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3년작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뭔가 찬밥 취급을 받는 듯하다. 1962년에 만든 비슷한 제목의 '여자의 자리(女の座)'가 좀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을 맡았다. '여자의 역사'는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바탕으로 카사하라 료죠가 시나리오를 썼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신상옥 감독이 1968년에 만든 '여자의 일생'도 있다. 최근작으로는 프랑스에서 2016년에 만든 영화가 있다. 이런 걸 보면 정말로 모파상의 그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단한 흡인력을 가졌구나 싶기도 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이 좀 넘는데, 보다보면 영화를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나루세 미키오의 그저그런 범작으로 여길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나리오도 원작 소설의 기본 뼈대만을 취했을 뿐, 그 내용은 일본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여인의 일생으로 소설과는 차별성이 있다.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의 나이는 39살이었는데, 20대의 아가씨부터 중년에 이르는 나이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여배우는 단지 분장만으로 '늙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와 행동으로 나이든 사람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여인을 보여주기 위해 약간은 구부정하고 느리게 걷는 걸음걸이며, 목소리도 고음 대신 중저음을 사용한다. 배우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미용실을 갖고 있는 노부코는 연로한 시어머니, 장성한 아들 코헤이과 함께 살고 있다. 코헤이는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며 노부코에게 알리지만, 노부코는 며느릿감이 카바레 종업원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한다. 제멋대로이며 엄마의 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아들은 노부코의 반대에도 살림을 차린다. 노부코는 그런 아들을 보며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새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노부코. 영화는 현재의 노부코가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을 중간중간 넣어서 노부코의 지나온 삶을 보여준다. 애정없이 이루어진 중매결혼, 남편의 징집과 전사, 남편의 친구 아키모토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전후의 피폐한 삶,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기까지 노부코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나루세 미키오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삶의 시련과 마주하는 여자 주인공을 그려내면서도 눈물을 짜내는 멜로 드라마로 만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인공 노부코는 강인한 삶의 의지를 지닌 여성이다.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상황이 노부코를 더욱 더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과부로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아들을 키워야 하는 노부코는 암거래 쌀 장사까지 한다. 영화는 전후의 혼란과 궁핍한 현실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한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 거리의 구두닦이 소년들, 찐빵을 먹는 이를 계속 쳐다보는 굶주린 이들... 나루세 미키오는 마치 인물화를 그리면서 주변 풍광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화가처럼 영화에 시대적 사실성을 더한다.

  아버지를 빼놓고, 노부코에게 남자들이란 고통의 근원이었다. 여자 문제는 없다고 믿었던 남편은 노부코를 속였고, 노부코가 반대한 결혼을 한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떴다. 노부코와 삶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시어머니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난 시아버지는 여관방에서 게이샤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어머니가 하는 대사는 통렬하게 들린다.

  "남자들은 여자를 아이로 만들어 버리지. 자기들은 멋대로 하고 살아. 그러고는 여자들 보다 먼저 죽어. 난 다음 생에서는 꼭 남자로 태어날 거야."

  노부코는 자신을 찾아온 며느리 미도리와 손자를 보듬는다. 이 어린 꼬마는 노부코에게 남은 삶의 빛이 되어줄까? 그렇게 한 여자의 삶의 역사를 그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와 다카미네 히데코의 팬들은 이 영화를 놓치기 어려울 것이다. 과하게 감상적인 영화 음악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여자의 역사'는 충분히 관객의 기대에 보답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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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

  남자의 직업은 지하철 검표원. 그의 일상은 지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업무가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잔다. 마음에 드는 처자가 커피 한 잔 산다며 카페에 가자고 해도 선뜻 가지 못한다. 카페는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를 벗어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그의 전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의 동료와 우연히 만나서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의 분야에서 아주 잘 나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안정된 직장도 그만두고 이렇게 지하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무언가 비밀을 가진 듯한 남자의 이름은 볼츄. 지하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삶이 싫어진 그가 친한 선배에게 묻는다. 미국 태생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Nimród Antal, 헝가리식 이름 표기는 성을 먼저 쓰므로 '안탈 님로드'로 표기함)의 2003년작 'Kontroll'은 부다페스트 지하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물이다.

