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다 보고나서 왜 제목이 "엘리펀트"일까가 궁금해졌다. 서양의 우화에서 '거실의 코끼리'는 피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뜻하는데,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폭력의 문제가 그러한 것일 수 있다는 것. 또 한가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의 사물,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 어떤 것이 감독의 의도에 더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 콜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감독 마이클 무어에게도 이 사건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볼링 포 콜럼바인"이라는 다큐를 만들게 했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본 이 사건의 본질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사람들을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폭력과 살상에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어의 분석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들의 범행 당일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좀 더 큰 사회학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구스 반 산트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았을까? "엘리펀트"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좋은 답을 제공해줄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 감독은 단지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들의 일상을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훓어나간다. 서로 겹치는 시점 쇼트나, 롱테이크 같은 기법의 사용은 흥미있긴 해도 그다지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어떤 면에서는 졸립게 만든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서 가해자 학생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면서 여러가지 단서들을 보여준다. TV에서 나오는 히틀러와 나치에 관한 뉴스, 그들이 즐기던 인명 살상 컴퓨터 게임, 자주 보는 인터넷의 총기 구매 사이트 등.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것도 강조되어 있지 않고 그저 추측의 가능성만을 흘릴 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처음부터 관점이라던가 해석이라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했는지 섣불리 단정짓고 결론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감독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그것은 어떤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제화시키는 것에 비하면 매우 영리하고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란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하며,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한다.

  "엘리펀트"가 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서정적인 오프닝과 엔딩 신, 가해자 학생이 연주하는 평화로운 피아노 음악, 이런 것이 구스 반 산트의 작가적 관점이라면 더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본질을 직면하는 대신 유보하고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작가적 위치를 일정부분 포기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술가는 그 이면의 진실을 응시하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엘리펀트"가 나름대로 주목할 작품이기는 해도 보는 이의 마음 깊이 와닿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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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영화보고 리뷰 쓴 적이 있어요.^^ 이 영화에 대해 미국의 한 유명 평론가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데요.그런데 여기에 대해 감독인 구스 반 산트는 바로 그 무의미함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님의 글을 쭉 읽어보니 그 평론가가 그 한마디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베리 베스트 오브 자클린느 뒤 프레
jacqueline du Pre (재클린 뒤 프레) 연주 / 워너뮤직(팔로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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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사람들에게 외로울 땐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양한 나름의 해결책을 들을 수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답을 해준 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헐리우드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군가 그 작가에게 외로울 땐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했단다. “외로울 땐 시나리오를 쓰죠.”

 

 자끌린 뒤 프레의 음반을 들으면, 난 그가 외로울 때마다 첼로를 켰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불치병으로 고통받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 이런저런 인생의 고비에서 어쩌면 그의 유일한 위로이며 희망은 첼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외로움을 함께 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은 그래도 고통스럽지만 행복하기도 할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첼로는 편안하고 유려한 선율을 들려준다기 보다는 무언가에 호소하는 듯한 절절함이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든, 그의 굴곡어린 삶이든, 세상을 향해서든 자끌린은 첼로를 통해 외로움을 말해주려는 것 같다.

 

  자끌린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세상에 남았고, 그것을 통해 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의 외로움을 듣는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외로움이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벼랑 끝에 선 막막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첼로를 통해 자신을 응시할 수 있었던 용기를 지닌 한 사람의 삶이 나의 외로움에게 말을 건네고 위로를 전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음반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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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 1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9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범우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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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의 문학 서가에서 늘 망설이게 했던 책들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바로 그 책들이었다. 마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거대한 산처럼 참으로 오래전부터 그 책들을 지나쳐왔다. 그러다 이번에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도전했다. 10권으로 번역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하면 4권은 좀 수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니 소설의 본문과도 맞먹는 엄청난 주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비로소 “율리시즈”가 단순한 책이 아니라 거대한 수수께끼이며 책 읽기의 모험 그 자체임을 실감했다.

 

  조이스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 부었다는 생각이 든다. 파격적이고 탁월한 문체와 수사학적 실험들,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와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책이 20세기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율리시즈”는 그 책이 나온 이후의 문학 작품의 모든 것의 원형이 되는 요소들이 빠짐없이 들어있다. 내가 놀라고 열광해마지 않는 빼어난 현대 문학 작품들의 시작이 바로 그 책에서부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학적 성취 이전에 “율리시즈”는 소설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독자가 난해하고 복잡한 글들 사이를 신나게 질주하게 만드는 이 책의 기이한 매혹이야말로 4권의 번역본을 전혀 긴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번씩 읽으면 그 빼어난 문체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율리시즈”를 읽는 것이 좀 버겁게 생각되는 독자라면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두 작품 모두 “율리시즈”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은 직접 올라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율리시즈”도 읽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무수한 놀라움들이 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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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 2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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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서 연장을 4번이나 하는 동안 한달이 지나가버렸다. 한 달 동안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빌리고 보니 꽤 두터운 부피,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무수한 인명에 질려서 책 읽기를 미루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정작 이 책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마음먹고 최고의 집중력을 쏟은 것이다.

 

   칭기스칸의 조상과 그의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도, 아주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부족의 통일을 이루고 더 나아가 중국과 중앙 아시아를 지배한 칭기스칸 일생에서 대단한 모험담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쟁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이 책에는 무자비한 살육,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의 냉혹함이 무미건조한 문체로 담겨져 있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던진 마지막 물음은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말을 타고 전쟁터를 누비게 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피와 전쟁에 도취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원대한 세계 정복의 이상을 지닌 군주였을까? 어쩌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생존하기 위해서 폭력이 필수적인 야만의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현대성이라는 세련된 의식을 지니며 살고 있다고 믿는 지금의 세기는 기이하게도 이 책이 묘사하는 시대의 그것과 닮아있다. 내게는 그 점이 더 놀랍게 생각될 뿐이다.

 

  때로 독서의 경험은 재미를 뛰어넘은 그 무언가에 도달하는 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명감과 열정이란 말이 어울리는 이 책을 낸 출판사와 역자의 노고가  읽는 내내 많은 힘을 주었다. 새로운 독서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 이 책을 보다 많은 이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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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죠운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3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봉정 옮김 / 동인(이성모)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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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가는 나에게 잔 다르크와 그리스도의 전기를 선물해준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생이 보기엔 다소 작은 활자로 인쇄된 그 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니 사실 대단한 감동 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로 읽혔던 것 같다. 특히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게 붙잡힌 후 높은 감옥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는 기이한 경외감마저 느꼈다.

 

  나이가 들어서 만난 잔 다르크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EBS에서 해준 2부작 TV물을 보았으나 별로 눈길을 끌만한 점은 없었다. 그러다가 자끄 리베트 감독이 연출한 잔 다르크를 보고나니 그 인물이 이전과는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버나드 쇼가 그려낸 잔 다르크는 어떤 맥락에서는 리베트의 시각, 즉 성녀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면모,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예리한 시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통한다는 생각도 든다. 쇼는 이 희곡에서 잔 다르크의 무용담이 아닌 혁신을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득권층과 시대의 불협화음에 더 초점을 두었다. 그것은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며, 실제로 극의 구조는 그리스도의 수난극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쇼의 재능은 죽은 잔 다르크와 재판에 관련된 이들, 샤를 국왕의 대면이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에서 빛난다. 이 장은 쇼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 하더라도 법과 제도,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희생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읽는 이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른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부피의 책은 아니지만 쇼의 글솜씨에 빠지다보면 시간이 어찌가는 줄도 모른다. 깊이 있는 희곡 읽기를 희망하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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