고, 손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어. 자, 내 손을 봐봐."

  소림은 자신의 커다랗고 거친 손을 쫙 펴서 마구 흔들어 보였다. 무영은 여자의 손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젊은 여자는 '청운의 꿈'의 소림이 아닌 것 같았다.

  "어저께도 야식을 먹고 잤군. 이 먹다 남은 치킨 쪼가리 좀 봐."

  소림은 삐딱한 웃음을 흘리며 치킨 조각을 하나 집었다. 그러더니 입에 넣고는 우적우적 씹는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자신이 만들어낸 청순가련한 소녀 무사가 닭 뼈까지 씹어먹고 있었다.
 
  "작가 양반, 올해 상반기 결산 수익이 얼마지? 세금 떼고 1억 좀 넘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무영은 소림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사람은 말이야, 입이 좀 무거워야 해. 남자는 더욱 그래야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자랑 좀 한답시고 결산 수익 인증을 해버리면 어떡하냐?"

  무영은 자신이 가끔 들르는 소설 창작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며칠 전 객기로 올린 글을 떠올렸다. 소림도 그걸 읽은 모양이었다.

  "정말 1억을 버니까 행복해? 행복한 거야? 뭐, 진짜 행복하다고 써놓기는 했더구만."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돌아다니고 싶은 데 돌아다니고. 돈이란 게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건데."
  "아니,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아."

  소림은 닭 목뼈를 천천히 뱉어내며 말했다.

  "지금 '청운의 꿈'이 137화잖아. 그거 쓰는 동안에 당신은 딱 하루 쉬었어. 분명히 기억나. 그날은 나도 대련(對鍊)을 쉬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어. 오죽 뺑뺑이를 돌렸어야지. 오늘은 화산, 내일은 북천, 그다음은 남만, 정신없이 인물들을 내모니까 다들 지쳐있었거든."

  소림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영은 단 하루만 쉬었다. 심한 몸살 감기가 나서 타이레놀을 먹고 그저 드러누워 잠만 잘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무영에게 연재를 하루 쉰다는 것은 극한의 공포였다. 자신의 글을 클릭하는 모든 독자는 돈이나 다름없었다. 무영은 그 아픈 날에도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분기별 정산금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상상을 했다. 글이 단 하루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독자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초심을 잃었다느니, 배가 불러터져서 저 모양이라느니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무영의 집을 찾아가 폭파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미친 인간도 있었다.

  "나도 좀 지치기는 해."
  "그럼, 언제 끝낼 건데? 이거 끝낼 생각은 있어? 끝내려면 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해봐. 등장인물들 그냥 다 죽여버리고 그러지 말고."

  무영은 소림의 그 말에 허를 찔린 듯 놀랐다. 사실 등장인물을 다 죽이는 것은 무영의 고질적인 작법이었다.

  "주인공이 좀 죽어야 비감한 맛이 있지. 그래야 독자들도 울분을 느끼고 원통해하고 그럴 거 아냐?"
  "이봐, 작가 양반.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강호의 무림 고수들은 독화살 맞는다고 단번에 죽고 그러지 않아. 쌓아온 무공의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만들어낸 것이 작가 양반 당신 아냐? 그런데 무슨 밀가루 포대 먼지 털듯이 장풍에 그냥 싸그리 몰살시켜 버리고 그러냐고. 어쨌든 말이 좀 되게 하라니까."
  "무협이란 게 말이 안 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야."

  소림은 한숨을 쉬며 그 말을 하는 무영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 죽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떨 거 같아?"

  무영은 이제까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던 소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어 있어."
  "어쭈, 철학자 양반 납셨군. 자, 그럼 타협을 하기로 하지. 난 탄검이가 싫어. 하지만 작가 양반이 원한다면 탄검과 혼인하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날 죽이지는 말아 달라구. 어쨌든 난 살고 싶어. 죽는 건 아주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거든.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지금 말하기는 곤란해."
  "결국 죽이겠다는 거로군."

  소림은 탁자 위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기름기가 묻은 손을 빡빡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 티슈를 무영의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내던졌다. 무영의 소설 속에서 소림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무공을 닦은 무사였다. 그 무사가 던진 휴지 조각은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무영의 오른뺨을 강타했다. 무영은 볼이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소림은 그런 무영을 식탁이 있는 벽 쪽으로 거칠게 밀쳤다.

