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우산 속


  "자, 여기 좀 앉으시죠."
 
  의사가 동희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동희의 우산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비치고는 제법 세찬 비였다. 동희는 의사의 입에서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말이 나올 것이라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올해 가을은 비가 좀 자주 오네요."
 
  의사는 모니터에 뜬 MRI 사진을 연달아 클릭하면서 무심한 듯 말을 건넸다. 동희는 의사의 그런 인사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암 병동에 입원한 동생을 만나고 오니, 몸속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쪽이 환자분의 2년 전 사진이고, 아래가 어제 찍은 사진입니다. 대충 보기에도 병변이 확연히 커진 것이 보이실 겁니다. 수술로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그래도 3번의 수술을 했고, 환자분이 2년을 버텼으면 어떤 면에서는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이제 더이상의 수술은 어려운가요?"

  의사의 시선은 동희가 진료실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계속해서 모니터에만 꽂혀있었다. 일부러 동희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술이 어려워서 못 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다만, 더이상의 수술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수술을 해도 환자분의 여명(餘命)은 3개월에서 6개월입니다. 사실 6개월도 어려워요. 무엇보다 환자분이 수술은 받지 않겠다고 해서. 이제는 보호자분도 그 뜻에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수술을 안하면 퇴원하고 나서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지켜보면서,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세한 것은 있다가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겁니다."

  동희는 마치 자신의 동생이 이 커다란 대학병원에서 어서 빨리 치워버려야 할 폐기물 같은 존재 같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암환자가 있고, 그 암환자들은 이 유명한 대학병원의 입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제까지 본 환자 중에서 말기암에서 회복된 기적 같은 그런 일은 없었나요?"

  모니터에 고정되었던 의사의 시선이 그제야 동희의 얼굴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주치의로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사는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최선? 무엇이 최선이란 말인가? 교모세포종은 뇌종양 중에서도 치명도가 높은 악성 종양이다. 이 의사는 그런 환자의 종양을 기계적으로 제거했고, 병원에서 임상실험 중인 항암제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어차피 동생은 이 의사에게 임상실험의 시험군에 해당하는 n의 수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동희는 의사의 희고 매끈한 옆얼굴을 보는 일이 메스껍게 느껴졌다.

  진료실을 나오니, 담당 간호사가 동희에게 소책자를 건넸다. 말기암 환자의 간호와 호스피스 병동 입원 절차를 안내하는 팸플릿이었다. 그것을 건네는 간호사의 표정도 덤덤했다. 이 병원의 모든 것은 비정하다. 비정하기 짝이 없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목 안쪽까지 차올랐다. 자신의 동생은 죽어가는데, 이 병원의 그 누구도 그 죽음에 관심을 갖거나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니, 나 이제 그만두고 싶어. 언니도 더는 애쓰지 마. 그만하면 됐어."

  동희는 동생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동미는 바짝 마른 입으로 몇 번씩이나 침을 묻혀가며 동희에게 힘겹게 말했다. 물을 주고 싶었지만, 금식 중이라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거, 뭔 검사를 한다고 금식을 시키고 저러는가 싶어서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 것 같았다.

  "우리 언니,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살까..."

  동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동희의 손을 힘겹게 잡았다. 이 엄혹한 세상 속에 혈육이라고는 너뿐인데,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동희는 뼈가 드러난 동미의 손을 몇 번이고 만지다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신장내과 415."

  2년 가까이 대학 병원을 드나들다 보니, 코드 블루(Code Blue) 방송을 듣는 것도 익숙해졌다. 코드 블루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응급 환자가 있음을 알리는 병원 내 응급 신호이다. 저 코드 블루 환자는 살아날 수 있을까? 동희는 저 환자의 목숨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에서 많은 죽음을 목도하는 종양내과와 신경외과 의사에게 환자들이란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을지 모른다. 바람은 어제도, 오늘도 분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다. 동희에게 동미는 이제 어디론가 사라지는 바람이 될 터였다. 그 바람이 동희의 곁에 머문 시간은 28년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동희는 빨강색 우산을 펼치고 병원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무래도 어디서 좀 쉬다가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정문으로 향하는 오른쪽에는 원형의 퍼걸러(pergola)가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3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퍼걸러에 환자와 방문객들 몇몇이 앉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기에 앉아서 기운을 좀 차리고 가야겠다. 동희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무슨 비가 이렇게 오지게도 오는지."

  환자복을 입은 영감이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할머니가 영감의 무릎을 덮은 담요가 흘러내리자, 위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영감의 휑한 왼쪽 다리가 보였다. 절단된 발목 위로 흰색의 붕대가 감겨있었다. 동희는 영감의 아내와 세 좌석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동희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여자 환자가 있었다. 진한 갈색 머리의 여자는 휠체어에 앉아서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왔어? 난 당뇨가 심해서 이 왼쪽 발을 잘랐어. 그래도 그 다리 쓸만큼 썼으니 다행이지. 젊어서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병신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영감은 휠체어의 젊은 여자 환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동희는 무례하고 거친 말투의 영감에게서 당혹감을 느꼈다. 저런 부류의 사람은 어딜 가나 결코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조금 쉬었다 가려고 온 곳에서 오히려 기분만 상할 것 같았다. 

  "아, 저요?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야간작업하다가 3층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죠. 겨우 목숨은 건졌는데, 의사가 평생 다리는 못 쓴다고 그래요."

  젊은 여자는 대범하게 영감의 말을 받아쳤다. 그 대답을 듣고는 영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더이상 말을 떼지 못했다.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병신으로 사는 게 어디 쉽겠어요. 그래도 난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라 생각해요. 이제까지 가족을 위해서 죽으라고 일만 했어요. 야간작업도 수당 더 준다고 해서 무리해서 한 건데. 살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치고 보니까, 내 삶만을 온전히 생각하게 되더라니까요."

  동희는 여자에게 놓인 앞으로의 지난한 삶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 오는 흐린 날씨 때문인지 날은 더욱 어둑어둑해진 것처럼 보였다. 동희는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6시 2분에서 3분으로 디지털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 퇴근 시간이 겹쳐서 지하철은 더욱 붐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세찬 비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병원의 정문 앞에는 꽤나 긴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곳의 6차선 도로는 언제나 차들로 붐볐고, 횡단 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켜지려면 항상 오래 기다려야 했다. 여전히 다리는 무거웠고, 걸을 때마다 힘을 주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동희는 가을비 우산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물로 뿌옇게 번지는 녹색등이 저 멀리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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