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장 피해야 할 관상은 어떤 사람일까요? 관상을 35년 연구한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그건 눈빛, 눈빛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눈빛이 안 좋다, 그것도 아주 안좋다. 그러면 그건 끝난 겁니다. 그런 사람은 피해야 해요. 길 가다가 그런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그냥 아무 말 말고 뒤돌아 가십시오. 그게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겁니다."

  주희는 유튜브의 신기한 알고리즘을 따라가다가 어느 관상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동영상의 섬네일(thumbnail)은 '살면서 절대로 피해야 할 관상'이었다. 눈빛이 중요하구나. 새삼 뉴스에서 가끔 보았던 흉악한 범죄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뭔가 기이하고도 음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직감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지.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직감이란 선사시대 때부터 인류에게 내재된 동물적인 감각인지도 모르겠군. 침을 튀기며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는 관상가의 얼굴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날 오후에는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 입고 가는 옷은 딱 정해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뻣뻣하고 각이 진 옷들은 옷장에서 사라졌다. 낡고 늘어져서 입기 편안한 옷들이 늘어났다. 주희는 샤넬의 트위드 투피스를 카피한 정장을 꺼냈다. 신발장에서 구두를 찾는 일은 그보다는 번거로웠다. 족저근막염에 시달린 이후로 구두는 신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서 제일 윗칸 안쪽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로퍼는 광택을 잃어버린 채 가죽이 허옇게 들떠 있었다. 하도 쓰지 않아서 조각난 구두 왁스를 꺼내어서 구두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리고 구두 닦는 천으로 로퍼를 닦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뭐 괜찮지."

  주희는 광택이 되살아난 로퍼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퍼에 발을 넣어보니, 그 불편한 느낌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푹신한 쿠션이 있는 운동화만 신고 다니다가 구두를 신으니, 이건 마치 신발로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에 운동화를 신고 갈 수는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날씨는 무척 좋았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에다 햇살도 그리 따갑지 않았다. 뒤꿈치의 통증을 조금씩 느끼며 주희는 지하철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나마 걷는 이동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결혼식장은 3호선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시각까지는 무척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되면 이야기도 나눠볼 생각이었다.

  지하철은 의외로 승객이 많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어서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곧 자리가 날 것도 같았다. 두 번째 하차 안내 방송이 끝나고 나서, 주희는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지하철 안은 마치 독서실처럼 조용했다. 주희도 스마트폰을 꺼내어서 자주가는 주부 커뮤니티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을 들여다 보았다. 삼식이 남편 때문에 너무 괴로워요. 매 끼니 밥을 챙겨야 하는 퇴직자 남편을 흉보는 여자의 사연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살짝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바로 건너편에 앉은 남자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베이지색의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챙을 눈썹 아래까지 눌러썼다. 그럼에도 슬쩍 보이는 그늘진 그 눈빛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회색의 바람막이에다 검정색의 등산바지를 입고 있었다. 갈색의 트레킹화는 무척 낡아서 군데군데 터진 부분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흰색의 백팩이었다. 그 부피가 상당해서 백팩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어디 먼거리의 산행이나 여행을 다녀오는 길인가? 도시 사람들의 짐은 대개가 간소하기 짝이 없는데, 커다란 부피의 백팩은 뭔가 특이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느끼자, 남자는 곧 야구모자를 깊게 내렸다. 마치 거짓말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주희는 살짝 당황하며, 이내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이 안좋은 사람은 반드시 피하세요. 주희의 귓가에는 아침나절에 들었던 관상가의 확신에 찬 말투가 천천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사람이 나에게 뭔가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내려 다음 지하철을 타는 일은 번거롭다. 그 지하철에 이렇게 편하게 앉아 갈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주희의 손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이, 그다음에는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곧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 신문을 펼쳤을 때의 진한 석유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출입문 앞에 섰다.

  "다음 정차할 역은 약수, 약수역입니다."

