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늘


-어서 오세요. 아니, 이게 누구야? 웬일로 여길?
-너 일 잘하나 감시하려고.

 민우는 진호가 눙치며 답하는 것을 보고는 웃었다. 자정이 좀 넘은 시각이었다.

-커피 줄까? 내가 살게.
-야, 그만둬. 내가 알바생 커피 한잔 사줄 돈은 있다고.

 진호는 냉장고에서 캔 커피 2개를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창가 옆의 간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놓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까지 회사에서 일한 거야?
-응. 국제 도서전 행사가 있어. 그거 준비하느라.
-인턴이라 그냥 마구 굴리는 모양이군.
-그런 셈이지. 공인된 회사 노비 같은 느낌.

 민우는 살짝 졸음이 오려던 참에 이렇게 찾아온 진호가 반갑고 고마웠다.

-복학은 언제 할 거야?
-글쎄. 좀 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학비는 학자금 대출 땡겨. 졸업을 빨리해서 취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취직이라...
 
 민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 그럼 글을 계속 쓸 생각이냐?
-글은 써야지. 어쨌든
-그렇다면 더더욱 학교로 돌아와야지. 등단을 빨리 하는 게 상책이야. 문창과 좋은 게 뭐냐. 등단 제조기 아니냐. 애들하고 부대끼면 뭐라도 써내게 되잖아.
-그야 그렇지. 넌 등단했으니까 좋겠다. 나도 지방신문이나 독립 문예지 어떻게 파볼까?
-야, 그런 거면 관둬. 지방신문 등단은 내놓은 자식 취급이야. 너도 잘 알잖아. 이건 골품제보다 더해. 성골 진골 나누듯 메이저 마이너 선 긋고, 마이너는 대놓고 무시하는 거. 할려면 한 방에 메이저로 가라고.
-그게 쉬운 것도 아니고...

  진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넌 그게 문제야.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복학을 또 늦추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금 우리 동기 가운데 학교에 남은 사람 수진이 뿐이야. 걔는 부모 돈으로 놀러 다니느라 그런 거고. 다들 진작에 졸업해서 어떻게든 그냥 비비고 사는데.
-그건 그래.

  민우는 진호가 후벼파내는 자신의 현실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넌 글을 안 쓸 생각이야?
-확실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지. 회사 적응하는 게 최선이야. 출판 시장 돌아가는 거 보면서 어떤 글 쓸지 생각하려고. 목표가 생겼어. 내가 보니까 출판사 편집장이 괜찮아 보여. 적당히 좋은 권력이라고나 할까. 여기 들어왔으니 한번 해볼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진호는 민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이 민우를 좀 몰아붙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손님 없을 때, 신간이라도 좀 읽으라고 챙겨왔어. 요새는 이런 감성 충만한 글이 먹혀. 낯 간지럽기 짝이 없지. 너도 유행을 따라가봐.
 
  진호는 서류 가방에서 책을 주섬주섬 꺼냈다. 책을 민우에게 건네주고는,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간다. 얼굴 좀 펴고. 난 자식도 없는데, 이상하게 네가 자식 같다. 그것도 아픈 자식. 걱정이 되.

  민우는 진호가 나간 편의점 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졸음은 진작에 달아나 버렸다. 편의점의 닫힌 문은 감옥의 창살처럼 보였다. 이번 달 월급은 부모님의 통장으로 가버렸다. 아버지의 항암 치료는 17차로 접어들었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민우는 눈꺼풀을 세게 비비며 쓸어내렸다. 회색의 더러운 비늘이 나방처럼 포스기 위를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듯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 1시의 키티짱


-어서 오세요.

-늘 사는 거. 알지?

-에쎄 멘솔, 레쓰비 마일드 캔, 하나씩. 이렇게 드리면 될까요?

-아냐, 잠깐만.

  남자는 편의점 안을 잠깐 둘러보더니, 고양이 간식 캔 하나를 들고 왔다.

-학생, 이것도. 그런데 오늘은 키티짱 안 보이네. 이때쯤이면 문 앞에서 졸고 있던데.

-사장님이 싫어하세요. 매장 위생 문제도 있고. 보면 내쫓으라고 당부하는 걸요.

-그렇군. 고양이가 좀 골치 아플 때도 있어.

  포스기에서 띡, 띡, 띡, 세 번의 기계음이 들렸다. 알바생이 남자에게 카드를 건넸다. 남자는 후줄근한 조끼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는, 캔커피를 뜯었다.

-이건 키티짱 오면 주라구.

-다음에 직접 주시면 키티짱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못 줄 거 같아. 내일 이사가.

-아, 그러시군요.

  알바생은 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자동에 쪽방촌이 있어. 거기로. 여기 고시원 살기는 괜찮았는데.

-거기 월세는 더 싼가요?

-아니, 더 비싸. 34만 원. 고시원보다 4만 원이나 더. 시설도 엉망이고. 취사실 옆에 바로 화장실이 있어. 문짝도 없고.

  알바생은 남자가 이사를 하게 되는 사연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더 물어보는 일은 꺼려졌다. 손님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편했다.

