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서부, 환대받지 못한 사람들

7편 The Geography of Hope(1877-1887)   1시간 25분


  켄 번즈는 미국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일련의 다큐멘터리로 명성을 얻은 제작자이다. 그는 해설 위주의 건조하고 딱딱한 역사 다큐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시적이고 문학적인 것이었다. 번즈는 시와 편지, 문학 작품에서 발췌한 글들을 내레이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는 독특한 자료 화면 배열로 정적이고 지루한 다큐에 '재미'라는 요소를 더했다. 'The West'에서도 번즈의 이런 제작 스타일이 드러난다. 서부 개척 시대를 살았던 여러 다양한 인물들의 서간문, 일기, 소설의 문장들이 성우들의 목소리로 낭독된다. 주요 해설자의 흡인력있는 내레이션, 권위있는 연구자들의 부가 설명이 곁들여지면서 다큐의 내용은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제 'The West'의 7편에서는 미국의 서부 정복이 완료된 이후의 후일담이 펼쳐진다. 인디언들을 내쫓은 땅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이주민들이 계속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에는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의 주역이었던 중국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해방 노예들 또한 서부에서 기회를 찾고자 했다. 브리검 영 사후의 몰몬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나갔을까? 그리고 보호구역으로 들어간 인디언들이 있었다. 인디언들이 원하는 평화는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땅을 뺏은 것으로도 모자라 원주민 문화마저 말살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1877년부터 1887년까지 무려 450만 명의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들었다. 서부에는 그렇게 정착한 이주민들이 세운 도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그 땅에서 모두가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1877년, 마지막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했다. 연방의 뜻에 따른 남부 재건은 무너졌고, 새로운 남부의 주법이 제정되었다. 노골적인 흑인 차별의 움직임 속에 KKK단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흑인들은 차별을 피해 아프리카나 캐나다로 떠나기도 했다. 서부 또한 희망의 땅이었다. 남부를 떠나는 흑인들은 자신들을 'exoduster'라는 이름으로 칭했다. 이른바 '남부 대탈출(exodus)'의 주요 목적지는 캔자스였다. 1880년까지 15000명의 흑인들이 캔자스에 정착했다. 네브래스카, 다코타도 흑인 이주민들이 선호하는 정착지였다.

  이주민들은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땅을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홍수, 토네이도, 메뚜기떼, 가뭄, 폭풍...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정착민들은 그 희망의 감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땅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인디언들도 희망을 갖고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시팅 불(Sitting Bull)은 캐나다 변경에서의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스탠딩 록 보호구역(Standing Rock Reservation)으로 돌아왔다. 1887년에 블랙 힐스를 미 정부에 빼앗기고 4년이 흐른 뒤였다.

  보호 구역의 삶은 감옥에서 사는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2주 마다 몇 마리의 버팔로가 제공되었다. 부족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식량으로 인디언들은 굶주렸다. 인디언들은 보호 구역 밖으로의 외출과 여행도 허락되지 않았다. 1883년, 미 의회 의원들이 스탠딩 록을 방문했을 때 시팅 불은 울분을 터뜨리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것은 대등한 관계에서의 의사 표현이라기 보다는 부족의 생존을 위한 간청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본격적인 인디언 동화 정책을 추진한다. 1883년, 선교사들에 의한 인디언 아동들의 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새롭게 지은 영어 이름으로 불렸고, 가족과 떨어져서 기숙사에 머물렀다. 81개의 기숙사 학교와 147개의 일반 학교가 생겨났다. 시팅 불의 자녀들 또한 그 학교에 다녔다. 다큐에서 나이든 인디언 여성은 영어가 아닌 인디언 말을 썼다고 자신의 입에 비누를 짓이겨 넣은 백인 여사감에 대해 증언한다.

  인디언들처럼 중국인들도 서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대륙 횡단 철도의 건설 노동자로 들어온 중국인들은 30만 명에 이르렀다. 백인들의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은 계속 커져갔다. 그 가운데 터진 일이 1871년 LA에서 일어난 'Chinese massacre'였다. 처음 시작은 여자 하나를 두고 벌어진 두 중국인 갱단원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곧 백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방화, 살상으로 이어졌다. 28명의 중국인들이 사망했다. 타인종에 대한 명백한 테러이며 학살이었다. 1882년, 캘리포니아 의회는 중국인 이민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자신들만의 적절하고도 야만적인 방식으로 중국인 이민자들을 배제시켰다.

