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솔로(Free Solo, 2018)', 장비 없이 맨몸으로 암벽을 타는 클라이머 알렉스 호놀드의 엘 케피탄(El Capitan) 도전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 다큐를 보면서 받았던 나름의 충격과 감정의 여진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문자 그대로 백척간두(竿頭)의 삶을 사는 그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등반 도중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치명적인 부상 내지는 사망으로 이어지는 그 도전의 여정. 열정인가, 목숨을 건 도박인가, 보는 내내 들었던 여러 생각들은 다큐가 끝나고서도 머릿속에 헝클어진채 있다.


  호주 출신 제니퍼 피돔 감독의 2017년 다큐 'Mountain'에는 알렉스 호놀드 같은 이들이 떼로 나온다(그도 다큐의 초반부에 잠깐 나온다). 자신들을 뒤따르는 엄청난 눈사태 속에서 스키 타는 이들, 윙슈트(wingsuit)입고 협곡 사이를 날아다니는 사람들, 수직 절벽에서 산악 자전거로 낙하하는 이들, 절벽 사이를 연결한 외줄을 타는 사람... 그냥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Mountain'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산에 바치는 영상 찬가이다. '찬가'라는 표현에 걸맞게 음악을 담당한 호주 체임버 오케스트라(ACO)의 연주가 정말 빼어나다.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겨울'이 설산을 내려오는 보더와 스키어들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어 흐른다. 300년 전의 이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이 산을 주제로 한 다큐에 이토록 아름답게 쓰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내레이션을 맡은 이는 배우 윌렘 데포. 영상과 음악이 주가 되는 다큐라서 해설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차분하고도 또렷한 발성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배우는 얼굴 이전에 목소리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와 오케스트라는 촬영된 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현장 녹음을 했다. 다큐 도입부에 그 장면이 나온다. 내레이션과 음악의 역동적인 조화는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다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의 풍경만을 담지는 않는다. 흑백 영상 자료 화면을 통해 산이 외경의 대상에서 어떻게 모험과 스포츠의 현장이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 본다. 드론을 비롯해 다양한 첨단 촬영 기기로 담아낸 기기묘묘한 산의 절경들이 74분 동안 펼쳐진다. 다큐 내내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감독 제니퍼 피돔의 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2015년에 찍은 다큐 'Sherpa'도 역시 산과 그 사람들에 대한 다큐다. 이 감독에게 산이란 어쩌면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평온과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불편해하며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갈구한다. 'Mountain'에 나오는 극한의 모험가들이 그런 이들일 것이다.


  "춤을 추는 이들은 음악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다큐의 시작에 그 문장이 나온다. 과연 'Mountain'의 그 많은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일까? 이에 대해 뇌과학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아드레날린, 도파민과 같은 물질의 폭주하는 연쇄작용은 육체적, 정신적 쾌감의 중독을 가져온다. 이른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즐기는 이들은 그 반응의 역치(threshold)가 일반인에 비해 높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그 연구 결과를 들은 것이 30년 전 일이다. 이제 뇌과학은 세포와 물질의 차원에서 유전자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러니 이 다큐에 나온 이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에 따라 사는 이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가, 온갖 부상과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도전하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등산복의 그 유명한 '북벽' N사의 로고를 발견했다. 어쩐지 다큐에 나오는 등반가들 옷에서 그 상표가 눈에 참 많이 띄었다. 그러고 보니, '프리 솔로'의 알렉스 호놀드도 다큐 내내 그 회사 옷을 입고 나왔었더랬다. 뭐랄까, 이 산악 계통 영화나 다큐 제작에 있어서 'N'사는 꽤나 큰손인 모양이다. 보고나서 기묘하게 씁쓸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하긴 무슨 일이든 돈이 있어야 굴러간다. 어떻게 보면 영화도 외피는 예술의 형태를 띄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은 처절하고 치열한 자본의 세계임을 이 산악 다큐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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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법 책들에 나오는 글쓰기 원칙이란 것이 있기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이런 규칙이다. '정해진 극중의 시간 속에서 주인공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변화, 성장, 깨달음,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어떤 것이든 주인공은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와는 달리 나중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자와 관객들이 그런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 감독의 2016년작 '토니 에드만'의 이네스(잔드라 휠러 분)는 바로 인물의 그 '변화'를 보여주는 괜찮은 예이다. 


