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인장'은 특이하게도 겨울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나는 원래 식물을 키우는 데에는 별다른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어쩌다가 키우게 된 이 선인장은 해마다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 무렵에 화려한 꽃을 피워서 참 보기가 좋았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10년 동안 분갈이라는 것은 해준 적도 없고, 천 원짜리 작은 원예 영양제 하나 사서는 어쩌다 한 번 뿌려준 것이 전부였다. 영어로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을 'green thumb'이라고 한다. 'You have a green thumb.'이란 말은, 당신은 원예에 재능이 있군요, 라는 뜻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런 말을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 자신이 꽃 피워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도 지키는 크리스마스 선인장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남미가 원산지인 이 식물의 유전자에는 추워지는 시기에 꽃을 피우게끔 유전적 설계가 되어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북반구에서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꽃을 피우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해마다 겨울에 이 선인장의 꽃을 보는 것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선 어떤 감동을 준다. 올해는 15개의 꽃봉오리가 올라왔는데, 화분을 옮기다가 실수로 하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14개가 성탄절을 앞두고 피어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다 졌다.


  꽃이 피어나기로 되어 있는 꽃나무라면 반드시 필 것이다. 다만 꽃나무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봄에 피는 목련을 보다 보면, 양지 바른 곳의 목련은 아주 일찍 꽃망울을 터뜨려서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응달진 곳의 목련은 다른 목련들이 다 진 다음에 아주 늦게 꽃을 피우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그 차이가 한달 가까이 나기도 하는 것을 본다. 그렇게 늦게 피우는 목련을 보면서 사람의 인생도 저러할까, 하는 생각을 해마다 하게 되기도 한다. 햇빛도 거의 들지 않는 아파트 구석진 화단에서도 기어코, 어떻게든 꽃을 피워내는 목련의 의지랄까, 나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어떤 경외심을 느끼기도 했다.


  성경의 전도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든 때가 있다'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말로 '시절인연(緣)'이란 표현을 쓴다. 중국 명말의 승려가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절인연이 도래(來)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


  모든 사물의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과 뜻을 다해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인생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 가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그 '때'야말로 그 일이 이루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때인지도 모른다.


  올해 내가 계획했던 것들 가운데, 이룬 것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 밖에 없다. 원래는 소설을 쓰려고 했으나, 어떻게 하다 보니 쓰게 된 글들은 영화 평론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도록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년에는 소설도 쓸 것이다. 내 마음 속의 이야기들이 말문을 조금씩 열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과일 '후숙()'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청과 회사에 다녔던 경험담을 썼던 글쓴이가 후숙을 담당했던 과일은 바나나였다. 그 일을 배우고 한 1년쯤 되었을 때, 다니던 회사에서 미국의 유명한 과일 유통업체의 후숙 전문가를 초빙해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 전문가는 수십년의 경력이 있는 이였는데, 강의 말미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후숙의 시기는 과일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 말은 글쓴이에게 나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후숙에 대한 정해진 매뉴얼과 경험에 의해 후숙은 전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정도의 온도에, 에틸렌 가스는 어느 정도로 주고 하는 정량적인 매뉴얼만 있으면 후숙은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데 과일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후숙 장인'은 과일이 그 후숙의 시기를 결정하는 주체임을 알려줌으로써 글쓴이에게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후숙에 대한 그 말은 나에게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인생의 어떤 일은 그것이 이루어질 만한 때에 이르러서야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기 보다는, 천천히 가더라도 자신이 해야할 것을 잊지 않고 매일 조금씩 해나가는 것. 그렇게 가다 보면 결국에는 그것이 '시절인연'과 만나 꽃을 피우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한 해를 보내며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새해부터는 월요일과 목요일,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글을 더 쓸 수도 있습니다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해요. 독자 여러분들에게 복된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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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2017)'는 잔교(橋), 바다, 하늘, 이 세 군데에서 서사가 나누어 진행된다. 시간대도 각각이다. 잔교에서의 1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의 이야기가 나중에 하나의 시점과 공간에서 만난다. 이렇게 조각난 서사에 관객이 집중하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런 방식이 그럼 유기적으로 잘 조화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겠다. 이 영화의 서사는 마치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처럼 어설프고 한심하게 굴러간다. 보는 내내 도대체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되뇌이게 된다.