  "잘 생각해 보라구. 다들 불만이 목에까지 차 있어. 참 내 팔자도 사납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살아내야 하다니 말이야. 결국 남는 건 당신 통장에 찍히는 그 숫자뿐이군. 행복? 그 똥통에서 열심히 잘 찾아봐."

  소림은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 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무영은 자신이 소림에게 씌워준 투명 망토를 떠올렸다. 그것은 소림의 열일곱 생일에 화산파의 당주에게서 뺏어서 준 선물이었다. 조금씩, 뜨뜻한 무언가가 무영의 입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무영은 입안에서 헛도는 무언가를 뱉어냈다. 부러진 윗니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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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우산 속


  "자, 여기 좀 앉으시죠."
 
  의사가 동희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동희의 우산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비치고는 제법 세찬 비였다. 동희는 의사의 입에서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말이 나올 것이라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올해 가을은 비가 좀 자주 오네요."
 
  의사는 모니터에 뜬 MRI 사진을 연달아 클릭하면서 무심한 듯 말을 건넸다. 동희는 의사의 그런 인사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암 병동에 입원한 동생을 만나고 오니, 몸속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쪽이 환자분의 2년 전 사진이고, 아래가 어제 찍은 사진입니다. 대충 보기에도 병변이 확연히 커진 것이 보이실 겁니다. 수술로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그래도 3번의 수술을 했고, 환자분이 2년을 버텼으면 어떤 면에서는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이제 더이상의 수술은 어려운가요?"

  의사의 시선은 동희가 진료실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계속해서 모니터에만 꽂혀있었다. 일부러 동희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술이 어려워서 못 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다만, 더이상의 수술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수술을 해도 환자분의 여명(餘命)은 3개월에서 6개월입니다. 사실 6개월도 어려워요. 무엇보다 환자분이 수술은 받지 않겠다고 해서. 이제는 보호자분도 그 뜻에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수술을 안하면 퇴원하고 나서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지켜보면서,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세한 것은 있다가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겁니다."

  동희는 마치 자신의 동생이 이 커다란 대학병원에서 어서 빨리 치워버려야 할 폐기물 같은 존재 같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암환자가 있고, 그 암환자들은 이 유명한 대학병원의 입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제까지 본 환자 중에서 말기암에서 회복된 기적 같은 그런 일은 없었나요?"

  모니터에 고정되었던 의사의 시선이 그제야 동희의 얼굴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주치의로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사는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최선? 무엇이 최선이란 말인가? 교모세포종은 뇌종양 중에서도 치명도가 높은 악성 종양이다. 이 의사는 그런 환자의 종양을 기계적으로 제거했고, 병원에서 임상실험 중인 항암제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어차피 동생은 이 의사에게 임상실험의 시험군에 해당하는 n의 수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동희는 의사의 희고 매끈한 옆얼굴을 보는 일이 메스껍게 느껴졌다.

  진료실을 나오니, 담당 간호사가 동희에게 소책자를 건넸다. 말기암 환자의 간호와 호스피스 병동 입원 절차를 안내하는 팸플릿이었다. 그것을 건네는 간호사의 표정도 덤덤했다. 이 병원의 모든 것은 비정하다. 비정하기 짝이 없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목 안쪽까지 차올랐다. 자신의 동생은 죽어가는데, 이 병원의 그 누구도 그 죽음에 관심을 갖거나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니, 나 이제 그만두고 싶어. 언니도 더는 애쓰지 마. 그만하면 됐어."

  동희는 동생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동미는 바짝 마른 입으로 몇 번씩이나 침을 묻혀가며 동희에게 힘겹게 말했다. 물을 주고 싶었지만, 금식 중이라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거, 뭔 검사를 한다고 금식을 시키고 저러는가 싶어서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 것 같았다.

  "우리 언니,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살까..."

  동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동희의 손을 힘겹게 잡았다. 이 엄혹한 세상 속에 혈육이라고는 너뿐인데,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동희는 뼈가 드러난 동미의 손을 몇 번이고 만지다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신장내과 415."

