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Nakano Spy School, 1966)'을 보게 되었다. 보고 난 느낌은 그렇다. 아, 이 양반은 꽤나 성깔있는 사람이네, 하는 느낌이랄까... 어떤 감독의 영화 한 편을 보고서 그 영화 세계를 헤아려 보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야스조의 첫 작품으로 본 사람들은 아마도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 세계를 탐험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 한편에서 멈출 것인가에 대해서. 빠르고 명확한 이야기 전개, 독창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감독의 타협하지 않는 근성이 느껴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38년이다. 사관학교 학생으로 임관을 앞두고 있는 예비 장교인 지로(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뜻하지 않게 스파이 학교 학생이 된다. 그에게는 홀어머니와 약혼녀 유키코가 있는데,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하고 1년 가까이 소식을 끊은 채 스파이 훈련을 받는다.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처음으로 부여된 임무는 영국군의 암호 코드 북을 입수하는 것. 동료들과 어렵게 코드 북을 입수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영국군은 암호 체계를 바꾸어 버린다. 지로는 어디선가 기밀이 누설되었다고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약혼녀 유키코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지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육군 나카노 학교'는 1937년에 극비리에 설립된 스파이 학교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38년에 처음으로 뽑은 19명의 학생을 시작으로 2차 대전 이후까지 2500명에 이르는 졸업생들이 나왔다. 그들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첨병으로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 각종 첩보 임무에서부터 일부 아시아 국가의 정보부 창설에 관여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최전선의 비밀 정예요원이었다.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스파이 학교 설립 초기의 모습을 영화적 가공을 통해 재현해 낸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매우 직설적이고 간결한 대사와 짜임새 있는 연출, 빠른 이야기 전개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러닝 타임 1시간 35분이 그야말로 후딱 지나가 버린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야스조는 스파이 학교나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감독의 시선은 애국심과 명예, 의리라는 허울 뿐인 대의명분에 함몰되어가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결국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은 아시아 국가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스파이 학교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설립자 쿠사나기(카토 다이스케 분)가 역설하는 일본이 가진 세계적 책무에 대해 그렇게 반문한다. 여기에서 당시의 일본 지배층과 군부가 가진 시각이 보이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서유럽 제국주의에 맞설 정의로운 전사로 여긴다. 그에 대해 나름의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은 서서히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지면서, 침략전쟁을 돕기 위한 냉혹한 인간 병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들의 모습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화되는 일본 국민들, 식민지 친일 부역자들의 모습과도 기이하게 겹친다.

 

  야스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회고가 아니라, 거기에 희생된 개인의 삶과 인간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결국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스파이가 된 지로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우수한 정예 요원을 얻은 것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지로 자신이 고백했듯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당시의 일본에서 과거의 세대에게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들면서 크게 흥행했고, 속편까지 잇달아 제작되었다.


  주연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의 연기를 비롯해 쿠사나기 중위 역으로 나온 카토 다이스케의 연기가 매우 좋다. 이치카와 라이조의 절제된 표정연기와 지로 그 자체를 보여주는 캐릭터 재현은 이 배우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만든다. 명문 가부키 집안에 입양된 배경을 지닌 이 배우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무려 150여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한 명배우였다. 그러나 직장암으로 서른 일곱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 영화는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찍은 영화이다. 가토 다이스케는 일본 영화의 주요 조역으로 나왔는데, '7인의 사무라이(1954)'를 비롯해 온갖 역사물과 현대물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이다. 다이스케는 특히 코믹적 면모에 강점을 갖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꽤나 흥미있는 스릴러물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성 캐릭터들의 수동성과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선명한 틀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야스조의 영화 세계에 대한 초대장 같기도 하다. 그러한 점들이 그의 다른 작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확대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이들은 탐험을 나설 것이다. 나는 그 탐험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평범한 풍속 영화를 만들었다며 비판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가운데 아직 못본 것이 있다. 차라리 그걸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worldscienma.org (상단 사진: 이치카와 라이조, 하단 사진: 가토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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