 

  놀란은 분명 영화적 재능이 출중한 감독이다. 그가 '인셉션(Inception, 2010)'에서 보여준 재기 넘치는 구성과 연출은 이 감독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만든다. 그런데 '덩케르크(이 발음도 정말 이상하다. 됭케르크로 하던가 차라리 영어식으로 '던커크'라고 하는 편이 낫다)'는 정말이지 실망스럽다. 그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전쟁의 참혹함도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감동도, 그 무엇도 발견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다 어중간한 수준에서 이야기가 더 나아가질 못한다.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는 이미 앞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가 그 극한의 지점을 보여주었다. 스필버그는 거기에다 자신의 장기인 휴머니즘까지 버무려서 정말이지 자신의 역작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앞으로 나오는 전쟁 영화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경쟁해야만 할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에서 보여지는 바다 위의 무수한 시신들처럼 부유하고 있다. 그 정점에 있는 배우는 킬리언 머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번에 전쟁 영화를 찍으려고 해. 배역 하나를 맡아서 해주면 하는데."

  "어떤 배역인데요?"

  "음, 그냥 일단 와서 해보자구."


  아마 내 생각에는 놀란이 그렇게 머피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자기 경력 생각하는 배우라면 이런 영화에 이름도 없는 '떨고 있는 병사(Shivering Solider)'로 나올 이유가 없다. 배역이 무슨 큰 의미가 있지도 않다. 한마디로 겁에 질린 병사로 별로 중요한 역할도 아니다. 킬리언 머피는 놀란과의 인간적 '의리' 때문에 놀란의 요청을 수락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떨고 있는, 뭔가 좀 덜떨어진 병사를 연기하는 킬리언 머피를 보는 것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대체 저 배우가 영화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만 든다.

 

  이 영화에서 오직 찬사받을 만한 것은 한스 짐머가 맡은 '음악'이다. 영화 시작부터 관객의 신경을 미세하게 긁는 음악은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전쟁터로 옮겨놓는다. 뭔가 터질 것 같은 불안과 공포는 '영상'이 아니라 '음악'으로 전달된다. 한스 짐머가 '덩케르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영화가 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더라도, 자신이 만드는 음악만큼은 최고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 영화의 음악은 한스 짐머가 현 시점에서 최고의 영화 음악가라는 점을 입증한다.

 

  놀란의 '덩케르크'는 영화적 성취도 볼 수 없고, 그렇다고 덩케르크에서 있었던 역사적 철수 작전과 관련해 뭔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전쟁 다큐멘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영화가 따라가기에는 버겁다. 스필버그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보여주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성과 함께 이야기를 엮어내는 스토리텔러로서 감독의 역량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놀란의 이 전쟁 영화는 어설픈 시도였고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조각난 서사의 보잘 것 없는 말로를 영화 내내 목도한다. 


  '덩케르크'를 보느니, 차라리 앙리 베르누이의 '쥐트코트의 주말(Weekend at Dunkirk, 1964)'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낫다. 던커크 철수 작전을 다룬 이 영화는 철수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겪는 혼란과 두려움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낸 뛰어난 작품이다. 나는 놀란의 영화적 재능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의 '덩케르크'는 매우 실망스럽다. 디지털이 아닌 아직도 필름으로 찍는 것을 고수하는 놀란이 왜 아깝게 필름과 제작비를 낭비해가며 이런 영화를 찍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어쩌면 놀란은 자신이 전쟁 영화도 잘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카데미 상에 대한 갈망도 있을 수 있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 그리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보여줄 것이 많다. 그런데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그 어떤 영화적 성취도 보여주지 못한다. 전쟁의 잔혹함은 절제되어 있고, 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피상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국군을 구하러 가는 작은 고깃배의 선실에서 어이없이 죽음에 이르는 조지(배리 키오건 분)처럼, '덩케르크'의 서사는 황급히 닫히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가 가져오는 허망함과 부박함이 어떤 것인가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쟁 영화 '덩케르크'는 아주 잘 보여준다.



*사진 출처:(ourculturem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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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그리드는 스무 살이라구요."