  그 즈음, 몰몬교도들에 대한 미 연방 정부의 통제력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몰몬교의 도시 솔트 레이크 시티에도 많은 이민자들이 도착했다. 매춘업소가 생겨났고, 거룩한 사막 성전 도시는 타락에 물들어 갔다. 1882년, 에드먼드 법안(Edmunds Act)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 따라 일부다처제는 연방법에 의해 5년형의 구금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되었다. 1300명의 일부다처 몰몬교 남자들이 투옥되었다. 몰몬교도들은 연방 대법원에 항소까지 했으나 패했다. 교회가 해체되고 소유 재산이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몰몬교의 수장 윌포드 우드러프는 1890년, 일부다처제 교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몰몬교 지도부는 자산을 매각하고 정당을 해산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896년, 유타주는 45번째로 연방에 가입한다.

  서부는 거칠고 황량한 땅이었다. 1886년의 극심한 가뭄, 그리고 1887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최악의 한파가 서부를 덮쳤다. 많은 소들이 죽어나갔고, 그제서야 서부의 사람들은 그 땅과 기후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서부라는 공간이 갖는 모험과 도전, 로맨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버팔로 빌(Buffalo Bill)은 대단한 흥행사였다. 그의 'Wild West' 쇼는 서부에 대한 거대한 서사극이었다. 총잡이들과 군인, 인디언들의 싸움이 대중의 오락거리로 재탄생했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괴롭히고 무찌르는, 현실의 피해자가 가해자 노릇을 하는 기이한 쇼였다. 그럼에도 당시의 관객들은 열광했고, 버팔로 빌은 유럽 순회 공연까지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버팔로 빌의 공연을 보고 극찬했다. 버팔로 빌은 시팅 불을 쇼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시팅 불은 높은 출연료를 받고 쇼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버팔로 빌을 아주 좋아했으며, 와일드 웨스트 쇼에 나오는 여성 명사수 애니 오클리(Annie Oakley)를 수양딸로 삼기도 했다. 비록 패배한 원주민족 추장이기는 했으나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그렇게 라코타족 추장의 영욕의 생애가 저물고 있었다.
 
 
*사진 출처: pbs.org        뛰어난 흥행사 버팔로 빌(
Buffalo 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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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lex 16mm. 1학년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주로 썼던 카메라 기종이다. 지금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은 아마도 디지털 기기로 공부하고 작업할 것이다. 내가 배울 당시에 영화에서 디지털이란 저예산, 실험 영화에서나 시도되는 것이었다. 디지털이 필름을 막 밀어내는 시기였다. Bolex로 찍은 16mm 필름을 현상해 보면, 거칠고 누런 색감이 났다. 마치 굵은 모래 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16mm=학생용=단편=실험 영화, 이런 공식이 적용되곤 했다. 그렇다고 이 카메라가 구닥다리에 우습게 볼 기종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Mark Jenkin은 'Bait'란 장편 극영화(1시간 29분)를 그 Bolex로 찍었다(조만간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다). 2019년작이다. 영화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것은 장비가 아니다. 작가적인 관점에서의 성실한 관찰과 깊이있는 사유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의 다큐멘터리 제작 경향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LGBT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다. 'No Ordinary Man(2020)'은 남장 여자의 삶을 살았던 재즈 뮤지션 Billy Tipton의 삶을, 'The Sound of Identity(2020)'는 트랜스젠더 바리톤 가수 Lucia Lucas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다큐 모두 소재에 있어서 파격성이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소재가 주는 반향을 뛰어넘어 그것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얼마나 잘 변주해 내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두 작품 모두 매우 실망스러웠다.

