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방문객
"거기, 문 좀 열어봐요. 문 좀 열라니까."
쾅, 쾅, 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영의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이 한밤중에 누가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무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슬리퍼를 신었다.
"누구세요? 누구냐구요?"
무영은 고장난 인터폰을 고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남자인 자신에게도 나름 공포스러웠다.
"나, 소림이. 이, 소, 림."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무영의 귀에 쿡쿡 쑤시며 박혔다. 이소림? 이소림이 누구지?
"이봐요. 난 댁이 누군지 모르는데..."
"웃기는 인간이네. 자기가 만들어낸 주인공도 몰라."
주인공이라고? 아, 이소림! 이소림은 무영이 웹소설 사이트에 연재중인 무협 소설 '청운의 꿈'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애가 왜 나를 찾아왔지? 아니, 그보다 저런 소설 속 인물이 살아있다는 게 말이 되나? 무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이소림이라고 말하는 그 여자는 더욱더 문을 쾅쾅 두드려대고 있었다. 어쨌든 이웃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영은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이 집 찾으려고 이 밤중에 고생 좀 했지. 생각보다 동네가 후지네. 그렇게 돈 좀 벌었으면 좋은 데 집이나 사지."
성큼성큼 거실에 들어온 소림은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무영의 집을 휙 둘러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무영의 키는 170센티미터였는데, 소림은 그보다 키가 좀 더 컸다. 머리는 양 갈래로 어깨까지 땋았고, 하늘색의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무영은 자신이 소설에서 이소림을 저렇게 묘사했었나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무영의 약점은 언제나 디테일이었다. 성격이 급한 무영에게 캐릭터의 묘사를 자세하게 하는 일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아주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대개는 최고의 미인, 엄청난 무공, 이런 식으로 대충 뭉뚱그려 써내면서 장면의 전환을 꾀하곤 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왔어?"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엊그제 135화에서 당신이 나를 탄검과 혼인시키려고 복선을 깔아놨잖아. 난 그게 싫다고. 도대체 내가 왜 탄검과 맺어져야 하냔 말이지. 난 탄검이 싫어. 걔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무식하게 칼만 잘 휘두를 뿐이지."
"탄검이가 뭐 어떻다고. 강호에서 탄검이만큼 무공이 뛰어난 애가 어디 있다고."
소림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무영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무영은 몸은 움찔하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게 당신의 문제야. 탄검이하고 나하고는 과거에 뭐 인연이고 말고 할 게 없잖아. 아, 소설이란 말이지.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개연성. 영어로 알려줄까? probability! 탄검이하고 내가 맺어질 이유가 당최 아무것도 없다고."
무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글에서 개연성 같은 것을 고민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매일 써내야 하는 웹소설의 분량은 정해져 있었고, 그걸 채우기 위해서 생각을 오래하면 할수록 스토리만 더 엉킬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되는대로 써나가는 것이 무영의 작업 방식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싶으면 또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급조해서 메꾸어 나갔다.
"소림 양, 아니, 소림아. 내 말 좀 들어봐. 넌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이야. 그러니까 내가 써내는 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그렇게 작가의 뜻에 토를 달면 안된다고."
"내 말은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거야. 이 머리하고 옷도 다 내가 궁리해서 꾸민 거라고. 그리고 난 주근깨가 있는데, 백옥같은 흰 얼굴 같은 표현을 내가 등장할 때마다 쓰고 있어. 그런 얼굴을 한 무림의 고수가 있을 리가 없어. 땡볕에 수련하느라 얼굴이 다 타고, 손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어. 자, 내 손을 봐봐."
소림은 자신의 커다랗고 거친 손을 쫙 펴서 마구 흔들어 보였다. 무영은 여자의 손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젊은 여자는 '청운의 꿈'의 소림이 아닌 것 같았다.
"어저께도 야식을 먹고 잤군. 이 먹다 남은 치킨 쪼가리 좀 봐."
소림은 삐딱한 웃음을 흘리며 치킨 조각을 하나 집었다. 그러더니 입에 넣고는 우적우적 씹는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자신이 만들어낸 청순가련한 소녀 무사가 닭 뼈까지 씹어먹고 있었다.