  중년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 분)는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연극의 배역 시그리드를 잊을 수 없다. 시그리드는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치명적 매력을 지닌 배역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마리아에게 그 연극의 출연 제의가 다시 들어온다. 그러나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다. 그 역을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고 싫은 마리아는 자신의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시그리드 역을 맡을 수 없는 마리아의 현실을 일깨워 준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는 나이든 여배우가 직면한 현실을 그려내면서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늙음'이다. 마리아는 시그리드 역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명확히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 나이듦을 '쿨하게' 인정하고 아주 현실적이고 산뜻하게 삶을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누군가는 영화 속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 매우 젊거나, 현자이거나, 아니면 바보이거나.

 

  마리아가 헬레나 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과거의 빛나는 기억에 집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에 상대역 '헬레나'를 맡았던 배우가 1년 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영 찜찜하다. 마리아는 그 배역을 맡는다는 것은 자신이 늙었으며, 배우로서도 전성기를 지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려고 하지만,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은 헬레나 역이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사야스는 마리아와 발렌틴이 그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대본 연습하는 과정을 아주 흥미있는 연출로 보여준다. 분명히 배우와 매니저의 평범한 대본 연습인데, 헬레나와 시그리드처럼 마리아가 발렌틴에게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으며 어쩌면 매혹되어 있다는 것을 관객이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장면은 아사야스가 어떻게 배우가 가진 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지를 증명한다. 줄리엣 비노쉬가 마리아에서 헬레나로 일순간에 변모하는 놀라운 연기를 보면, 비노쉬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마리아가 가진 재능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충실한 매니저 역을 아주 잘 소화해낸다. 발렌틴이 시그리드 역의 대사를 할 때, 매우 절제되었지만 결국에는 마리아를 떠날 것이라는 발렌틴의 속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발렌틴은 마리아에게 현실의 시그리드였던 셈이다.


  아사야스가 '늙음'이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어쩌면 다소 진부하고 뻔하기까지 하다. 나이든 배우가 젊은 날의 기억에 집착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연극 상연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뭐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 주제를 깊이있게 다룬 작품이라면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영화 '자연의 아이들(1991)'을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매우 흥미롭고 좋은 영화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들'이다.


  마치 '배우 활용 교과서'같다는 느낌마저 주는데, 그의 '퍼스널 쇼퍼(2016)'에도 출연했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자신 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말 그렇다. 아사야스는 배우가 가진 장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영화 그 자체로 만들어내는 마법을 부린다. 솔직히 나는 그가 감독으로서의 작가적 역량이 있는가에는 그다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배우를 쓰는 방식은 정말로 놀랍다고 생각한다. 비노쉬와 스튜어트의 좋은 연기에 더해, 클로이 모레츠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저돌적인 젊음의 매력으로 무장한 할리우드 인기배우 '조앤'역을 연기한 모레츠는 결코 비노쉬의 노련함에 밀리지 않는다. 시그리드 역으로 연극 공연을 할 때, 대선배 마리아에게 연기 훈수까지 두는 대범함과 자신감은 마치 영화 속 조앤이 모레츠 자신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 시점에서 누가 헬레나한테 신경이나 써요? 이미 볼 장 다 본 불쌍한 여자인데... 아, 선배님 말고 배역이요."


  마리아는 결국 조앤의 연기 훈수를 받아들인다. 비로소 마리아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열 여덟 살 때의 시그리드로 결코 돌아갈 수도 없으며, 세월의 흐름 속에 자신의 청춘과 아름다움이 사그라들었다는 것을... 말로야 계곡을 굽이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뱀 같은 구름처럼 인생이 흘러가고 있음을 마리아가 깨닫는 것이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진정한 완성이자,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지일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매니저 발렌틴이 열차 안에서 태블릿 PC로 지도를 검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PC의 바탕 화면은 '총알이 관통한 유리창'이었다. 어쩌면 '늙음'이란, 시간과 젊음과 아름다움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가고 있음을 어느 순간에서야 확 깨닫게 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돌아보게 된 인생에 그런 구멍이 나있음을 발견하는 일. 그 인생의 구멍으로 흘러내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 매력적인 영화로 관객을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발렌틴의 오른쪽 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발렌틴 역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진짜 문신을 새겼다(2015년 indiewire와의 인터뷰 참조). 피카소의 '게르니카' 상단에 위치한 눈동자 문양이다.