  심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약수역에 내린 주희는 승강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기진맥진하다시피 쓰러졌다. 닫힌 문 안쪽에서 남자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왼쪽으로 비뚤게 기울어진 웃음이었다. 남자가 들어올린 모자 아래로 그 눈빛이 보였다. 무엇이든지 다 집어삼킬 듯한 검은 심연 같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주희는 그 남자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오금이 저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 벌써 온 거야? 결혼식이 일찍 끝난 모양이네."

  주희는 로퍼를 벗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남편의 시선은 TV 야구 경기에 꽂혀 있었다.

  "나, 점심 안먹었어."

  주희는 문득 시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했던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니 아들이 자기 손으로 밥을 차려 먹는 법을 가르치지도 못한 것이다. 지금의 남편을 만든 절반이 시어머니라면,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몫이었다. 남편의 밥 타령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53살의 삼식이를 만들었다.

  불편한 로퍼에 까진 발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주희는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끓인 미역국을 데우고, 김치 볶음과 김을 내놓으면 될 것 같았다. 타타타타. 가스렌지의 불이 켜지면서 파란색으로 변했다.

  "어, 저게 뭐야? 무슨 사고가 있나 본데. 3호선에서 무슨 폭발 사고가..."

  주희는 발뒤꿈치의 통증을 느끼며 TV 앞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남편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 YTN 뉴스 채널의 번호를 입력했다. 연기에 휩싸인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뉴스 화면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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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야


  사업 실패와 부모님이 진 빚 때문에 죽고 싶다는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죽을 결심을 하신 것은 아니지요? 아니, 죽을 결심을 하고 찬찬히 준비를 하고 있나요? 사람이 말입니다, 죽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저는 등산을 참 좋아합니다. 회사 일이 바빠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걸 지키려고 해요.

  그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등산하기 전, 날씨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비 예보도 없었구요. 그런데 자연이란 것이 사람의 예측 따위는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려요. 산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군요. 나는 배낭에서 우비를 꺼냈습니다. 비가 쏟아지면 입을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천둥 번개가 치더니,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는 겁니다. 소나기치고는 무척 세차게 내리는 비였죠. 우비를 뒤집어쓰고 근처 나무 아래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빗줄기는 더 세질 뿐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비에 산길은 고랑이 생기며 무척 미끄러웠습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발을 좀 헛디뎠죠. 완만한 경사길이었는데도, 발목이 꺾이면서 데굴데굴 굴렀지 뭡니까.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눈을 떠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더군요. 누군가 신고를 해서 산악 구조대의 헬기를 타고 인근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응급실에서는 골반이 부서진 복합 골절이라 큰 수술이라는 겁니다. 좀 더 큰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요.

  다시 구급차에 실려서 1시간을 달린 끝에 대학 병원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CT, MRI 찍은 걸 보더니 의사가 그러는 겁니다. 골절이 문제가 아니라 뼈에 종양이 생겼는데, 암 같다구요. 결국 골육종(骨肉腫)으로 판명되어서 다리뼈 몇 군데를 잘라내야 했어요. 다행히 다리 병신은 면했죠. 쇠로 된 뼈며 인공 관절을 구멍난 그릇 땜질하듯 끼워넣었거든요. 물론 남은 생애, 다리를 질질 끌면서 살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내 힘으로 대소변을 볼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행복인지 아십니까? 나는 그랬어요. 의사가 암이라서 뼈를 잘라내야 한다고 말할 때, 평생 휠체어에 앉아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화장실에 가야 한다면 그냥 죽는 게 낫다고 여겼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요. 행복이란 게 별게 아니에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그날의 식단 메뉴에 신경이 곤두서요. 맛있는 고기반찬 나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아주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런 일상의 행복. 그런 게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살아갈 힘이 생겨요.

  자, 어떻습니까? 선생님의 사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매일의 행복은 뭘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뭔가가 있을 겁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이제부터 만들면 되지요. 선생님이 너무나 부러워하는 누군가의 인생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 힘든 구석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래도 그냥 살아가요.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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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벤치


  "아이구, 어르신. 날도 더운데 여기서 이렇게 앉아계세요?"

