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가을이었다
"지금 1층 안내 데스크에서는 갈색 바셋하운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반려견을 잃어버리신 손님께서는 1층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추석을 앞두고 시 외곽의 프리미엄 아웃렛은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에스컬레이터는 빽빽하게 자리한 손님들을 쉴 새 없이 실어날랐다. 우혁의 양손은 아내가 떠넘긴 쇼핑백들이 그득 들려있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고 잘 따라다니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혁은 안내 방송을 듣고는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예전에는 애들을 그렇게 잘 잃어버렸는데, 요새는 개를 놓치는가 보네."
"아빠, 사람들이 책임감이 없어서 그래. 책임감이."
"뭐?"
우혁은 자신의 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일은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요새 애들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우혁은 딸의 땋은 머리에 흔들거리는 하늘색 리본을 보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벌써 4시네. 지민 엄마, 슬슬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살 거 많아. 여기 한번 오려면 얼마나 힘든데.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아내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쇼핑할 때의 아내는 아주 딴 사람처럼 보였다.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을 찾기 위해 몇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럴 때 우혁은 중간층의 라운지나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들어야 할 짐이 많았다. 추석에 양가를 방문하기 위해 챙길 선물을 사야 했다.
"가만있자, 8층에 스포츠 웨어가 있네. 아버님 가을 티셔츠 하나 사는 게 좋겠어."
아내는 엘리베이터의 층별 안내판을 주의깊게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5층에서 8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는 것은 번잡스러웠다. 2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우혁의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먼저 열렸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아내, 딸까지 다 타는 것은 무리였다.
"당신 먼저 올라가 있어. 내가 지민이하고 곧 따라갈게."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3번이나 엘리베이터를 보내고 나서야, 우혁은 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우혁에게 쇼핑몰에 가는 것은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든 쇼핑백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힘을 준 데다가, 지민이까지 자석처럼 허리춤에 붙여놓으니 비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몸이 쭈그러드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도 6층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나니 엘리베이터 안에는 좀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나서 들어온 사람들은 셋이었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이였다. 그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막 들어올 때, 우혁은 그 익숙한 얼굴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얼굴에 살이 좀 붙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우혁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동시에 감전이 된 사람처럼 여자의 눈동자도 약간의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우혁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10년이나 흘렀나, 벌써.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우혁의 허리띠는 2칸이 늘어났고 앞머리가 엄지 손톱만큼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혁은 수영의 뒷머리에 듬성듬성난 새치에 눈길이 갔다. 뿌리 염색은 안하는군. 수영은 원체 뭔가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지나 목걸이는 물론, 화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달라진 모양은 아니었다.
6층에서 8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는 1분에 1센티씩,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수영과의 마지막은 어디에서였을까? 그래,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의 허름한 모텔이었다. 담뱃불에 구멍이 난 포도주색의 커텐 앞에서, 수영은 그만 끝내자고 말했다. 우혁은 수영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헤어짐에는 전조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아챌 수 있는 긴 꼬리를 가졌다. 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 아픈 부모와 가난한 집안 형편, 자신의 미래는 불투명한 회색이었다.
"자, 이거, 가방에 달고 다녀."
모텔을 나오면서, 노랑색 스마일맨 열쇠고리를 수영은 우혁의 백팩에다 달아주었다. 그것은 우혁이 수영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다. 3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열쇠고리에는 푸른색의 녹이 슬었다. 우혁은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 의자 사이에 그 열쇠고리를 빼어서 그냥 두고 내렸다. 스마일맨의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띵. 드디어 8층의 문이 열렸다. 수영의 새치 머리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아빠, 저 아줌마 좀 못생긴 거 같아."
"응, 그래? 그런데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안좋은 버릇이야."
지민은 우혁의 말에 약간 입을 삐쭉거렸다.
"못생긴 걸 못생겼다고 하지 뭐라고 해?"
우혁은 지민의 오른쪽 눈에만 쌍커풀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렸다. 자신도 쌍커풀이 한쪽만 있었다. 우혁은 쇼핑백을 왼쪽 손에 힘겹게 모아서 들고는, 오른쪽 손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10년 전, 그 헤어짐이 없었다면 이 아이의 말캉하고 따뜻한 손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