  'No Ordinary Man'은 지금의 시대를 사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이 나와서 빌리 팁튼과 자신의 삶을 견주어 이야기한다. 성적 다양성에 닫혀 있었던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과한 팁튼의 삶은 대충 훑어보고 만다. 일종의 메타적 방식(meta documentary)을 적용한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난삽하고 경박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The Sound of Identity'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바리톤 가수 루시아 루카스의 Tulsa Opera단 데뷔 공연 준비과정을 따라간다. 최초의 트랜스젠더 오페라 가수라는 점에만 집중한 나머지 흥미 위주의 가벼운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다큐는 중심 소재가 되는 인물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젊은 여성 감독 Sarah Baril Gaudet의 2020년작 다큐 'Passage(2020)'는 앞서 언급한 두 다큐에 비한다면 분명한 자기 색깔과 나름의 성찰을 담고 있다. 다큐의 주인공은 시골 마을의 두 친구이다. 캐나다 퀘벡주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Temiscamingue은 감독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과 나즈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그곳은 전형적인 시골이다.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8살의 Yoan과 Gabrielle는 친한 이성 친구이다. 동성애자인 Yoan은 단조로운 시골에서 벗어나 대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생각 중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Gabrielle은 말 사육장에서 일하면서, 동물 관리와 치료에 대한 공부를 해볼까 생각한다. 그러러면 집을 떠나 100km 떨어진 낯선 도시의 대학에 가야한다.

  'Passage'는 그 두 친구의 일상을 담담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그들의 고향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다큐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그 Temiscamingue의 자연이 차지한다. 넓게 펼쳐진 녹색의 평원,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 한가롭게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 그렇지만 그곳의 풍광과는 달리 가브리엘과 요안의 마음은 진로와 앞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물결이 일렁인다.

  동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요안은 도시에서의 삶을 위해 준비 중이다. 게이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는다. 거주할 곳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일자리를 얻을지도 고민한다. 요안의 조부모는 낯선 도시로 떠나게 될 손주가 걱정스럽지만, 기꺼이 응원한다. 가브리엘은 직업을 위해 진로를 결정했지만, 부모와 남자친구가 있는 고향땅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가브리엘과 요안은 그러한 고민들을 진솔하게 나누면서 마음의 짐을 덜어낸다. 가브리엘이 자신보다 8살이나 많은 남자친구에게 느끼는 세대차와 둘 사이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을 때, 요안이 해주는 말들은 전문 상담가 못지않다. 남자친구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속깊은 친구 요안. 가브리엘과 요안이 그렇게 의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친구'라는 단어의 온기를 느낀다.

  '통과'라는 의미의 제목답게 다큐는 요안과 가브리엘이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들의 마을을 지나는 길고 한적한 도로변의 풍경도 자주 나온다. 진로, 성정체성, 연애, 가족과의 관계, 그 모든 것이 두 친구가 나아가는 길 위에 놓여있다. 어찌보면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걱정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의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품고 감싸안는다. 그것은 도시에서 사는 그 또래 청년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Sarah Gaudet 감독 자신에게도 Temiscamingue의 자연이 준 평화로움과 사유의 지평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Passage'에는 감독의 고향땅과 그곳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다큐는 요안과 가브리엘이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은 이제 막 인생의 작은 길목을 통과했다. 감독 자신에게도 의미있는 첫 장편이 된 'Passage'는 젊은 다큐 제작자로서 앞으로 내놓을 작품들에 대한 희망의 빛을 던진다. 이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다큐는 영상물 창작자가 갖추어야할 덕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할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것. 좋은 작품이란 이 간명한 원칙이 구현된 결과물이다. 그것을 제대로 해내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영화'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기도 하다.  



*사진 출처: f3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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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성지 Black Hills, 인디언 전쟁의 끝

6편 Fight No More Forever(1874-1877)          1시간 25분
     

  대륙 횡단 철도 개통된 1869년부터 1874년까지 수백만 명의 이주민들이 서부로 몰려왔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땅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의 거주지를 계속해서 뺏어나갔다. 표면적으로는 돈을 주고 인디언들의 땅을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헐값에 넘기기를 강요하는 '강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마도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시지. 살려는 드릴게' 같은 협박이 아니었을까?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설고 황폐한 보호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Oregon의 Wallowa 지역에 사는 Nez Perce족 추장은 미국 정부가 내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고 버텼다.