  2년 가까이 대학 병원을 드나들다 보니, 코드 블루(Code Blue) 방송을 듣는 것도 익숙해졌다. 코드 블루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응급 환자가 있음을 알리는 병원 내 응급 신호이다. 저 코드 블루 환자는 살아날 수 있을까? 동희는 저 환자의 목숨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에서 많은 죽음을 목도하는 종양내과와 신경외과 의사에게 환자들이란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을지 모른다. 바람은 어제도, 오늘도 분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다. 동희에게 동미는 이제 어디론가 사라지는 바람이 될 터였다. 그 바람이 동희의 곁에 머문 시간은 28년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동희는 빨강색 우산을 펼치고 병원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무래도 어디서 좀 쉬다가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정문으로 향하는 오른쪽에는 원형의 퍼걸러(pergola)가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3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퍼걸러에 환자와 방문객들 몇몇이 앉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기에 앉아서 기운을 좀 차리고 가야겠다. 동희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무슨 비가 이렇게 오지게도 오는지."

  환자복을 입은 영감이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할머니가 영감의 무릎을 덮은 담요가 흘러내리자, 위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영감의 휑한 왼쪽 다리가 보였다. 절단된 발목 위로 흰색의 붕대가 감겨있었다. 동희는 영감의 아내와 세 좌석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동희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여자 환자가 있었다. 진한 갈색 머리의 여자는 휠체어에 앉아서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왔어? 난 당뇨가 심해서 이 왼쪽 발을 잘랐어. 그래도 그 다리 쓸만큼 썼으니 다행이지. 젊어서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병신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영감은 휠체어의 젊은 여자 환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동희는 무례하고 거친 말투의 영감에게서 당혹감을 느꼈다. 저런 부류의 사람은 어딜 가나 결코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조금 쉬었다 가려고 온 곳에서 오히려 기분만 상할 것 같았다. 

  "아, 저요?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야간작업하다가 3층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죠. 겨우 목숨은 건졌는데, 의사가 평생 다리는 못 쓴다고 그래요."

  젊은 여자는 대범하게 영감의 말을 받아쳤다. 그 대답을 듣고는 영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더이상 말을 떼지 못했다.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병신으로 사는 게 어디 쉽겠어요. 그래도 난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라 생각해요. 이제까지 가족을 위해서 죽으라고 일만 했어요. 야간작업도 수당 더 준다고 해서 무리해서 한 건데. 살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치고 보니까, 내 삶만을 온전히 생각하게 되더라니까요."

  동희는 여자에게 놓인 앞으로의 지난한 삶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 오는 흐린 날씨 때문인지 날은 더욱 어둑어둑해진 것처럼 보였다. 동희는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6시 2분에서 3분으로 디지털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 퇴근 시간이 겹쳐서 지하철은 더욱 붐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세찬 비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병원의 정문 앞에는 꽤나 긴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곳의 6차선 도로는 언제나 차들로 붐볐고, 횡단 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켜지려면 항상 오래 기다려야 했다. 여전히 다리는 무거웠고, 걸을 때마다 힘을 주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동희는 가을비 우산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물로 뿌옇게 번지는 녹색등이 저 멀리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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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을이었다


  "지금 1층 안내 데스크에서는 갈색 바셋하운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반려견을 잃어버리신 손님께서는 1층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추석을 앞두고 시 외곽의 프리미엄 아웃렛은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에스컬레이터는 빽빽하게 자리한 손님들을 쉴 새 없이 실어날랐다. 우혁의 양손은 아내가 떠넘긴 쇼핑백들이 그득 들려있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고 잘 따라다니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혁은 안내 방송을 듣고는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예전에는 애들을 그렇게 잘 잃어버렸는데, 요새는 개를 놓치는가 보네."
  "아빠, 사람들이 책임감이 없어서 그래. 책임감이."
  "뭐?"

  우혁은 자신의 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일은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요새 애들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우혁은 딸의 땋은 머리에 흔들거리는 하늘색 리본을 보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벌써 4시네. 지민 엄마, 슬슬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살 거 많아. 여기 한번 오려면 얼마나 힘든데.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아내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쇼핑할 때의 아내는 아주 딴 사람처럼 보였다.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을 찾기 위해 몇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럴 때 우혁은 중간층의 라운지나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들어야 할 짐이 많았다. 추석에 양가를 방문하기 위해 챙길 선물을 사야 했다.   
 