-일주일 전에 고시원 총무가 와서 나가달라는 거야. 항의가 들어왔다고. 알았다고만 했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다 마신 캔커피를 찌그러뜨렸다. 

-가봐야겠군. 키티짱 보이면 그거 줘.

-건강하세요, 형. 그런데 형이라고 불러도 되요? 누나라고 불러야 할지.

  알바의 마지막 인사에 남자의 구겨진 얼굴이 살짝 펴졌다.

-좋을 대로.

  남자의 샛노랗게 물든 땋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마스카라가 번진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거렸다.

-학생도 꼭 성공해.

  남자가 가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야옹,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알바생은 고양이 간식을 들고서 일어났다.

-키티짱, 왔구나. 자, 이거.

  고양이는 알바생이 뜯은 캔을 사부작사부작 조금 파먹더니,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알바생은 졸음을 내어쫓기 위해 기지개를 크게 켜보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라디오를 켰다. 이런 밤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덜 무섭게 느껴졌다. 뚜뚜뚜 뚜. 새벽 1시를 알리는 시보가 흘러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돌의 표정


-아, 차라리 그냥 빨리 죽어버리면 좋겠어.

-아픈지 얼마나 되었는데?

-1년.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가.

-근데, 고향은 어느 나라?

-베트남.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엄마, 여기 커피. 누구야?

-남편이 여기 입원했대. 암이라고.

-여자가 못됬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자기도 살길을 찾아야 하니 그렇겠지. 늙은 남편한테 뭔 정이 얼마나 있겠냐. 애도 없다는데.

-남편이 몇 살인데?

-오십. 여자는 스물여덟. 자식이 있으면 좀 다르겠지. 자식이란 게 버팀목 같은 거야. 작은 버팀목. 그런 거라도 있으면 어찌어찌 살아가지. 그런데 그런 게 없잖아, 저 여자는. 그러니 남편이 죽어가도 데면데면한 거지.

-그래도 남들 앞에서 남편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난 무섭다. 무서워.

-내가 다시 볼 사람 아니니까 그렇겠지.

-부부란 게 정말 남남이네. 어쩌면 생판 남보다도 못한 거 같아.

-사람은 이기적이야. 결국은 다 자기 살 궁리를 하게 마련이니까.

  그날 오후에 베트남 여자의 남편이 임종실로 이동했다. 너무 말라서 뼈가 드러난 남자의 가느다란 팔이 그네처럼 흔들거렸다. 베트남 여자는 이불과 기저귀 가방을 들고서 호스피스 병실 앞에 서 있었다. 돌에게도 표정이 있다면 저 여자의 얼굴일 것이다. 검정 고무줄로 묶은 여자의 짧은 머리가 천천히 흔들거리며 사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6시 55분


  컹컹, 왈왈.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시계를 본다. 6시 55분. 거의 매일 아침, 같은 시각이다. 흰 모자를 쓴 키 작은 늙은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지나간다. 그 유모차에는 개가 한 마리 앉아있다. 올여름 내내 남자의 기상 시간은 그즈음으로 고정되었다.

  열대야에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는데, 거기다가 개 짖는 소리에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마다 남자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놀랍게도 이 아파트 단지에서 저 개 짖는 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남자 말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늙은 여자는 여름 내내 6시 55분에 미친듯이 짖는 개를 데리고 나와서 아파트를 산책했다. 그 누구도 여자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개가 짖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침 일찍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 늙은 여자의 루틴이었다. 짖는 개에게 주의를 주지도 않았다. 여자는 개 유모차를 여유롭게 끌면서 아파트 단지를 통과했다.

  남자는 문득 오래전의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요양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다. 할머니 A에게는 정기적으로 면회를 오는 살가운 자식들이 있었다. 할머니 B는 자식이 없었는지, 아니면 있어도 찾아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할머니 B는 할머니 A를 보면서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 그런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할머니 B의 마음을 좀먹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할머니 B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다다랐다. 할머니 A를 살해한 것이다. 할머니 A가 죽은 날은 5월 7일, 어버이날 전날이었다.

  6시 55분의 늙은 여자에게 개 유모차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행복을 시기 질투하다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보다 개를 키우는 것이 낫겠지. 남자는 그 유모차를 멸시와 증오로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9월


  눈병이 났다. 아마도 8월 초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왼쪽 눈꺼풀에 작은 뾰루지가 하나 올라왔다. 눈에 그런 것이 났다가 다음날이면 사라지곤 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 뾰루지는 붉은 점처럼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았다. 약간의 부기에 가려움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주 불편하진 않았다. 안과에 가봐야지 하면서도, 날이 미친듯이 더우니 외출하기도 꺼려졌다. 저러다 낫겠지. 그러던 것이 지난 주말을 지나면서 눈이 더 붓고 이물감이 심해졌다.

  9월이 되었는데도, 이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안과 병원은 버스에서 내려서 15분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땡볕을 걷는 것이 아주 고역이었다. 병원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여느 때라면 1층의 검사실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질 텐데, 뭔가 비수기의 해변가처럼 병원은 한가했다. 나는 5분 정도 기다렸다가 담당 주치의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정도로는 짜도 나올 수 있는 게 없어요. 흉이 질 수도 있구요. 온찜질을 열심히 하세요."