  라코타족도 살던 곳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코타에 위치한 'Black Hills'는 수족 인디언(라코타족은 수족의 한 분파)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1868년에 체결된 포트 라라미 조약(Treaty of Fort Laramie)에 따라 블랙 힐스에 대한 수족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된 금이 문제였다. 15000명의 광부들이 블랙 힐스로 몰려들었고, 그것은 곧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약을 깨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6백만 달러에 블랙 힐스를 넘기라는 미 정부의 제안을 추장 시팅 불(Sitting Bull)은 거부했다.

  이제 결전은 불가피해졌다. 1876년, 라코타와 아라파호, 샤이엔족 인디언 연합군과 커스터가 이끄는 부대가 맞붙었다. 시팅 불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예지적 환영을 본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메뚜기떼 같은 미군들이 모두 죽어 땅에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렇게 리틀 빅혼 강(Little Bighorn River)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미 기병대를 이끄는 커스터는 남북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올린 지휘관이었다. 젊고 야심만만한 그는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화려한 군복을 입었고 신문사 기자들을 위해 특별 브리핑을 하는, 당시로서는 미디어 친화적인 유명인사였다. 커스터는 인디언들과의 싸움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인디언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고 인디언들을 회유해서 내쫓을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Crazy Horse와 Black Kettle 같은 인디언 전사들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6000명의 인디언들 가운데 1800명이 전사였다.

  당시 군인들의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잡다한 무리로 구성된 오합지졸과도 같았다. 군인들은 알콜 중독에 시달렸고, 자살자 수는 그 2배에 달했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질병이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인디언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군인 700명을 이끌고 커스터는 리틀 빅혼 전투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전투는 커스터에게 패배와 함께 죽음을 안겨주었다. 인디언들에게는 최초이자 마지막 승리로 기록된 전투였다. 1864년 샌드 크리크에서 동족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블랙 케틀은 비로소 원한을 갚을 수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그 승리는 잠깐 동안의 영광이었다. 미국 정부는 곧 반격에 나섰다. 필립 셰리든 장군을 앞세운 후속 토벌대가 커스터의 복수에 나섰다. 인디언들은 결국 블랙 힐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팅 불은 자신의 부족들을 이끌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캐나다 국경 인근의 인디언들은 시팅 불과 부족민들을 환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사냥할 버팔로도 적었고, 어떻게든 먹고 살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 그렇게 떠돌이 생활이 이어졌다.

  한편, 몰몬교도들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미국 정부는 유타주에 대한 전면적 통제권을 얻으려고 나설 참이었다. 브리검 영에 의해 다스려지는 은둔의 왕국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미 정부는 1857년에 몰몬교도들에 의해 이주민 여행자들이 학살당한 메도우산 사건을 들고 나왔다. 브리검 영을 잡아넣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모자로 지목된 John D. Lee는 끝까지 브리검 영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결국 1877년, Lee의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해에 브리검 영이 숨을 거둔다. 30년 동안 사막의 도시 솔트 레이크를 세우고 몰몬교를 이끌었던 수장의 죽음이었다.

  1877년, 미국은 블랙 힐스를 점령했다. 라코타족에게 닥친 비운을 다른 인디언 부족들도 마주했다. 남은 인디언들은 셔먼의 군대를 피해 도망쳤다. 이제 인디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백인들의 옷을 입었다. 1804년,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탐험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인디언들이었다. 원정대는 인디언들에게 미국이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깨졌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버팔로들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이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라코타족 추장 Sitting Bull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조지 커스터(George C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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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013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에서 혈육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평범한 회사원 남자는 어느 날, 자신의 친아들이 병원에서 뒤바뀌어 다른 집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것은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집도 마찬가지. 서로 뒤바뀐 아이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두 집안은 당분간 시간을 갖기로 한다. 남자는 정기적으로 먼 거리를 운전해서 아들을 만나고 온다. 그가 차로 지나는 고속도로 장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길게 이어진 전선주의 선들이었다. 그것이 꽤 흥미롭게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선들로 '혈연'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그런 질문에서 더 나아가 그는 2018년작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Shoplifters)'에서 혈연이 아닌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도쿄의 비좁고 낡은 어느 주택, 그곳에서 사는 쇼타에게는 할머니와 부모, 이모가 있다. 그런데 쇼타와 아버지가 동네 마트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영 이상하다. 아버지 오사무는 아들에게 마트의 물건들을 훔쳐오게끔 수신호를 보내 지시한다. 자신이 직접 훔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도둑질을 시키는 아버지라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다.