**사진 출처: theconversa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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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방영해준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을 보았다. 나오는 배우들이 하도 젊은 시절의 모습이라 제작년도를 헤아려 보니, 벌써 24년 전 영화다. 당시에 아카데미 상을 9개 부문이나 휩쓴 유명한 영화였는데도 나는 여적지 안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냥 뻔한 사랑 이야기, 정확히 표현하면 '불륜 치정극', 그것도 상영 시간이 2시간 42분이나 되는 영화를 구태여 보고 싶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포장을 해도 결국 이 영화는 분별력 잃은 남녀의 치정극일 뿐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지탄받아 마땅하고, 대부분 끝이 좋은 경우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사건을 사막이라는 물리적 공간, 그리고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으로 끌어와서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영화적 가공의 방식을 통해 불륜은 '불멸의 사랑'이 되고, 관객들은 두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극도로 몰입하게 된다. 마치 끊임없이 부는 사막의 모래 바람이 그 어떤 흔적과 자취도 지워버리는 것처럼, 이러한 류의 사랑이 가져오는 온갖 너절한 뒤끝은 보기가 어렵다.


  격동의 시대사가 들어간 이런 사랑 이야기의 대표작은 아마도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1965)'일 것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유리 지바고와 그의 연인 라라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 여기서도 유리 지바고는 유부남이지만, 라라와 딴살림을 차리고 딸까지 둔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랑에는 진정성이랄지, 뭔가 가슴을 후벼파는 절절함이 있었다. 원작 소설이 가진 서사의 탄탄함 때문이기도 하고, 인물들이 가진 명징한 순수함이 설득력이 있기도 했다. 


  이에 반해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알마시(레이프 파인즈 분)란 인물은 지독히 이기적이다. 국제 사막 클럽의 일원인 그는 함께 지도 제작에 참여하게 된 영국인 동료 제프리의 아내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캐서린은 남편을 생각해서 알마시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알마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그의 집착은 파국을 불러온다. 그는 비행기 사고로 화상을 입고, 기억을 잃은 '영국인 환자'가 되어서 캐나다인 간호사 한나(줄리엣 비노쉬)의 보살핌을 받는다. 영화는 알마시가 되찾게 되는 과거의 기억을 마치 퍼즐의 흐트러진 여러 조각들을 제대로 짜맞추는 과정처럼 구성해 나간다. 한나는 알마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청자(者)인 동시에 그 자신도 영화의 주요한 배역으로 기능한다. 한나와 인도인 킵의 사랑 이야기가 알마시의 사랑 이야기에 대비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밝고 건강한 삶의 기운을 보여주는 사람은 한나 뿐이다. 죽음을 앞둔 영국인 환자를 진심으로 보살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애인과 동료가 전쟁으로 죽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기쁨으로 맞이했고, 상대가 떠날 때가 되자 담담하게 작별한다. 한나가 보여준 그 순수함과 희망의 모습은 줄리엣 비노쉬에게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여우 주연상을 안겨준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2016년에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제작 과정을 회고했다. 튀니지의 사막(스타워즈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에서의 작업이 추위와 바람 때문에 꽤나 힘들었고, 당시 밍겔라 감독과의 소통이나 상대 배우인 레이프 파인즈(Ralph Fiennes, 배우 본인이 그렇게 발음해 주길 원함)와의 러브신에 대한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영화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국 여우 주연상은 받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기는 했을 것이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 가운데 동굴 속에서 죽어간 캐서린에 대해 언급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죽은 캐서린의 모습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느냐,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아마 죽음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는 의견, 사막이란 환경이 매우 건조하고 동굴의 서늘한 기운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의견이 댓글로 달렸다. 어떤 이는 그러한 의견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는데, 영화를 미학적 관점에서 평가해야지 그런 실제적인 관점에서 보아야겠느냐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나도 뭔가 의구심을 갖게 되는 장면이었다. 아, 물론 이 영화에서 시신이 부패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었겠지. 더군다나 이 비장미 넘치는 로맨스, 전쟁 서사극에서 어떻게든 여주인공의 죽음도 아름답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 장면이 보여주는 현실과 영화의 간극이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사랑 이야기가 가진 명백한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동굴 속에서 알마시가 발견한 핏기 없는 창백한, 그렇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캐서린의 모습에서 관객은 '불륜 치정극'의 그 어떤 고약한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아니, 맡아서도 안된다. 캐서린은 '불멸의 사랑'의 주인공으로 남아야만 하기에.