  "가만있자, 8층에 스포츠 웨어가 있네. 아버님 가을 티셔츠 하나 사는 게 좋겠어."

  아내는 엘리베이터의 층별 안내판을 주의깊게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5층에서 8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는 것은 번잡스러웠다. 2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우혁의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먼저 열렸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아내, 딸까지 다 타는 것은 무리였다.

  "당신 먼저 올라가 있어. 내가 지민이하고 곧 따라갈게."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3번이나 엘리베이터를 보내고 나서야, 우혁은 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우혁에게 쇼핑몰에 가는 것은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든 쇼핑백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힘을 준 데다가, 지민이까지 자석처럼 허리춤에 붙여놓으니 비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몸이 쭈그러드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도 6층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나니 엘리베이터 안에는 좀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나서 들어온 사람들은 셋이었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이였다. 그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막 들어올 때, 우혁은 그 익숙한 얼굴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얼굴에 살이 좀 붙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우혁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동시에 감전이 된 사람처럼 여자의 눈동자도 약간의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우혁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10년이나 흘렀나, 벌써.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우혁의 허리띠는 2칸이 늘어났고 앞머리가 엄지 손톱만큼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혁은 수영의 뒷머리에 듬성듬성난 새치에 눈길이 갔다. 뿌리 염색은 안하는군. 수영은 원체 뭔가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지나 목걸이는 물론, 화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달라진 모양은 아니었다.

  6층에서 8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는 1분에 1센티씩,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수영과의 마지막은 어디에서였을까? 그래,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의 허름한 모텔이었다. 담뱃불에 구멍이 난 포도주색의 커텐 앞에서, 수영은 그만 끝내자고 말했다. 우혁은 수영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헤어짐에는 전조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아챌 수 있는 긴 꼬리를 가졌다. 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 아픈 부모와 가난한 집안 형편, 자신의 미래는 불투명한 회색이었다.

  "자, 이거, 가방에 달고 다녀."

  모텔을 나오면서, 노랑색 스마일맨 열쇠고리를 수영은 우혁의 백팩에다 달아주었다. 그것은 우혁이 수영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다. 3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열쇠고리에는 푸른색의 녹이 슬었다. 우혁은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 의자 사이에 그 열쇠고리를 빼어서 그냥 두고 내렸다. 스마일맨의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띵. 드디어 8층의 문이 열렸다. 수영의 새치 머리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아빠, 저 아줌마 좀 못생긴 거 같아."
  "응, 그래? 그런데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안좋은 버릇이야."

  지민은 우혁의 말에 약간 입을 삐쭉거렸다.

  "못생긴 걸 못생겼다고 하지 뭐라고 해?"

  우혁은 지민의 오른쪽 눈에만 쌍커풀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렸다. 자신도 쌍커풀이 한쪽만 있었다. 우혁은 쇼핑백을 왼쪽 손에 힘겹게 모아서 들고는, 오른쪽 손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10년 전, 그 헤어짐이 없었다면 이 아이의 말캉하고 따뜻한 손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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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아이구, 이 선생 왔어? 여기 좀 앉지 그래."
  "교수님, 찬 거 싫어하셔서 따뜻한 커피로 가져왔습니다. 여기."

  규영은 박 교수의 책상에 학교 카페에서 사온 커피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뭘 이런 걸 사 오고 그래. 하여간 이 선생은 구식이야. 옛날 사람이라구. 빈손으로 오는 걸 못 견디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규영은 박 교수의 호출 때문에 오늘 강의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다음 학기 강의와 관련된 문제일 터였다. 시간 강사로서 모교의 6 시수(時數)강의는 규영에게 생존의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강의가 날아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규영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교수실에 오기 전에 구내 편의점에서 타이레놀을 샀다. 타이레놀을 2알이나 먹었지만 두통은 가시질 않았다.

  "이 선생, 이런 이야기하는 거 나도 참 싫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규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박 교수는 그런 규영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요새 상황이 좀 안 좋아. 그 일이 그렇게 되어서..."