  훔치는 것은 쇼타의 엄마도 마찬가지. 세탁부 일을 하면서 세탁물에서 나오는 소소한 물건들을 죄다 챙긴다. 오사무는 어느 날, 쇼타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베란다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유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유리를 데리고 있으면 문제가 될 줄 알면서도,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에게는 다시 돌려보낼 수 없어서 그렇게 유리는 '린'이라는 이름의 막내딸이 된다. 곧 집안의 막내 린은 쇼타와 짝을 이루어 동네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 '万引き家族' 그대로 '도둑질 가족'이 되는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기이한 집안의 가족들이 지닌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쇼타는 부부의 친아들이 아니며, 오사무와 노부요도 진짜 부부가 아니다. 할머니 하츠에와 이모 아키도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다. 어쩌다 보니 그냥 모여서 살게된 이들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학대당하는 동네 꼬마 유리를 거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보살핀다. 이 가족이 여름의 해변가에서 즐겁고 평화롭게 한 때를 보내는 장면에 이르면, 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견고해 보이는 이 가족의 유대감이 얼마나 얄팍하고 위선적인가는 할머니 하츠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드러난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그나마 보탬이 되었던 하츠에의 연금 때문에 가족은 그 죽음을 숨기기로 한다. 마당에 암매장을 한 후 계속 연금을 타내며, 쇼타와 린의 도둑질도 계속 된다. 쇼타는 시간이 갈수록 어른들의 위선과 좀도둑인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다. 과연 이 가족의 일상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서 '혈연'의 의미,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옥죄는 '경제적 궁핍'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남남으로 맺어진 쇼타의 가족은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가족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졌느냐가 아니라, '돈'이다. 막노동을 하는 오사무가 다리를 다쳐 일을 쉬게 되자 집안의 경제는 타격을 받는다. 거기에다 아내 노부요까지 해고당하면서 이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된다. 어린 쇼타와 린이 도둑질을 해야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성인 전용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돈을 버는 아키의 경우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과연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족'의 이상은 얼마만큼의 현실성을 갖고 있는가? 코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이란 대명제는 '핏줄'이라는 불가침의 전제 보다 더 엄혹한 '돈'의 지배를 받는다.

  삶의 괴로움을 아이에 대한 학대로 드러내는 유리의 친부모에게서 볼 수 있듯, 혈연은 가족의 절대적 성립 요건이 아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쇼타의 '가짜 가족'이 해체되면서 '린'으로 지내던 유리도 친부모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무관심과 학대로 추운 겨울에 베란다에서 떨고 있었던 유리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유리는 베란다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얼른 나와 본다. 그리고 밖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빛에는 그리움이 담겨져 있다. 유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그 베란다에서 자신을 데려가 주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코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닫는다. 영화는 사람들이 가족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이 진짜 가족'이라든지, '가족이 행복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돈이 아니다'라든지 하는 것들. 그에 대한 답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관객의 마음 속에 그 답에 대한 생각의 파문을 던지는 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뜻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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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명,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

5편 The Grandest Enterprise Under God (1868–1874)   1시간 24분


 
  전쟁터의 총성과 화염은 이제 사라졌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본격적인 재건에 돌입한다. 'The Great Pacific Railway', 광대한 미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862년, 링컨은 'Pacific Railroad Act'를 승인한다. 엄청난 공사비와 인력이 투입될 이 사업의 주체로는 두 개의 회사가 선정되었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와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 Road)가 그 주역들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시작되는 센트럴 퍼시픽 철도와 동부의 유니언 퍼시픽 철도를 잇는 공사였다. 그렇게 동과 서에서 두 회사는 철로를 놓기 시작했다. 양쪽의 선로가 만나는 때가 미국의 동서 횡단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될 터였다.

  철도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뉴멕시코의 보스케 레돈도 보호구역(Bosque Redondo Indian Reservation)에 미 정부는 정기적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거칠고 황량한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은 외부의 식량 조달에 의존해야했다. 텍사스의 소떼들을 이동시키는 'Goodnight-Loving Trail'은 그 대표적인 통로였다. 전쟁이 끝난 후 북부의 쇠고기 수요가 증대했고,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 필요했다. 연방 정부는 두 철도 회사에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서 공사를 하도록 했다. 

