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시쳇말로 '믿고 보는'과 '믿고 거르는' 그 중간 지점에 있다.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지만, 또 어떤 작품들은 보고 나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아마도 '에이 아이'를 개봉 당시에 '걸렀던' 이유도 그 애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십 년이 지나서 보는 이 영화는 그렇게 참신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스필버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능(영어로는 'flair'라고 표현할 수 있는)이 돋보인다. 스필버그적 감성, 또는 각인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원안은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것이지만, 큐브릭은 자신보다 스필버그가 제작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해서 넘겼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두 감독의 영화 세계가 충돌하는데, 파괴적인 방식이 아닌 스필버그의 융화력에 의해 그럭저럭 봉합되었음을 본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의 인류. 불치병에 걸려서 냉동 상태인 아들을 둔 모니카와 헨리 부부는 인공지능의 로봇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헤일리 조엘 오스몬트 분)는 그렇게 모니카의 아들이 되지만, 아픈 아들 마틴이 병이 나아 집에 오게 되면서 데이비드의 시련이 시작된다. 마틴의 질투와 그로 인해 생긴 오해들로 인해 데이비드는 모니카에 의해 버림받는다. 마틴의 슈퍼 토이(인공지능 곰인형) 테디와 함께 숲에 버려진 데이비드는 '엄마'라고 믿는 모니카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길을 떠난다. 모니카가 읽어준 동화 '피노키오'에 나오는 푸른 요정을 만나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데이비드. 과연 데이비드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미안하다. 너에게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처 알려주지 못했어."


  데이비드의 '엄마'였던 모니카는 그 말과 함께 데이비드를 버린다. 데이비드는 그때부터 세상을 배워나간다. 어떤 면에서 '에이 아이'는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모험담(saga)인 동시에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인공 지능 로봇의 성장은 인간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데이터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데이비드는 애인 대행 로봇 지골로 조(주드 로 분)와 함께 푸른 요정을 찾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근원, 즉 정체성에 대한 지식을 배워간다. 사이버트로닉스 사의 하비 교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자신과 같은 자녀 로봇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전적으로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데이비드의 열망, 즉 인간이 되어 엄마 모니카의 사랑을 다시 받고 싶다는 그 강렬한 소원에 감정을 이입하고 응원하게 된다. 물론 관객들은 그 열망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데이비드의 슬픔 또한 같이 느낄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스필버그가 던진 매우 윤리적인 질문은 끊임없는 일렁임을 일으킨다. 과연 인간의 목적대로 로봇을 만들고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인간과 로봇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모방한 로봇과 인간은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1년에서 이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에이 아이'는 그러한 철학적 의문에 대한 탐구와 함께 영화적 재미도 보여주려고 열심히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시각 효과적인 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미래 세계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존 윌리엄스가 맡은 음악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에이 아이'의 내러티브는 매우 평면적이며, 무려 2시간 반에 이르는 러닝 타임은 너무 길다. 물론 스필버그의 재능은 그 시간마저도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지만, 데이비드의 여행은 지나치게 늘어진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결말도 별다른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데이비드 역을 맡은 아역 배우 헤일리 조엘 오스몬트의 연기는 꽤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감동을 주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어느 한 부분이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오스몬트는 이른 나이에 받은 찬사 때문인지 그 이후 연기자로 성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주드 로의 연기는 그다지 언급할 정도도 되지 못한다. 내게는 주드 로가 나왔던 영화 가운데 그나마 연기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클로저(2004)' 정도 뿐이다. '에이 아이'에서의 주드 로를 보고 있노라면, 저 때부터 탈모로 고생했나 보다, 하는 생각만 든달까...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요정 칼립소가 제안한 '영생'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데이비드는 로봇의 영생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어 엄마 모니카가 있는 집으로 갈 수 있기를 꿈꾼다. 오디세우스에게는 긴 세월을 기다려준 아내 페넬로페가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엄마 모니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슈퍼 토이 테디가 보관하고 있었던 모니카의 머리카락으로 다시 되살려낸 모니카는 오직 하루만 살아있을 수 있다. 그 하루의 시간은 데이비드에게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의 기억을 되살려내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데이비드가 그 기억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을 때, 데이비드는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로봇 소년 데이비드는 영생을 포기하고 엄마 모니카와의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잠을 선택한다. 이건 마치 드라마 '겨울 연가(2002)'의 주인공 준상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시력을 잃는 것을 택하게 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이야말로 바로 인간됨,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스필버그가 보여준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오디세이아는 가슴 아픈 절절함이 가득하지만, 흥미로운 부분도 여럿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의 결말부에 이르고 나면 밋밋한 감동과 조우하게 된다.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데이비드가 이천 년의 세월동안 잠겨있었던 물 속에 그대로 남아있고, 스탠리 큐브릭이 구현하고 싶어했던 암울한 미래 세계의 모습 또한 그렇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감독의 세계가 아름답게 조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필버그는 여러 개의 천조각들을 이어 붙인 멋진 조각보를 꿈꾸었겠지만, 내가 본 것은 '각설이 룩'이다. 그에게는 어렵고 난감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에이 아이'는 스필버그의 범작(作)으로 그렇게 남았다.



*사진 출처: theyoungfol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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