  러닝타임 2시간 42분, 꽤나 긴 시간 동안 크게 빵빵 터지는 무언가는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소소한 재미들이 있다. 뭔가 낯설고도 독특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이 코미디 영화의 여정은 정말 기이하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고무공을 따라가는 느낌이 든다. 그 여정의 끝에 만나는 감정은 약간의 평온함과 안도감, 그리고 미소이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인 딸 이네스와 소원한 사이인 아빠 빈프리트. 그는 휴가를 내서 딸이  있는 루마니아로 찾아간다. 딸은 그런 아빠와의 만남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아빠는 잠깐 딸 얼굴 보고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딸 주변을 계속 맴돈다. 우스꽝스런 틀니에 가발까지 쓰면서 자신을 인생 코치 '토니 에드만'으로 소개한다. 이네스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런 아빠를 때론 못 본 척하면서 이 부녀(女)는 나름의 역할극을 해나간다. 아빠는 힘들고 빡빡한 회사 생활에 치이는 딸이 안쓰럽기만 하다. 뭔가 함께 하면서 도움을 주고 싶은데 딸은 그런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과연 '토니'는 딸에게 인생 코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관객들이 영화의 끝에 도달했을 때, 이네스의 변화를 감지한다. 일에 쫓기던 조급하고 팍팍한 모습의 이네스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이네스는 아빠의 분장용 틀니를 끼고 할머니의 모자를 써본다. 그 틀니를 낀 '토니'의 모습을 참기 힘들어 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인생 코치 토니의 조언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그 조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고 잡아둘 것,

  그리고 유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영화는 결국 2시간 42분을 흘려 보낸다. 기이하고도 낯선 코미디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난다. 나름 훈훈한 결말이다. 보고 나서 느낀 것은 그렇다. 괜찮은 영화기는 한데, 이 영화를 둘러싼 평들은 너무 과대포장된 것들이 많다. 세대간의 단절(아버지와 딸의 소통 문제), 직장내의 성차별 문제(이네스를 갈구는 남자 상사),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단면(낙후된 루마니아 회사를 구조조정하는 이네스의 업무), 뭐 이런저런 것들을 분석하고 쪼개고 참 고단하게 영화를 보는구나 싶다. 이 영화에 별점을 준다면 다섯 개 만점에 딱 세 개가 적당하다. 반 개를 더 줄 수도 있겠다. 이네스 역의 잔드라 휠러의 열연,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지는 연기가 눈부시다. 자신만의 감성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를 땐 눈물이 찔끔 났다. 극한 직업 '배우'를 저렇게 보여주는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토니 에드만'은 평범함을 벗어난 괴상한 수작(作)은 될 수 있다. 괴상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유머 감각, 서사의 전개가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힘있게 끝까지 밀고간 마렌 아데의 연출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명작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없다. 도대체 그런 뻥튀기 평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지루하게 보았다는 어떤 관객이 쓴 글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상을 무지하게 많이 받은, 평론가들이나 좋아할 법한 영화.'


  60점짜리 영화를 90점, 100점으로 만드는 평론의 마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 마법을 마구 휘두르다가 정말로 영화의 본질을 놓치고, 영화 평론이 관객과도 유리되는 것은 아닌지 '토니 에드만'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사진 출처: sbs.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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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유한 상류층 출신의 젊은이가 있다. '마리오'란 이름을 지닌 그는 20대 초반에 파리에 들렀다가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게 된다. 여자의 목을 감싼 수갑을 찬 두 손의 이미지였다. 헝가리 사진 작가 André Kertész의 그 사진은 청년 마리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그 사진의 인상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영화를 찍을 카메라를 샀고, 배우와 스태프로 친구와 지인들을 총동원한다. 자기 자신도 배우로 한 장면 출연했다. 그렇게 찍은 2시간짜리 영화에 그는 큰 기대를 건다. 그러나 영화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화는 그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화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이들이 조금씩 생겼다. 그러다 1966년에 브라질 정부에 의해 필름이 몰수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의 영화가 에이젠슈테인과 푸도브킨 같은 러시아 영화 감독들의 영향을 받은, 말하자면 사회주의에 물든 '빨간색'의 영화라는 이유였다. 1964년에 집권한 군부 독재 정권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필름은 어느 대학생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그는 필름 복원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다시 세상에 나와 관객들을 만난다. 영화의 제목은 'Limite(Limit)', 마리오 페이소토(Mário Peixoto)의 1931년 작품이다.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온갖 종류의 영화 기법을 제멋대로 섞어 놓은 것 같다. 루이스 브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에 나오는 그 유명한 눈동자 장면도 비슷하게 나온다. 러시아의 감독들, 에이젠슈테인과 푸도브킨의 몽타주 기법을 따라한 장면들도 있다. 연관성 없는 사물들의 극도의 클로즈업 쇼트들이 정신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실험 영화 같은데도, 나름의 서사는 갖추고 있다. 다만 매우 불친절하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보트에는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타고 있다. 그들은 마치 조난당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 한 명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데, 관객들은 여자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다. 지치고 절망한 표정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남자와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또 다른 여자도 기진맥진한 상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사이이며, 무슨 사연을 가진 걸까? 러닝 타임 2시간 동안 세 사람이 배에 타기 전의 행적에 대한 단서들이 차례대로 조금씩 주어진다. 마치 추리물 같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물과 풍경의 이미지들이 관객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무슨 영화가 이렇단 말인가, 난해함과 지루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의 반응은 양극단으로 나뉜다. 잊혀진 걸작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과대평가된 졸작이라는 혹평도 있다. 브라질 영화사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작으로 손꼽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영화사적 의미도 동등하게 획득했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오늘날의 영화과 학생이 찍었다면 온갖 비아냥과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제작된 193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 모든 냉소와 조롱을 방탄복처럼 막아준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 2시간짜리 무성 영화가 펼쳐 보이는 기이한 이미지의 세계를 인내하기란 결코 쉽지않다. 그나마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다채롭게 사용된 클래식 음악들이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모음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세자르 프랑크, 프로코피에프, 보로딘의 음악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귀는 호강하지만, 눈은 파편화된 이미지에 혹사당한다. 보는 동안 쉬었다 다시 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 영화를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외칠지도 모른다.