"작가 양반, 올해 상반기 결산 수익이 얼마지? 세금 떼고 1억 좀 넘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무영은 소림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사람은 말이야, 입이 좀 무거워야 해. 남자는 더욱 그래야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자랑 좀 한답시고 결산 수익 인증을 해버리면 어떡하냐?"
무영은 자신이 가끔 들르는 소설 창작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며칠 전 객기로 올린 글을 떠올렸다. 소림도 그걸 읽은 모양이었다.
"정말 1억을 버니까 행복해? 행복한 거야? 뭐, 진짜 행복하다고 써놓기는 했더구만."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돌아다니고 싶은 데 돌아다니고. 돈이란 게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건데."
"아니,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아."
소림은 닭 목뼈를 천천히 뱉어내며 말했다.
"지금 '청운의 꿈'이 137화잖아. 그거 쓰는 동안에 당신은 딱 하루 쉬었어. 분명히 기억나. 그날은 나도 대련(對鍊)을 쉬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어. 오죽 뺑뺑이를 돌렸어야지. 오늘은 화산, 내일은 북천, 그다음은 남만, 정신없이 인물들을 내모니까 다들 지쳐있었거든."
소림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영은 단 하루만 쉬었다. 심한 몸살 감기가 나서 타이레놀을 먹고 그저 드러누워 잠만 잘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무영에게 연재를 하루 쉰다는 것은 극한의 공포였다. 자신의 글을 클릭하는 모든 독자는 돈이나 다름없었다. 무영은 그 아픈 날에도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분기별 정산금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상상을 했다. 글이 단 하루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독자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초심을 잃었다느니, 배가 불러터져서 저 모양이라느니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무영의 집을 찾아가 폭파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미친 인간도 있었다.
"나도 좀 지치기는 해."
"그럼, 언제 끝낼 건데? 이거 끝낼 생각은 있어? 끝내려면 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해봐. 등장인물들 그냥 다 죽여버리고 그러지 말고."
무영은 소림의 그 말에 허를 찔린 듯 놀랐다. 사실 등장인물을 다 죽이는 것은 무영의 고질적인 작법이었다.
"주인공이 좀 죽어야 비감한 맛이 있지. 그래야 독자들도 울분을 느끼고 원통해하고 그럴 거 아냐?"
"이봐, 작가 양반.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강호의 무림 고수들은 독화살 맞는다고 단번에 죽고 그러지 않아. 쌓아온 무공의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만들어낸 것이 작가 양반 당신 아냐? 그런데 무슨 밀가루 포대 먼지 털듯이 장풍에 그냥 싸그리 몰살시켜 버리고 그러냐고. 어쨌든 말이 좀 되게 하라니까."
"무협이란 게 말이 안 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야."
소림은 한숨을 쉬며 그 말을 하는 무영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 죽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떨 거 같아?"
무영은 이제까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던 소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어 있어."
"어쭈, 철학자 양반 납셨군. 자, 그럼 타협을 하기로 하지. 난 탄검이가 싫어. 하지만 작가 양반이 원한다면 탄검과 혼인하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날 죽이지는 말아 달라구. 어쨌든 난 살고 싶어. 죽는 건 아주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거든.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지금 말하기는 곤란해."
"결국 죽이겠다는 거로군."
소림은 탁자 위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기름기가 묻은 손을 빡빡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 티슈를 무영의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내던졌다. 무영의 소설 속에서 소림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무공을 닦은 무사였다. 그 무사가 던진 휴지 조각은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무영의 오른뺨을 강타했다. 무영은 볼이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소림은 그런 무영을 식탁이 있는 벽 쪽으로 거칠게 밀쳤다.
"잘 생각해 보라구. 다들 불만이 목에까지 차 있어. 참 내 팔자도 사납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살아내야 하다니 말이야. 결국 남는 건 당신 통장에 찍히는 그 숫자뿐이군. 행복? 그 똥통에서 열심히 잘 찾아봐."
소림은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 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무영은 자신이 소림에게 씌워준 투명 망토를 떠올렸다. 그것은 소림의 열일곱 생일에 화산파의 당주에게서 뺏어서 준 선물이었다. 조금씩, 뜨뜻한 무언가가 무영의 입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무영은 입안에서 헛도는 무언가를 뱉어냈다. 부러진 윗니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