  나는 좀 당황했다. 거의 한 달 동안 눈이 그런 상태라, 다래끼를 좀 짜면 나을 줄 알았다. 이 의사 양반은 매우 신중하다. 이전에 결막 결석 때문에 찾아갔을 때에도, 결석이 아직 튀어나오지 않았다면서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로서 나는 선택을 해야한다. 의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우길 것인지. 만약에 내가 말하는 상대가 인테리어 업자이고, 현관을 원하는 타일 색으로 바꾸고 싶다면 그렇게 요구하면 된다. 하지만 내 앞에서 말하는 이는 의사이다. 짜서 나을 것 같으니 짜달라, 고 말하는 일은 어쩐지 할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 내가 이 의사 선생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찜질을 해서 이게 나을 것인지, 솔직히 나는 확신이 가질 않았다. 개 혓바닥처럼 더위에 늘어진 보도블록을 있는 힘을 다해 걸어갔다. 덥다. 너무 덥다. 길가의 슈퍼에서는 중년의 여자가 한 무더기의 옥수수를 쌓아놓고 열심히 껍질을 까고 있었다. 아직도 옥수수를 팔고 있나? 인터넷에서 옥수수는 판매 종료된 지 오래고, 이제는 삶은 옥수수를 냉동한 것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어디서 옥수수를 떼어왔을까? 나는 냉동실에 쟁여놓은 올해의 마지막 옥수수를 떠올렸다.

  3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서야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는 뻥튀기 같은 싸구려 과자와 주전부리를 파는 여자가 있었다. 그 옆에는 야쿠르트 카트도 보였다. 머리가 아주 하얗게 센 호리호리한 여자가 야쿠르트 하나를 들이키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그 늙은 여자가 야쿠르트를 사 먹은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야쿠르트 여사였다. 내가 본 야쿠르트 여사들은 보통 3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여사는 적어도 60 중반은 되어보였다. 정류장에는 햇빛이 인정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디 하나 피할 데가 없었다. 주전부리를 파는 장사꾼 여자는 더위를 이기려는 듯 혼자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체조를 했다. 그 모습이 마치 가게 앞에서 하릴없이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보였다. 나는 설핏 웃음이 나오려다가, 먹고 산다는 것의 그 무게가 느껴져 서글픈 느낌마저 들었다.

  전광판을 보니 버스는 10분 뒤에 오기로 되어있었다. 그 10분을 견디기 위해 나는 정류장 옆 건물의 광고판을 하릴없이 들여다보았다.

  '우리 직원 일동은 부킹을 목숨처럼 생각합니다'

  유흥 주점, 이라는 문구 옆에는 '***나이트클럽'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33세 이하는 절대 출입 금지'

  처음에는 '이하'를 '이상'으로 내가 잘못 읽은 것인가 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아니었다. 그 나이트클럽은 33세 이하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중년 남녀 만남의 천국. 최고의 만남을 위해 수질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이어졌다.

 이 정류장을 여러 번 오가면서도 여기에 이 나이트클럽이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 빌딩은 금융 기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외관이 무척 번듯했다. 금융 기관과 중년 전용 나이트클럽의 기묘한 동거를 나는 여지껏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절실한 만남을 원하는 중년의 남녀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나는 부킹을 생명처럼 여기는 그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떠한 것인가도 궁금해졌다.

  버스가 왔다. 알지 못하는 중년의 남녀들과 나이트 클럽이 스르륵 사라졌다.

  "아이고, 언니들. 너무 반갑네."

  세 정거장을 지났을 무렵, 나이 든 여자가 버스에 탔다. 쪼리를 신은 맨발의 엄지발톱에는 빨강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볼품없는 작은 발이었다. 버스 뒷편에 여자의 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늙은 할머니들이었다. 여자의 활기찬 인사에 노인들은 대꾸할 기력도 없는듯 했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아, 저기 좀 봐바. 바람 한 점 안 불어. 너무 더워. 언제까지 더울까, 언제까지? 아마도 9월은 지나야겠지. 그래 9월이 지나야 할 거야. 집안을 다 뒤집어서 청소하고 왔더니 땀이 줄줄 흐르네."

  여자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대편 자리로 옮겼다. 나는 여자의 주절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자리를 떠서 내심 반가웠다. 여자는 자리를 옮겨 앉더니,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상한 그 활기가 부럽게 느껴졌다. 여자와 그 일행인 늙은 언니들은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아마도 그들은 정류장 옆에 있는 스포츠 센터의 수영장을 다니는 이들 같았다. 수영장의 아쿠아로빅 수업은 언제나 중년의 여자, 노인들로 늘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원시시대에 채집을 하러 갔다가 아무런 소득이 없이 돌아오는 사람처럼 걸었다. 9월이 지나는 동안 다래끼가 낫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의사를 보게 되면 미워질 것 같았다.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쳤다. 개같이 더운 날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