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약(眼藥)


누런색의 안약을 넣는다
이 안약을 넣으면 눈에서 눈물이 난다
눈은 매일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다
돈에 환장한 의사가 처방한 일용할 안약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눈에 넣고
눈이 멀기를 기다린다

눈이 멀어지면
누런 양말의 흰색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흰색은 처음부터 가짜였고
전과 32범 사기꾼의 양말처럼
뒤꿈치에는 회색의 침이 늘 고여있다

어차피 당신의 눈은 멀어질 거란 말입니다

의사의 호통에 나는 아픈 눈을 찡긋하며 웃는다
외눈박이 의사는 무례를 꿀꺽 삼키고는
피 냄새 나는 안약을 처방한다

이번 안약은 붉은색이다

돈이 있었다면 한쪽 눈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남은 생애 동안 맹인으로 살아갈 밖에
당신처럼 외눈박이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두 눈이 다 멀어버리는 게 낫지

눈에서 피가 똑똑 떨어진다
손가락에 피를 묻혀서 시를 쓴다
자정(子正)의 바람이 시를 천천히 말려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걸 찍어야지,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나는 죽음은 아름답지 못하므로
상괭이의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는 더러운 소문
마침내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터뷰(interview)


너의 인터뷰를 읽는다

그러니까, 문학은 내 운명인 거죠

운명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 마라
나이 먹어서 자아실현 못한 것들이
꼭 그런 말 쓰더라
시간은 남아돌고 할 일은 없고
이름은 돋보이고 싶고
문화센터 대학원 들쑤시며 다니다가
글이나 끄적거리는 거지

콜센터 알바나 요양보호사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가

너, 두 가지 다 안 해 봤다는 거네
쌍욕 먹어가며 하는 콜센터 알바가 어떤지
치매 노인 뒤치다꺼리가 얼마나 힘든지
너는 네 손톱의 거스러미만큼도 알지 못해

시는 연필로 꾹꾹 눌러서 씁니다
그래야 진짜 같아서요

기름 줄줄 흐르는 마호가니 책상에
iMac 하나 올려놓고 쓰면서 무슨 연필 타령이냐
거짓말의 클리셰(cliché)가
대상포진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너의 인터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악덕(惡德)


커다란 곰 인형이 이 더운 대낮에
누런 배때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물크러진 코에서는 회색 콧물이 줄줄
튿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바늘이 한 움큼
찢어진 분홍 리본을 목에 칭칭 두르고
그냥 죽어버릴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자
바늘이 사람들의 눈을 찔러대어서
비명소리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의류수거업자도 내팽개쳐 버린 곰 인형은
모리타니의 해변에 닿지 못한다
곰 인형을 버린 주인의 악덕은 그런 것이다

당신이 화장실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우리집 천식 환자를 더 병들게 하고 있소
그런 악덕을 쌓지 말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시오

나는 위층과 아래층 승강기 옆에다
반창고로 종이를 붙여놓았다
그 순간, 갑자기 기침이 쏟아지면서
천식 환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교양(敎養)


아침 6시, 여자는 놀이터에 개를 풀어놓는다
종잇장 같은 하얀 강아지가 드러눕고
여자가 우라지게도 짖는다

위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떨어지므로
나는 늘 투구를 쓰고 다닌다
가끔 아파트의 하수구가 막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양 없는 까마귀가 죽었기 때문이다

찻물을 끓이려고 수돗물을 받다가
상어의 이빨 하나를 발견한다
아파트의 저수조에는 30년째 상어가 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그 상어는 교양을 씹어먹다가
이빨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있어서
상어의 이빨을 주워다가 대충 끼워 넣는다

싸구려 홍차를 마시면서
푸른 벽돌의 시집을 펼친다
이런 벽돌로 된 집을 지어야지
교양을 꽉꽉 채워 넣은 반듯한 나의 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