  볼츄의 주 업무는 승객들의 지하철 표를 검사하는 것(Kontroll)이다. 그는 하루종일 천차만별(이라고 쓰고 실상은 골때리는)의 승객들과 티켓 실랑이를 벌인다. 무임승차 승객들에게 얻어맞고 골탕먹는 것은 별 것 아닌 일상. 볼츄가 일하는 지하 공간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난다. 승객들의 투신 자살은 낯설지 않다. 어쩌면 볼츄와 그 동료들이 보여주는 또라이 같은 행동은 지하 생활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특성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볼츄는 동료를 놀려먹고 달아난 젊은 승객을 뒤쫓는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젊은 승객을 지하철이 들어오는 철로로 밀쳐서 죽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려움 때문에 두건 남자를 잡지 않은 볼츄는 졸지에 승객 살인범으로 몰린다. 얼마 후, 새벽에 몰래 열리는 지하철 파티에서 볼츄는 두건 살인범과 마주친다. 과연 그는 살인범을 잡을 수 있을까?

  'Kontroll'은 빠르고 역동적인 편집과 강한 록 비트의 음악이 돋보인다. 특히 헝가리 인디 밴드 'Neo'가 들려주는 음악은 음울하고 기이한 지하 공간의 느낌과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거의 20년 전 영화인데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과 그것이 담고 있는 정서는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님로드 안탈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하 세계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게 만든다. 지하철을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 거대한 전동차의 무시무시한 속도, 미로처럼 얽힌 선로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탈과 범죄... 안탈이 형상화한 지하 공간은 도시인들의 온갖 욕망이 충돌하며, 그들의 무의식이 하수구처럼 모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내면이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직원들이 지하철 공사의 정신과 주치의와 면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기면증과 편집증을 비롯해 다양한 불안과 고통을 호소하는 직원들의 모습은 코믹하게 묘사되었지만,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볼츄의 동료 직원이 승객과 말다툼 끝에 칼부림을 하는 장면은 지하 공간의 병리성을 부각시킨다.      

  그런 지하 공간을 주인공 볼츄는 편안한 안식처로 생각한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상의 삶에서 도피한 사람이다. 지상과 그 현실의 삶과 마주하지 못하는 그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검은 두건의 지하철 살인마는 어떤 면에서 볼츄의 두려움이 형상화된 실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와 마주쳤을 때, 볼츄는 눈을 감고 그가 지나가는 것을 외면한다. 저돌적인 볼츄의 성향으로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직원 곤조와의 Railing(전동차가 들어오는 선로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 달리기 시합)에서 볼츄는 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눈 앞의 살인마를 보고 얼어붙는다. 볼츄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심한 분노와 자괴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진 두건 살인마와의 재대면. 그것은 지하의 삶에 스스로를 가두는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하는 일이다.

  님로드 안탈은 'Kontroll'에 코미디, 스릴러, 로맨스, 액션을 맛깔나게 버무려 놓는다. 거기에는 지하 공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사유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탐구가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관객들은 안탈이 그려낸 지도를 따라 부다페스트의 지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지하 인간으로 살면서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던 볼츄는 과연 방법을 찾았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볼츄는 연인과 함께 지상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다. 볼츄의 지상으로의 비상처럼, 새로운 세대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의 첫 영화도 그렇게 떠올랐다.



*사진 출처: eef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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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는 늘 언니인 '치즈코의 동생'으로 불린다. 언니는 못하는 것이 없다. 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와 연기, 달리기까지 다 잘한다. 그런 언니와는 달리 미카는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인다. 무언가를 잘 빼먹고, 덤벙대는 미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언니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언니 치즈코가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뜬다. 치즈코의 동생 미카는 그렇게 언니를 잃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1991년작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은 언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중학생 소녀의 내적인 여정을 그린다. 

