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에서는 금요일 밤에 'EIDF 걸작선'을 방영해 준다. 지나간 EIDF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 가운데 괜찮았던 다큐들을 뽑아서 보여주는 것인데, 지난주 금요일에는 레베카 스턴의 '그루밍(Well Groomed, 2019)'을 방영했다.


  '그루밍'은 미국의 애완견 미용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이다. 애견 관련 사업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에서 애견 미용 시장은 매우 유망한,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시장임이 분명하다. 그 첨단을 보여주는 애견 미용 대회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양극단으로 나뉠 수 있다. 개들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학대하는 것이라는 의견부터, 개를 주제로 한 새로운 창작과 예술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라는 시각까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어느 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루밍'은 아무런 관점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매우 실망스러운 다큐이다.


  이런 다큐를 'EIDF 걸작선'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책임에 대해 편성 담당자는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나간 EIDF 상영작 가운데 아무 작품이나 상영해도 이 다큐 보다는 나을 것이다. 문제의식도 부재하고, 그 어떤 작가적 관점도 볼 수 없는 이 다큐가 지난 2019 EIDF에 상영되었다는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는 EIDF의 수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루밍'은 미국 애견 미용 대회를 그냥 취재한 화면들의 나열일 뿐이다. 주요 참가자들의 애견 미용에 대한 의견을 '열정'과 '창조적 영감'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이 다큐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매우 불편해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 애견 미용 대회를 보는 비판적인 관점이 들어가기는 한다. 그런데 이 부분도 문제가 있는 것이, 방영된 어느 토크쇼의 한 대목을 따와서 집어넣었다. 토크쇼 참가자는 애견 미용은 개의 입장에서는 학대이고 인간의 그릇된 욕망의 반영일 뿐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에 대해 애견 미용 대회의 참가자인 캣 옵손은 개들은 자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선택할 수 있다는 말로 강변한다. 감독 레베카 스턴은 그야말로 그 어떤 작가적 입장도 없이 토크쇼 편집 화면 뒤에 숨어있다. 그냥 이런 입장도 있으니 보는 관객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건데, 이는 감독의 매우 비겁하며 무기력한 자세를 입증한다.


  이 다큐는 일견 구스 반 산트가 2003년에 만든 '엘리펀트(Elephant)'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만든 '엘리펀트'는 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당시 이 영화를 본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새로운 영화적 관점을 제시했다."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아무 의미없는 영화이다."


  '엘리펀트'는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까지의 일상을 카메라로 쭉 따라간다. 관객들은 그들이 범행을 저지른 동기나 어떤 마음의 배경을 읽고 싶어하지만, 산트는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마치 총격전이 이루어지는 비디오 게임 화면처럼 펼쳐지는 범행 장면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엘리펀트'는 사건을 보여줄 뿐, 그 뒤에 숨겨진 또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의 존재에 대해 철저히 부정한다. 이것을 현실의 비극적 사건을 보는 새로운 영화적 관점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작가적 관점의 포기로 볼 것인지는 관객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구스 반 산트는 그냥 겉멋 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EIDF가 시작된 2004년부터 열렬한 시청자였던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EIDF의 작품들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전반적인 다큐 상영작의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획 전반의 문제와 함께 다른 외부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특히 특정 국가와 그 나라가 지원하는 다큐멘터리 협회와 관련된 상영작들이 눈에 띄게 진입했는데, 이와 관련된 잡음도 있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주최 측에서는 EIDF의 수익성 문제도 제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EBS는 공영방송으로서 좀 더 공익적인 목적을 더 우위에 두어야 하며, 그건 EIDF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상업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새롭고, 실험적인 다큐 작품들을 대중에게 소개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수준 높은 상영작들을 선정해야 한다. '그루밍'과 같은 한심한 다큐멘터리가 상영작으로 선정되는 일은 피했어야 했다.


  지난 주말에 '그루밍'을 보고 나서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적어도 '걸작선'이란 이름만 들어가지 않았어도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EIDF는 올해 열 여덟 해를 맞이한다. 그 연륜과 명성에 걸맞는 다큐멘터리를 올해는 만날 수 있을까? '그루밍'과 같은 다큐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라는 주제로 분류되어 상영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다큐는 다큐라고 할 수 없다. EIDF의 분발과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 출처: h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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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1-0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특히 요즘같이 자료 (영상,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바라볼지가 중요한 것 같은데..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