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장 피해야 할 관상은 어떤 사람일까요? 관상을 35년 연구한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그건 눈빛, 눈빛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눈빛이 안 좋다, 그것도 아주 안좋다. 그러면 그건 끝난 겁니다. 그런 사람은 피해야 해요. 길 가다가 그런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그냥 아무 말 말고 뒤돌아 가십시오. 그게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겁니다."
주희는 유튜브의 신기한 알고리즘을 따라가다가 어느 관상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동영상의 섬네일(thumbnail)은 '살면서 절대로 피해야 할 관상'이었다. 눈빛이 중요하구나. 새삼 뉴스에서 가끔 보았던 흉악한 범죄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뭔가 기이하고도 음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직감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지.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직감이란 선사시대 때부터 인류에게 내재된 동물적인 감각인지도 모르겠군. 침을 튀기며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는 관상가의 얼굴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날 오후에는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 입고 가는 옷은 딱 정해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뻣뻣하고 각이 진 옷들은 옷장에서 사라졌다. 낡고 늘어져서 입기 편안한 옷들이 늘어났다. 주희는 샤넬의 트위드 투피스를 카피한 정장을 꺼냈다. 신발장에서 구두를 찾는 일은 그보다는 번거로웠다. 족저근막염에 시달린 이후로 구두는 신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서 제일 윗칸 안쪽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로퍼는 광택을 잃어버린 채 가죽이 허옇게 들떠 있었다. 하도 쓰지 않아서 조각난 구두 왁스를 꺼내어서 구두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리고 구두 닦는 천으로 로퍼를 닦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뭐 괜찮지."
주희는 광택이 되살아난 로퍼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퍼에 발을 넣어보니, 그 불편한 느낌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푹신한 쿠션이 있는 운동화만 신고 다니다가 구두를 신으니, 이건 마치 신발로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에 운동화를 신고 갈 수는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날씨는 무척 좋았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에다 햇살도 그리 따갑지 않았다. 뒤꿈치의 통증을 조금씩 느끼며 주희는 지하철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나마 걷는 이동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결혼식장은 3호선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시각까지는 무척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되면 이야기도 나눠볼 생각이었다.
지하철은 의외로 승객이 많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어서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곧 자리가 날 것도 같았다. 두 번째 하차 안내 방송이 끝나고 나서, 주희는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지하철 안은 마치 독서실처럼 조용했다. 주희도 스마트폰을 꺼내어서 자주가는 주부 커뮤니티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을 들여다 보았다. 삼식이 남편 때문에 너무 괴로워요. 매 끼니 밥을 챙겨야 하는 퇴직자 남편을 흉보는 여자의 사연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살짝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바로 건너편에 앉은 남자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베이지색의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챙을 눈썹 아래까지 눌러썼다. 그럼에도 슬쩍 보이는 그늘진 그 눈빛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회색의 바람막이에다 검정색의 등산바지를 입고 있었다. 갈색의 트레킹화는 무척 낡아서 군데군데 터진 부분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흰색의 백팩이었다. 그 부피가 상당해서 백팩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어디 먼거리의 산행이나 여행을 다녀오는 길인가? 도시 사람들의 짐은 대개가 간소하기 짝이 없는데, 커다란 부피의 백팩은 뭔가 특이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느끼자, 남자는 곧 야구모자를 깊게 내렸다. 마치 거짓말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주희는 살짝 당황하며, 이내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이 안좋은 사람은 반드시 피하세요. 주희의 귓가에는 아침나절에 들었던 관상가의 확신에 찬 말투가 천천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사람이 나에게 뭔가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내려 다음 지하철을 타는 일은 번거롭다. 그 지하철에 이렇게 편하게 앉아 갈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주희의 손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이, 그다음에는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곧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 신문을 펼쳤을 때의 진한 석유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출입문 앞에 섰다.
"다음 정차할 역은 약수, 약수역입니다."
심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약수역에 내린 주희는 승강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기진맥진하다시피 쓰러졌다. 닫힌 문 안쪽에서 남자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왼쪽으로 비뚤게 기울어진 웃음이었다. 남자가 들어올린 모자 아래로 그 눈빛이 보였다. 무엇이든지 다 집어삼킬 듯한 검은 심연 같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주희는 그 남자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오금이 저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 벌써 온 거야? 결혼식이 일찍 끝난 모양이네."
주희는 로퍼를 벗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남편의 시선은 TV 야구 경기에 꽂혀 있었다.
"나, 점심 안먹었어."
주희는 문득 시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했던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니 아들이 자기 손으로 밥을 차려 먹는 법을 가르치지도 못한 것이다. 지금의 남편을 만든 절반이 시어머니라면,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몫이었다. 남편의 밥 타령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53살의 삼식이를 만들었다.
불편한 로퍼에 까진 발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주희는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끓인 미역국을 데우고, 김치 볶음과 김을 내놓으면 될 것 같았다. 타타타타. 가스렌지의 불이 켜지면서 파란색으로 변했다.
"어, 저게 뭐야? 무슨 사고가 있나 본데. 3호선에서 무슨 폭발 사고가..."
주희는 발뒤꿈치의 통증을 느끼며 TV 앞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남편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 YTN 뉴스 채널의 번호를 입력했다. 연기에 휩싸인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뉴스 화면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