  영화는 온갖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인 미카의 방을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미카의 방은 미카의 내면과도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미카의 상태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미카의 엄마 또한 영 기운이 없어 보이고, 아파 보이기까지 한다. 그나마 집안의 가장인 아빠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회사 업무 때문에 자주 출장을 가야하는 아빠. 아빠는 미카에게 엄마를 잘 보살펴야한다는 당부를 하지만,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든 미카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미카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 미카의 눈에만 보이는 언니의 혼령이 미카를 돕는다. 언니는 미카가 밤길에 치한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 그렇게 미카의 곁에 머물게 된 언니는 미카의 일상을 함께 한다. 피아노 연주회에서는 긴장을 풀어주고, 운동회에서는 느리게 뛰는 미카를 격려해서 1등으로 들어오게 한다. 연극의 주연을 맡았지만, 언니만큼 잘 해낼 수 없어 상심한 미카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은 동생을 떠날 수 없는 언니 덕분에 미카는 서서히 충격과 상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무려 2시간 반이나 된다. 1989년에 아카가와 지로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원작을 충실하게 보여주느라 영화가 늘어진 감이 없지않아 있다. 당시로서는 꽤나 공들였을 특수 효과는 오늘날 관객들의 기대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한다. 운동회에서 미카와 함께 뛰는 치즈코의 허술한(!) 모습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다소 산만하고 지루한 내러티브를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연출력으로 극복한다. '두 사람'의 중심을 이루는 뼈대는 갑작스런 언니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미카의 내적인 여정이지만, 그 여정에는 미카의 부모, 미카의 성실한 친구 하세베, 언니의 남자 친구 토모야도 함께 한다.

  아마도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뜻밖의 사건은 미카의 아빠에게 생긴 일일 것이다. 딸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일에 지친 것일까? 미카의 아빠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원작자 아카가와 지로는 슬픔을 극복하는 소녀의 이야기에 아버지의 불륜 이야기를 넣어야 하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의 삶에는 실제로 다양한 일이 생길 수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산자들의 삶에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두 사람'의 등장 인물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마주하고 견딘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회복탄력성(psychological resilience)'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삶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건과 마주했을 때, 이전으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 정신적 대응능력을 일컫는다. 미카의 엄마가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보여주는 정서적인 붕괴는 기질적인 문제에 더해진 낮은 심리적 회복탄력성에 의한 것이다. 미카는 언니의 도움으로 일상에 안착하지만, 미카의 아빠는 위기를 극복할 적절한 방식을 찾는 데에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니를 데려간 것은 하늘의 뜻이야. 너에게는 그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야할 의무가 있는 거야."

  무엇이든지 잘 하고 영민한 언니 대신에 자신이 죽는 것이 맞지 않냐고 미카는 친구 하세베에게 말한다. 그 말에 화가 난 하세베는 미카에게 그렇게 일러준다. 미카는 항상 의지했던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을 해나간다. 그 여정의 끝에서 언니는 미카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언니가 세상을 떴을 때의 나이가 된 미카의 뒷모습은 언니 치즈코와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미카가 사랑했던 언니의 삶은 기억되고, 미카를 통해 이어진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소녀 미카의 내적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항구도시 오노미치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낸다.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영화 음악은 다소 과한 느낌이 있지만, 영화 속 치즈코의 테마라 할 수 있는 '풀의 마음(草の想い)'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blog.goo.ne.jp   미카 역의 이시다 아키라와 치즈코 역의 나카지마 토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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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테마(The Theme, 197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 소련 영화들과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문구가 있다. 'stack on the shelf',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정도쯤 될까? 대개는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당국의 최종 시사에서 상영 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이다. 소련의 예술 창작 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맞지 않는 영화들의 운명은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었다.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1979년작 '테마(Тема)'의 경우도 그러했다. 영화는 심한 검열로 누더기처럼 되었고, 결국은 상영이 금지되었다.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테마'는 그렇게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고르바초프 집권기인 1987년이 되어서야 소련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저명한 극작가인 킴 예세닌(미하일 울리야노프 분)은 자신의 애인, 동료 극작가와 함께 볼가강변의 수즈달을 찾는다. 새로 집필할 역사극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이다. 예세닌 일행은 한적한 소도시 수즈달에서 은퇴한 여교사 마리아의 환대를 받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지역 박물관에서 가이드 샤샤를 보게 된 예세닌은 호기심을 느낀다. 마리아의 집 만찬에서 예세닌은 샤샤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샤샤는 마리아의 제자로 어릴적부터 예세닌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샤샤는 예세닌의 최근 작품들은 별로이며 형편없는 것이라고 혹평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글이 아닌, 정부 당국이 원하는 이야기만을 적당히 타협하면서 써온 예세닌은 샤샤의 그런 말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 일로 샤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예세닌은 밤늦게 샤샤의 아파트로 찾아가는데...