  선로 공사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아일랜드, 멕시코, 독일, 영국, 전직 군인과 해방 노예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사 구간 곳곳에서 그들이 받는 임금을 노린 매춘부, 포주, 도박장 운영자, 총잡이, 술집이 흥청거렸다. 그렇게 갑자기 많은 인구가 유입되자 남부 대평원(Great Plains)의 인디언들은 철도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의 버팔로 사냥으로 버팔로들이 씨가 말라가는 판국에 인디언들의 생존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니언 철도 회사는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서부의 센트럴 철도 회사의 공사도 순탄치 않았다. 자연이 인간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대한 산과 절벽, 거친 강이 공사의 장애물이었다. 특히 돌산을 폭파하는 것이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일을 위해 고용된 이들은 중국인 노동자였다. 비록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체구는 작았지만, 중국인들은 성실함과 끈기로 그 작업을 해냈다. 바구니에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밧줄로 연결된 절벽을 오르내리며 돌산을 부수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약 600명의 중국인들이 죽었다. 초기 중국인 이민자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하며 정착했다. 1869년 5월, 드디어 동과 서에서 시작된 철로가 하나로 만났다.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된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철도가 악귀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몰몬교도들에게도 그것은 재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에게는 안온한 사막의 성전 도시 솔트 레이크 시티에 이민자들이 철도를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민자들은 몰몬교의 일부다처제를 악습으로 보고 개탄했다. 1870년,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의 교리 수호를 위한 '분노 집회(Indignation Meeting)'를 개최한다. 몰몬교도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며,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당연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런 가운데 여성 몰몬교도들 사이에서는 투표권 쟁취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에 브리검 영은 미국에서는 최초로 유타주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했다. 어떻게 그곳에서 일부다처제와 여성 인권 운동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여성 투표권 운동가(Suffragette)들은 여성 몰몬교도들의 투표권 쟁취에도 불구하고, 몰몬교 여성을 자신들의 테두리에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철도의 개통으로 새롭게 부상한 도시는 캔자스 Dodge City였다. 그곳은 버팔로 사냥의 중심지였다. 50만 명의 이주민들이 캔자스에 정착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버팔로는 '걸어다니는 황금'으로 여겨졌다. 거대한 열풍이 불었다. 모두들 총을 들고 평원의 버팔로를 닥치는 대로 잡았다. 버팔로는 버릴 것이 없었다. 쇠고기는 식량으로, 뼈는 비료 회사가 가져갔다. 3백만 마리의 버팔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철도가 개통된지 2년만의 일이었다. 1874년, 미 의회는 버팔로 사냥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그랜트 대통령은 거부했다. 남부에서는 여전히 버팔로 사냥이 이어진다.

  버팔로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업은 '카우보이(Cowboy)'였다. 소떼의 목축과 이동의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카우보이들은 서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전직 남군 기병대, 이민자, 멕시칸, 인디언, 그리고 흑인들도 있었다. 이 새로운 직종에서는 차별이 적었고 관대함과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목축 사업에 점차 큰돈이 몰리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서로의 이익을 두고 일어나는 폭력으로 총잡이와 보안관이 등장했다. 서부 영화의 주인공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도 보안관으로 그렇게 이름을 알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부 영화의 주요한 상징들은 이 시기의 산물인 셈이다.

  남부 평원의 인디언들은 철도가 싣고 온 이주민들과 경쟁해야 했다. 인디언들의 저항은 군대의 토벌로 이어졌다. 1854년부터 1890년까지 수족과 샤이엔족 인디언들은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치는 1874년에 끝난다.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 장군은 지속적인 작전으로 인디언들을 굴복시켰다. 이어지는 'The West'의 6편에서는 인디언들의 최후의 결전이 펼쳐진다. 인디언들에게 이어진 피와 공포,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대평원에서 사라진 버팔로들과 함께 인디언들도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 끝에서 인디언들이 만난 것은 어둡고 축축하고 황량한 보호구역(Reservation)의 삶이었다.  



*사진 출처: pbs.org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식(1869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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