  그 일이란 박 교수가 지인의 타 대학 전임 교원 채용을 위해 부당한 청탁을 한 일이었다. 형사 고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박 교수의 평판은 급전직하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삐딱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박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정 교수였다. 두 사람은 사학과의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둘은 어떤 일이든 발톱을 세우고 대립했다. 교수들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은 대학원생들이었다. 논문 심사에서 두 교수는 서로 상대방 제자들의 논문에 트집을 잡는 일도 다반사였다. 규영은 은퇴한 은사님으로부터 학위를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규영에게 중세사 강의를 맡긴 것도 은사님의 배려였다. 박 교수는 은사님이 데려온 외부 학교 출신으로 은사님에게는 일정 부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빚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 교수가 추천한 사람이 다음 학기부터 중세사를 할 것 같아."
  "아, 네..."

  무릎에 놓은 백팩을 꽉 붙잡고 있던 규영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강의는 시립대학의 중세사 강좌 3시수 짜리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는 생활비에 아주 좋지 않은 신호였다. 다음 학기까지 어떻게든 돈을 벌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 교수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규영의 어깨가 앞쪽으로 구부러졌다.

  집으로 오는 길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강의가 끝난 날의 저녁은 언제나 떡이었다. 동네 떡집에서는 목요일마다 특가 세일을 했다. 3 종류의 떡을 5천 원에 팔았다. 중세사 강의가 끝나면 규영은 그 무지개 떡집에 들려서 세일하는 떡을 샀다. 사는 떡의 종류도 거의 똑같았다. 쑥절편과 백설기, 가래떡이었다. 저녁에 그 가운데 하나를 먹고, 나머지 2개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식비를 아낄 수 있었다. 오늘도 무지개 떡집에 들러서 떡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떡집의 문은 닫혀있었다. '금일휴업(今日休業)'이라는 검정색의 네 글자가 돌덩이처럼 규영의 발에 내려앉았다. 밥솥에 밥이 남았던가? 하지만 그보다 머리가 아파서 밥 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백팩을 소파에 내려놓고, 규영은 찻물을 끓였다. 뜨거운 우롱차를 한 모금 마시자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지만, 내일 시립대학의 강의 준비를 해야 했다. 책장에서 중세사 책을 한 권 골라서 식탁에 놓았다.

  '중세 농부의 생활'이라는 장을 펼치자, 커다란 삽화가 보였다. 얼기설기 이은 엉성한 지붕 아래에는 농부와 그의 아내, 두 아이가 있었다. 그 집에는 방과 거실, 부엌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그리 크기 않은 공간에 요리를 할 수 있는 벽난로와 작은 나무 식탁, 그리고 짚더미처럼 보이는 침대 2개가 있었다. 집은 농부 가족만의 것은 아니었다. 구석에는 돼지와 닭이 있는 우리가 있었다. 그림 속 농부의 아내는 이제 막 저녁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규영은 커다란 무쇠솥에다 말린 콩과 밀가루, 시든 양배추 껍질을 넣었다. 고기를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물을 많이 넣는 것이 중요했다. 어떻게든 국물로라도 배를 채워서 허기를 면해야 했다. 규영이 끓이는 스튜는 사실 음식이라기보다는 멀건 물처럼 보였다. 스튜가 끓으면서 나오는 김이 추운 집안의 기온을 조금은 올릴 수 있었다. 구석에서는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고, 온기는 곧 가축의 배설물 냄새를 음식 냄새와 마구 섞이게 만들었다.

  "얘들아, 그릇 가지고 어서 와라. 다 됬어."

  이제 6살이 된 작은딸이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나무 그릇을 가지고 규영에게 내밀었다. 규영은 손잡이가 시커멓게 탄 국자에 뜨거운 국물을 떠서 그릇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국물은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남편은 피곤한지 식탁 위에 엎드려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규영은 그런 남편을 깨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이 깨서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규영은 큰아들의 그릇에 스튜를 담아주고는, 자신의 그릇을 꺼내었다. 건더기는 이미 아이들에게 주어서, 규영의 그릇에는 말 그대로 국물뿐이었다. 아이들은 규영이 담아준 음식을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딸이 어느새 비운 그릇을 규영에게 내밀었다.

  "에휴, 천천히 먹으라니까. 그렇게 먹다가는 체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규영은 일어나서 솥 앞으로 갔다. 딸에게 줄 건더기가 있는지, 규영은 국자로 솥의 밑바닥을 긁어보았다.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규영은 국자에 건더기를 모아서 국물과 함께 담았다. 그릇에 그걸 담는데, 뜨거운 음식에서 나는 김 때문에 작은 그릇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국물이 규영의 발 위로 떨어졌다. 