  예세닌은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당으로부터 받고 있다. 개인 별장, 자가용, 아파트, 그리고 작가로서의 명성까지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당의 노선에 부합하는 글만을 계속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닌 샤샤는 예세닌의 글이 가진 공허함을 알아챈다. 샤샤는 잊혀진 농민 시인 치지코프의 작품들에 매혹되어 있다. 소박한 농민의 언어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 노래했던 시인에 대한 책을 쓰려고 준비중이기도 하다. 예세닌에게도 치지코프에 대해 열광적으로 소개하는 샤샤. 그러나 예세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샤샤를 꼬실 수 있는가에 있는 듯하다. 이혼한 아내에게 아들을 밴드 활동이나 하는 머저리로 잘못 키웠다며 전화로 광분하는 이 다혈질 작가는 달리 마음 둘 데가 없어 보인다. 아직은 마음만 먹으면 샤샤 정도는 넘어오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웬걸, 도도한 시골 아가씨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자의식 과잉의 예술가, 그의 음주벽과 여성 편력, 예술에 대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이야기다. 아니, 소련 영화에서 홍상수식 감성을 느끼다니... '테마'는 비정형적인 소련 영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간간이 터지는 웃음들은 과연 이 영화가 1979년에 소련에서 만들어질 법한가 싶은 의문을 남기기까지 한다. 글렙 판필로프 감독은 확실히 삐딱선을 탔다. 구 소련 시절의 모든 영화는 국가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국영 영화'였다. 반체제 인사와 이민자에 대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라는 지시에 다른 감독들은 골치아픈 주제라며 고사했다. 그러나 판필로프 감독은 그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어서 보여준다. 공산당의 노선에 충실한 어용작가의 내면적 갈등과 연애담을 내세우면서, 정부 비판의 메시지를 슬쩍 끼워넣는다.

  예세닌이 밤늦게 찾아간 샤샤의 아파트는 열려 있다. 아무도 없는 집을 둘러 보던 그는 샤샤와 애인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부엌에 숨는다. 무려 20여분에 달하는 샤샤와 애인과의 대화는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뼈대이기도 하다. 샤사는 결별을 통보하는 애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의 애인은 당국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서 반체제 인사로 찍혔다. 학자였던 그는 연구소에서 쫓겨나 묘지에서 무덤파는 일로 연명하고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망명할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샤샤는 붙잡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판필로프는 반체제 지식인이 무덤파는 일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소련의 현실을 에둘러 비판한다. 원래 당국의 뜻대로라면 이 영화는 체제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테마'는 선로에서 이탈한 기관차처럼 달려간다. 애인과의 결별에 혼절한 샤샤를 내버려두고, 예세닌은 모스크바로 급히 떠난다(문 앞에 쓰러진 샤샤를 넘어가는 예세닌의 모습은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2006)'에서 김승우가 문간에 취한 채 잠든 고현정을 넘어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원래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결말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결말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검열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밤, 정신없이 차를 몰던 예세닌은 갑자기 샤샤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가던 길을 돌아서려는 순간, 차가 뒤집힌다. 그는 겨우 빠져나와 근처 공중전화에서 샤샤에게 전화를 건다.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도로 순찰 경찰이 발견하고 차에 싣는 정지 화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원래 판필로프 감독이 찍었던 장면은 예세닌이 사고로 죽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주인공의 '죽음'이 결코 바람직한 결말이 아니라며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타협한 결말에서는 예세닌의 생사를 알 수 없게 처리했다. 그럼에도 영화사 창고에 쌓이는 신세가 된 영화가 다시 빛을 본 것은 7년 후의 일이었다. 개혁 개방의 바람을 타고 관객과 드디어 만난 '테마'는 그 진가를 인정받았고,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영화의 초반부, 수즈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예세닌은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를 틀어놓는다. 동행한 작가 친구는 슈베르트는 청승맞기 짝이 없다며 다른 걸 틀으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예세닌은 그럴 생각이 없다. 억압적인 체제에서 자신의 뜻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극작가, 체제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나라를 떠나야 하는 샤샤의 애인, 그들은 모두 쓸쓸한 겨울 나그네 같다. 사랑했던 여인의 결별에 상심한 겨울 나그네는 추위와 고독 속에 헤매며 죽음을 예감한다. 가곡에 담긴 그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테마'는 소련의 현실에 빗대어 영화적으로 변주한다. 관객들은 검열의 칼날에 맞서 자신의 작가적 목소리를 낸 판필로프의 의지를 '테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영화 '테마'의 포스터. 뭔가 SF적인 느낌이 들지만, 권력에 영합하는 작가의 허상이 부서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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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묵주알(The Beads of One Rosary, 1979)'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쓰레기 집에서 난 더이상 못살아!"