  양산을 쓰고 지나가던 중년의 여자가 연이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오후 2시, 실버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연이 할머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다. 9월이 되었지만, 늦더위의 기세는 맹렬했다.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고, 여자는 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이 할머니는 무어라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할머니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머쓱해져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10분 거리의 아파트 노인정에 가면 에어컨이 잘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연이 할머니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감때사나운 총무 인천댁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인천댁은 노인정의 살림살이를 꽉 틀어쥐고 그곳 할머니들에게 오만 참견을 했다. 연이 할머니는 그 여편네가 아주 싫었다. 집이 답답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나마 놀이터 옆의 벤치가 앉아있기에는 마음이 편했다. 벤치 옆의 보도블록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정신 사납게 내달리는 오토바이며, 시끄럽게 악을 쓰는 조그만 애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숨이 막히는 담배 연기를 맡을 때도 있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중생들이 연이 할머니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렸다. 그럴 땐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도 그냥 참았다. 막돼먹은 것들. 연이 할머니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일 뿐이었다.  

  "어머니, 우리도 더는 못 하겠어요."

  2년 전의 낙상 사고로 연이 할머니의 거동은 무척 불편해졌다. 부러진 다리뼈가 어렵사리 붙기는 했지만, 걷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원체 굽어진 허리에다 다리까지 말썽이니 연이 할머니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화장실 가는 일도 힘들어서 소변을 실수할 때가 많았다. 막내딸이 기저귀를 사서 부쳐주었다. 차곡차곡, 마치 시골집에 쌓여진 장작처럼 연이 할머니의 비좁은 방에는 기저귀 상자가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같이 사는 며느리는 집에서 지린내가 도무지 빠지지 않는다면서 싫은 소리를 자주했다. 그러던 것이 한 달 전, 연이 할머니가 이불에 실수하자, 집안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큰아들의 입에서 요양원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 할머니는 아들 내외에 대한 분하고 괘씸한 마음과 이렇게 내쫓김을 당하는 자신의 신세에 서글픔을 느꼈다.

  "승미야, 네가 이 에미하고 살면 안 되겠나?"

  휴대폰에 저장된 1번을 눌러서 연이 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엄마하고는 못살아'라는 짤막한 대답이었다. 내가 저것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매정할 수 있을까? 연이 할머니의 붉어진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배 아파 낳은 자신의 새끼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먼 곳으로 진작에 떠나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내일은 요양원에서 연이 할머니를 데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더운 바람이 연이 할머니의 얼굴을 휘감았다. 허연 머리가 끈적거리는 땀에 엉키며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손을 들어서 머리를 매만질 기운도 연이 할머니에게는 없었다. 더위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연이 할머니는 인견 치마의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엊그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길에 교회 선교를 하는 여자가 나눠준 사탕 하나가 손에 잡혔다. 사탕 껍질을 까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연이 할머니는 사탕 껍질을 호주머니에 다시 넣으려 했지만,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면서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그만 사탕이라도 하나 먹으니 침이 고이고,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제 부모를 어디 모르는 데다 내다버리는 몹쓸 종자도 있다는데, 그래도 내 자식은 그렇지는 않지. 연이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청포도의 신맛이 입안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자, 연이 할머니는 벤치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실버 유모차의 손잡이에 검버섯이 핀 양 손을 무겁게 얹었다. 꼬질꼬질 때가 탄 회색의 천 손잡이에는 '주인 정복연'이라는 매직펜 글씨가 삐뚤게 쓰여 있었다. 연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려다 말고는 잠시 벤치를 내려다보았다. 잘 있어라.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듯, 연이 할머니는 자신이 앉았던 벤치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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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


  "어우, 잘 잤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검정색 러닝셔츠 차림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누웠던 벤치에는 땀이 흥건했다. 9월 초, 한낮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더위가 이어졌다. 남자가 가고 난 자리에는 남자가 먹다 버린 캔 커피가 오뚜기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바닥에는 남자가 피우고 내던진 담배꽁초도 있었다. 늦여름의 더운 바람이 갑자기 훅, 하고 놀이터의 벤치를 지나갔다. 어제 놀이터에서 놀았던 어린아이가 버린 것 같은 뽀로로 스티커가 남자가 드러누웠던 자리에 들러붙었다.