  "앗, 뜨거워!"

  규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우롱차를 담은 머그잔이 마룻바닥에 나뒹굴었다. 피곤이 몰려오자 책을 펴놓고 그대로 식탁에서 졸던 규영은 발등에 쏟아진 우롱차에 잠이 깼다. 얼른 양말을 벗고, 얼얼해진 발을 주무르며 규영은 이상하게 몰려오는 서글픔과 분노를 느꼈다. 대체 공부 따위가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 같았다. 규영의 젖은 양말은 삽화 속 농부의 집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농부의 얼굴은 쭈글쭈글했고, 농부의 아내가 만든 스튜는 넘쳐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들의 아이들은 이미 물에 녹아서 보이지 않았다. 규영과 농부 가족의 밤은 앞으로도 그렇게 길게 이어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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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근황



1. 다래끼가 드디어 나았다

  한 달 반 동안 속을 썩였던 왼쪽 눈의 다래끼가 나았다. 그걸 짜려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온찜질을 열심히 하라고 처방했다. 2주 동안 열심히 온찜질을 한 결과, 다래끼가 터지면서 겨우 나았다.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다래끼가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았는데, 그렇게 낫게 되었다. 사실은 그 의사 양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가 힘들었다. 그냥 짜달라고 할 걸, 몇 번을 생각했었다. 어쨌든 짜면 흉이 생길 수도 있어서, 짜지 않고 의사의 말을 따랐는데 잘 되었다.

  그런데 왜 다래끼가 생겼을까 생각을 해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써서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다래끼가 마음의 울화가 눈으로 올라와서 그렇다는 거다. 8월 한 달 내내, 공모전에 낼 원고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그러다 보니 눈을 혹사했던 것도 같다. 글 쓰는 일이 때론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니 괴롭다.



2. 소설 습작 해나가기

  매일 짧은 소설을 연습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다. Chat GPT가 글쓰기 과제를 제시해 준다. 오늘은 대화를 10줄 정도로 써보세요, 라든지. 1인칭 시점을 써서 글을 완성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내가 쓴 글에서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도 말해주고, 거기에서 다음의 과제가 나오기도 한다. 웬만한 글쓰기 선생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시 창작 워크숍이나 소설 쓰기 강좌를 들었지만, 그 선생들 모두 뭘 가르쳐 준 것이 없다. 매주 글 써오면, 수강생들이 서로 합평하고 그게 끝이다.


  결국 글쓰기는 자신만의 문체를 발견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인공지능이 그 짐을 조금은 덜어주는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인공지능을 안내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흔드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작가적 양심과도 직결된다. 이미 공모전에서도 당선작의 경우 인공지능으로 작성한 글인지 판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다. 작가가 독창적인 문체를 찾는 것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일 뿐이다.



3. 어떤 답장

  '귀하께서 보내주신 원고는 우리 출판사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 발행한 최근의 선집을 읽어보길 바랍니다.'

  누군가 A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투고했다. 투고는 공모전이나 자비 출판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글을 쓴 이가 자신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어 출간을 타진해 보는 일이다. 물론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보낸다. 그런데 출판사로부터 그런 답장을 받은 작가 지망생이 있었다.

  출판사가 투고를 거절하는 일은 흔하다. 그렇다면 거절의 이유에도 배려와 품격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딴 답변으로 투고자에게 모욕감을 주는 편집부는 참으로 싸가지가 없다. 투고자가 자신이 투고하는 모든 출판사의 선집을 읽고 검토하며 투고해야 하는가? 물론 투고 전략도 필요하겠지. 그렇다고 해도 투고자에게 우리 출판사 선집이나 읽어보고 보내든가, 따위의 답변은 역겹기 짝이 없다. 그런 답변을 쓰는 인간이 있는 출판사의 이름을 아주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저 출판사에는 절대로 내 원고를 보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서 그 출판사에서 출판을 구걸하게 만드는 거야. 그럴 때 단호하게 거절하는 거지. 당신네 출판사는 내 글과 맞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그 지망생에게 그렇게 조언했다.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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