  결국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그렇게 알마시가 사막에 묻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비탄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알마시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은 로맨티스트로 기억되는 것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사랑의 이상향, 결코 깨어져서는 안될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의 표상으로 2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관객들의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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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경험 있지 않아? 내러티브가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 받을 때 말야. 진짜 그런 때가 있다니까."


  언젠가 비평 수업 시작 전에 수강생 누군가 그렇게 하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러티브가 보는 사람을 밀어낸다는 거, 그게 가능해? 참 희한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말의 뜻을 새벽에 EBS 금요극장에서 방영해준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을 보고서 깨달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든 이 SF 영화는 서기 2027년, 인류가 불임의 시대를 맞이하며 겪는 비극을 담아냈다. 영국을 배경으로 이민자와 타종교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압으로 대응하는 정부, 그에 반대하는 '피시당(Fish Party)'이라는 무장 정치 단체가 대립의 축을 이룬다. 기적적으로 아기를 가진 흑인 이민자 소녀 '키'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이다.


  영화는 정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데, 벡스힐 이민자 격리구역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나치 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민자들을 위한다는 피시당의 실체도 그리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태어날 아기를 대중 봉기의 상징으로 내세우기 위해 빼돌리려는 피시당의 리더 루크는 폭력만이 유일한 항거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그 와중에 어떻게든 키와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를 쓰느라 고군분투한다. 말하자면 인류의 희망인 '아기'와 아기 엄마를 무사히 구출해내는 임무를 맡은 셈인데, 중세시대 기사의 여정처럼 보인다. 테오와 기사가 다른 것이 있다면, 테오는 변변한 무기도 없고 오직 아기를 지켜내겠다는 신념과 진심만 있을 뿐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거창한 정치적 구호로 가득차 있으며, 음악은 종교 음악처럼 지나치게 장중해서 관객에게 그러한 미래 세계의 대서사에 감동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뭔가 대단한 메시지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허하고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마지못해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타자를 배척하고 차별하며 폭압적으로 대하는 정치 체제, 또는 그런 사람들의 신념 체계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는데 그렇게 명백하게 드러내는 영화의 방식 또한 투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별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칭찬받을 수 있는 부분은 촬영과 미술에 한정될 뿐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썩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테오의 부인 역으로 나온 줄리앤 무어인데, 그렇게 괜찮은 배우를 데려가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극 초반에 아웃시켜 버리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08년작 '이글 아이(Eagle Eye)'에서 거대 인공지능 컴퓨터 아리아 역을 맡은 줄리앤 무어는 얼굴 한 장면 나오지 않고, 오직 목소리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 대단한 배우를 알폰소 쿠아론은 찬밥 취급해버린다. 내가 줄리앤 무어라면 이런 영화 안나온다. 클라이브 오웬은 열심히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영 겉도는 느낌이다. 무성의한 것은 아니고, 배역에 몰입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테오가 키의 통행증을 발급받기 위해 사촌 나이젤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나이젤은 정부의 막강한 관료로서 미술품 관리청장을 맡고 있는데, 전세계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유명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다. 그의 집에 있는 한쪽 다리가 없어진 '다비드 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것도 흥미롭지만, 나이젤의 저택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돼지 풍선 또한 놓쳐서는 안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1977년 앨범 'Animals'의 앨범 표지에 나온 돼지 풍선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탐욕스럽고 부패한 정치인과 지배 계급을 상징하는 은유로 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미술과 세트에 공을 들였다는 것은 알겠다 싶은 정도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내러티브가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해서 그 내러티브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클라이브 오웬의 겉도는 연기처럼, 나도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엄청난' 영화이기는 하다. 관객이 영화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영화라니...


  "난 그냥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테오가 나이젤에게 100년 후면 그렇게 모아놓은 예술품들을 볼 인류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뭐하러 그리 열심히 모으냐고 하자 나이젤은 그렇게 대답한다. 나도 이 영화는 그다지 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생각할 건덕지가 그다지 많은 영화도 아니다. 쿠아론은 자신의 영화에 거창한 신념을 투사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그래비티(2013)'를 보고 싶은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음악이 좀 독특한 것 같아서 누가 맡았나 찾아보니, 영국 작곡가 존 태브너(John Tavener)이다. 그는 현대 종교 음악 작곡가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다. 역시, 이 영화의 음악은 '종교적'이었다.

**사진 출처: indiewi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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