  실버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 하나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노인은 유모차를 세워놓고 벤치에 앉아서 하릴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후끈거리는 바람이 허옇게 세어버린 할머니의 머리를 정신없이 흩트려 놓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머리를 매만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기력도 없어 보였다. 10분, 20분... 노인은 더운 한낮의 벤치에 40분 정도 앉아있다가 힘겹게 유모차를 끌고 가버렸다. 노인이 떠난 자리에는 연두색의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굴러다녔다.

  "하여간 사람들이 배워처먹질 못해서 그래."

  주황색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들고 나타난 경비가 투덜거리며 벤치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경비는 버려진 캔 커피에 음료수가 남았는지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조금 남은 커피를 벤치 옆의 잔디밭에 쏟아버리고, 경비는 나머지 쓰레기들을 주황색 쓰레기통에 쓸어 넣었다. 뽀로로 스티커가 엉겨붙은 빗자루를 세워둔 채, 경비는 쓰레기통을 들고 사라졌다. 오후, 4시.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어느새 먹빛으로 변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지개색 우산을 쓴 늙은 아줌마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흰색의 천 가방에서 종이 책자 뭉치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이 없는 이들이 벤치로 몸을 피했다. 남자 중학생과 중학생의 엄마, 젊은 여자가 벤치에 앉았다. 퍼걸라(pergola)에는 무성한 등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심한 비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다.

  "저기, 시간 나면 이것 좀 봐요."

  늙은 여자가 '파수대' 책자를 중학생과 엄마, 젊은 여자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 벤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늘 출근하는 직장 같은 곳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여자는 선교의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출근했다. 중학생은 예의 바르게 책자를 받았다. 학생의 엄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책자를 신경질적으로 구겨서 쇼퍼백에다 넣었다. 젊은 여자는 표지를 짧게 쳐다보고는 곧 벤치 위에다 내려놓았다.

  "구원의 길이 거기 있어요."

  빗줄기가 점점 더 세어지자, 등나무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학생과 엄마가 자리를 떴다. 젊은 여자는 아까 내려놓았던 파수대 책자를 머리에 쓰고 빠른 걸음으로 뛰었다. 무지개색의 우산은 한 시간 정도 더 벤치에 머물렀다.

  저녁 7시 30분, 아파트 단지의 LED 가로등에 희미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노란색 우비에 헬맷을 쓴 배달 오토바이가 벤치 옆의 보도블록을 질주하며 무언가를 내던지고 갔다. 콜라 캔이 벤치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로등의 불빛에 콜라 캔이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젖은 담요를 두른 듯한 검정색의 고양이가 부주의하게 콜라 캔에 미끄러졌다. 허연색 배를 드러내며 뒤집혔던 고양이는 버둥거리다가 다시 일어났다. 고양이는 뒷다리 안쪽의 작은 상처를 연신 핥았다. 벤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에 놀란 고양이는 벤치 아래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빨강색의 우산을 쓴 세 명의 여중생이 벤치를 찾은 것은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여자애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자기들끼리 킬킬거렸다. 짧은 머리의 여자애가 백팩에서 휴지를 꺼내어 벤치의 물기를 닦았다.

  "민지, 너 교양인이네, 휴지도 갖고 다니냐?"
  "내가 너 같은 깡통인지 알아?"
  "이 년이 터진 아가리라고 아무 말 잔치네."

  키 큰 여자애가 짧은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라이터의 불빛이 짧게 켜지더니 꺼졌다. 때가 낀 흰색 캔버스화를 신은 여중생이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아까 그 아저씨한테 DM 보내봐."
  "안 할래. 영양가도 없을 거 같은데 뭐."

  짧은 머리는 벤치를 닦은 휴지를 작은 공처럼 뭉쳐서 내던졌다.

  "오늘은 허탕인가? 비도 오는데 그냥 일찍 집에나 가버려?"
  "가만있어 봐. DM 좀 더 뿌려보고."

