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골당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그렇게 일찍 갈 게 뭐냐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남자는 납골당에 들어서자마자 처절하고 격렬한
울음을 쏟아내었다 나는 남자가 편하게 울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 5분 만에 울음을
그치고 편안해진 얼굴로 납골당을 떠났다 아마도
그의 눈물이 짜디짜질 때쯤,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스물셋 나이의 아가씨는 엄마와 함께 그곳에 잠들어 있다
엄마가 먼저 떠난 길을 한 달 후에 딸이 따라갔다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잘 지내렴
나는 위패(位牌)에 적힌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이제 홀로 남은 그가 잘 살아주길 바라면서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는 소설을 하나 쓰고 싶어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영화를 한 편 찍고 싶었지만 여적지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를 생각한다 어떤 인생의 이야기는
속으로 삼켜질 뿐이고 옷장 속에서 미소를 짓는 해골처럼
나는 옷장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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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선(扁桃腺)


만성 편도선염, 입니다
일단 항생제를 좀 드리죠
낫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고
편도선을 잘라내면 됩니다 그런데
나이들어서 그런 수술 하는 거,
쉽지는 않겠죠

환자 말 잘라먹기
심기 마구 긁어놓기
무례함으로 번들거리는
재수없는 저 상판대기
그래봤자 목구멍 전문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차가운 진찰실을 나오면서
너 같은 인간이 잘라내었을
무수한 편도선의 울음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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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여자


다섯 명의 여자가 지나갑니다
수인(囚人)처럼 줄줄이 하지만,
손은 묶여있지 않아요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어두워서 얼굴을 볼 수는 없어요
먹빛으로 떨어지는 슬픔의 죄

아주 오랫동안 꿈을 기록하고 연구했어요
아, 꿈 같은 거 믿지 않으신다구요?
그렇군요, 예전에 나도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게 한 번 두 번 뭔가 맞아떨어지면
믿음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오래된 미래의 목소리
나보다 먼저 미래를 살아본 이가 알려주는
뭐, 그렇다고 예정된 불운을 막아낼 수는 없죠
끈적거리는 모래바람처럼
눈꺼풀을 닫고, 입술을 뜯어내며,
아픈 부스럼을 퍼뜨리며

나는 네 귀퉁이가 닳아버린, 두꺼운 꿈의 공책에
다섯 명의 여자를 천천히, 언제나 만년필로
목소리가 그물을 가만히 찢고
자신의 입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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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


내가 하나 알려드리죠
사람의 눈은 말입니다
안쪽이 막혀있어요
아주 촘촘한 그물
그래서 눈에 뭐가 들어가도
다 거기에 걸려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눈썹 같은 거
돌고 돌아서 다 나오게
아, 우리의 조물주는 눈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새벽에 내 눈에 들어간 눈썹 따위
하루 이틀? 아니면 일주일? 그것도
아니면 한 달? 어쨌든 돌아올 테지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
목이 부러진, 오래된 선풍기
이가 나가버린, 아끼는 찻잔
푹 꺼져버린 인생 슬리퍼
그리고, 너의 이름
수줍게 웃던 때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났다

따끔, 눈썹이 돌아오려는 것이다
덜덜덜, 올여름을 끝으로 내버려질
선풍기가 아프게 우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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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解釋)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
너의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온
세균 같은 단어들, 자꾸 몸뚱이를
새로 불리면서 무수한 막대기들이

가끔, 네가 맨정신으로 쓴 것인가
혼자, 생각을 해보곤 하지
짹짹거리는 소리
뒤틀린 너의 말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딸꾹질이 멈추질 않아

정규분포곡선의 아주 가장자리
주변부의 삶은 비좁게 닫혀있지
손바닥만 한 작은 창으로 보는
겨울 봄 여름 가을의 전부

더이상 읽지 않겠어
차라리, 나의 창문을 부수겠어
절벽 앞으로 곧장 달려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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