  여자는 이사를 못가겠다는 남편을 향해 쏘아붙인다. '쓰레기 집'이라는 말은 용납할 수 없다며 남편은 화를 낸다. 그들에게는 이사 갈 새집도 있고, 그저 짐 떠싣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남편은 이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다.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아버지가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자신은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묵주알이 서로 이어진 것처럼, 이 효자 아들은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하겠다고 아내에게 공언한다. 그들이 사는 집은 새롭게 지어질 주택단지 때문에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 지방 정부와 건축 회사는 거주자들에게 새집을 주어서 이주를 진행시키는데, 오직 이 집의 주인 하브리카만이 이사를 거부하고 있다. 그에게 이 집은 50년 넘게 살아온 삶의 일부분으로 절대로 쉽게 떠날 수 없다. 효자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따른다. 며느리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다.

  '묵주알'은 폴란드의 감독 카지미에시 쿠츠(Kazimierz Kutz)의 1979년도 작품이다. 그는 사회참여적인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철거 예정 단지에서 자신의 집을 지키려는 은퇴 광부의 외로운 투쟁을 그린다. 영화는 실제로 철거되는 광부 주택 단지에서 촬영되었다. 카지미에시 쿠츠는 새롭게 지어지는 아파트 건설 현장과 철거되는 주택 단지의 모습을 다큐처럼 담아낸다. 영화는 사는 집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노인의 의지를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폴란드 사회의 모습을 펼쳐놓는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며 이사를 거부하는 하브리카와 그를 설득하려는 건축 회사 책임자는 설전을 벌인다. 오랫동안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하브리카가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무정부주의자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미 이웃집들은 이사를 갔고, 하브리카의 집은 마치 섬처럼 고립된다. 이 은퇴 광부의 집에 대한 애착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브리카는 독불장군에 정신나간 늙은이 취급을 받는다.

  급기야 집안으로 날아온 벽돌에 유리창이 깨지고,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는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한다. 며느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가버린다. 가부장제의 화신인 시아버지는 아들의 허락없이 나갈 수 없다며 며느리를 막으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브리카 노인을 둘러싼 세계는 그렇게 흔들리고 조각이 나고 있는 판국이다. 그럴수록 노인은 결전의 의지를 다진다. 전직 광부인 그는 집에 위해를 가하려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집 둘레에 폭약을 설치한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와 그의 집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카지미에시 쿠츠는 하브리카의 고독한 투쟁을 통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정부 당국을 에둘러 비판한다. 당사자가 만족할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일방적 관행에 하브리카는 저항한다. 참전 용사이며, 광부로서 쌓은 놀라운 업적으로 유공자 칭호를 받은 전형적인 구세대적인 인물이 집단의 가치에 순응하지 않고 개인적 투쟁을 벌이는 점은 흥미롭다. 어떤 면에서 하브리카의 외로운 싸움은 1980년에 일어난 폴란드의 자유노조 파업과도 맞닿아 있다. 오랜 경제적 침체를 야기한 폴란드 공산당 정부는 그 책임을 기습적인 물가인상으로 국민에게 전가하려 했다. 더이상의 경제적 고통을 감내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고, 억눌려 있던 정치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개인이 가진 권리와 자유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하브리카의 집은 결국 철거된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건설사는 교외의 고급 주택을 제공한다. 모든 것이 최신식인 그 집은 노부부가 살기에는 너무 넓어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 새로운 집에서 지독한 가부장주의자였던 하브리카는 아내의 설거지를 돕는가 하면,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남편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였을까? 그는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노동 영웅으로서 그의 장례식은 장중하게 치뤄진다. 마지막으로 철거된 하브리카의 집,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전통적 가부장제, 국가에 헌신하는 노동자의 신화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폴란드는 새로운 역사의 장에 들어선다. 때로 영화는 그렇게 시대를 앞서 예견하는 예언자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 출처: slaskiesiemianowice.pl   영화 '묵주알' 촬영현장의 카지미에시 쿠츠 감독(가운데)



*다음 글은 토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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