  담배를 비벼 끄면서 캔버스화가 스마트폰의 인스타그램 화면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캔버스화가 내던진 담배꽁초가 파수대 책자 위로 떨어졌다. 책자에는 빗물이 흥건했다. 꽁초는 표지에 인쇄된 예수님의 얼굴에 자리를 잡았다. 입가에 담배를 물은 예수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여학생들은 11시가 되어서야 벤치를 떠났다. 여학생들이 떠난 벤치에는 비어버린 빨강색 틴트 통 하나가 있었다. 틴트 통의 뚜껑이 천천히 시멘트 바닥을 굴러가더니 멈추었다. 등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틴트 통에 고였다. 분홍색으로 번진 물이 조금씩 흘러넘쳤다. 바닥에 놓인 파수대의 예수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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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


  남편은 부산 출장 중이었다. 수영은 저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다. 자신은 그냥 과일이나 깎아서 먹고 말 심산이었다. 냉장고에는 복숭아가 있었다. 세 개의 복숭아. 그런데 복숭아는 모조리 멍이 들어서 물러지고 있었다. 한꺼번에 껍질을 까서 정리해 두는 것이 낫겠네. 너무나도 맛이 없는 복숭아였다. 설탕을 조금 뿌려 먹어야지. 밀폐용기에 복숭아를 담아놓고 복숭아 껍질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에는 전날의 바나나 껍질이 가득 차 있었다. 겨우 복숭아 껍질을 통에다 욱여넣고는 뚜껑을 닫았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은 남편 담당이었다. 내일 버릴까? 이런 쓰레기 버리는 일도 몹시 귀찮게 여겨졌다. 버리고 와야겠네. 후덥지근한 늦여름 날씨에 음식물 쓰레기를 이렇게 놔두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주섬주섬 반팔 카디건을 챙겨입었다. 시계는 밤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2주 전에 옆 단지 아파트에서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밤 10시에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던 주부가 괴한에게 두들겨 맞았다. 주부는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무슨 한밤중도 아니고, 이런 아파트 단지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묻지마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나름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수영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든 채, 도로 집으로 가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끼룩끼룩, 9월의 풀벌레 소리는 한여름 매미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거친 땅에다 쇠막대기를 갈아내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벌레가 수영의 옷자락에 들러붙은 것처럼 신경을 긁어대며 가깝게 들렸다.

  "야, 임마. 네가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해."

  1층 출입구 건너편에는 아파트 경로당이 있었다. 그 경로당 앞에서 중년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전화 통화 중이었다. 수영은 남자를 보고는 더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수영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아파트의 음식물 쓰레기통은 건너편 아파트의 1호 라인 쪽의 공터에 있었다. 원래는 5분 거리에 있던 것이 새롭게 전자 카드 인식 방식으로 바뀌면서 쓰레기통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면 10분은 걸어가야 했다.  

  경비실은 불이 꺼져있었다. 경비도 벌써 숙직실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경비실 앞에 주차된 자동차의 블랙박스 불빛이 깜빡거렸다. 그것은 마치 충혈된 빨간색의 눈알처럼 흔들렸다. 수영은 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다.

  "투입하신 쓰레기의 중량은 750g입니다."

  그냥 내일 버릴걸, 괜히 이 밤중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서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구나 싶어졌다. 수영은 출입구에서 아까 담배 피우던 남자가 아직도 있을지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때였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라기 보다는 마치 아파서 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수영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공터의 구석에서 여자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내저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여자는 옆 화단의 나무에다 고개를 짓찧었다. 그 모양새가 하도 기괴해서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여자는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는 매섭게 쏘아보았다.

  "새댁, 내가 미친 사람 같지? 나도 내가 이렇게 살게 될 줄 정말 몰랐어. 새댁은 안 그럴 거 같아? 새댁이 나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어?"

  흐트러진 머리의 중년 여자는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친 년이네.'

  수영은 뭐라고 대거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여자가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급함으로 오그라붙었던 마음이 이상하게 여유로워졌다. 신경을 긁어대는 풀벌레도 눈에 보이면 가볍게 밟아 죽여줄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공터를 나오면서 수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경로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버리고 간 담배꽁초의 불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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