  "모두 나가주세요. 이 영화는 진정한 영화광을 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광()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그것도 뼛속 깊이 영화로 채워진 진정한 영화광들만이 이 영화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 보고 나서 이 영화에 열광하느냐 또는 실망하고 분노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영화광'이라는 호칭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 'Limite'처럼 일반 관객과 영화광의 한계(limit), 그 경계(border)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scielo.br 사진의 첫번째 이미지가 마리오 페이소토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진 이미지다. 영화의 맨 첫 부분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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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가끔 드는 생각이 있다. 학교 다닐 때 과제로 중간 기말 보고서 쓰듯이 매일 보고서 한 편씩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매우 건조한 문체로 꽤나 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데, 이런 글을 찾아서 읽는 독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때론 궁금해지기도 한다. 오늘 쓰는 글은 희곡 수업 기말 과제 같은 글이 될지도 모른다.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을 독일의 SWF 방송국에서 TV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흑백 화면 속에 담긴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 1959)'은 원작에 충실한 무대 장치와 고전적 연출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뒤렌마트에게 극작가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그의 대표작이다.


  원래 보려고 했던 영화는 지브럴 좁 맘베티 감독의 'Hyenas(1992)'였다. 그런데 영화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이어서, 그럼 연극 공연으로 된 것을 한 번 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희곡 수업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희곡 창작과 비평 수업을 열심히 들었었다. 오래 전 그 수업 시간들에 뒤렌마트는 만난 적이 없다. 성균관 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놓은 그의 희곡 '혜성'을 읽은 기억은 난다. 우선 '노부인의 방문' 희곡 대본을 읽어 본다. TV 영화에는 독일어 자막만 있어서 대본을 머릿속에 들여놓고 볼 수 밖에 없다.


  쇠락한 도시 귈렌의 역 앞은 부산스럽기만 하다. 이 도시 출신의 백만장자 클레르 차하나시안 여사가 이제 막 도착할 예정이다. 궁핍한 귈렌의 사람들은 부자의 투자를 받아서 도시를 재건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들 앞에 마침내 등장한 노부인은 엄청난 돈으로 가득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자신이 가져온 관에 들어갈 사람 하나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것. 바로 노부인의 17살 때 연인이었던 알프레도이다. 노부인의 끔찍한 제안에 시장은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즉각 거부의 뜻을 밝힌다.


  "그렇다면 기다려야 겠군요."


  그렇게 클레르가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차츰 변해간다. 식료품점을 하고 있는 알프레도의 가게에 찾아와 비싼 물건을 마구 가져가면서 외상 장부에 달아놓는다. 언젠가 노부인에게서 받을 돈을 생각하며 도시의 사람들은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게 된다. 알프레도는 자신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시장과 경찰,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모두 거절한다. 궁리 끝에 도시를 떠나려 하자 사람들은 그를 막는다. 과연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뒤렌마트의 작가 경력의 시작은 추리 소설이었다. 생계를 위해서 쓴 추리 소설이었지만, 그 작품들은 꽤나 인기를 끌었다. 그가 추리 소설에서 보여준 법과 정의, 죄와 심판에 대한 관점은 독특해서 그에 대한 법학 쪽 논문들도 많다. 희곡 '노부인의 방문'도 뒤렌마트의 추리 소설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과연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가? 공정한 심판이 법 제도로 가능하지 않다면,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은 어떠한가? '노부인의 방문'은 이런 질문들을 차례차례 쏟아놓는다. 


  왜 클레르는 알프레도의 목숨을 원하는가? 클레르가 17살 때, 사귀던 알프레도의 아이를 가졌지만 그는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클레르를 버린다.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던 클레르는 패소한다. 알프레도가 증인을 매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으며 비참하게 귈렌을 떠나야 했던 클레르는 이제 돈으로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흑백 화면 속에 재현된 귈렌은 음울하고 퇴락한 인상을 준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세트들은 인물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음악들은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객들은 그 어긋난 음조들에 깃들인 불안과 공포가 서서히 커져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알프레도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귈렌의 사람들은 노부인이 요구한 정의를 실현하고 돈을 받을 것임을 알게 된다. 


  클레르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플릭켄쉴트(Elisabeth Flickenschildt)의 연기는 거울처럼 정확하다. 응축된 분노를 냉혹한 얼굴 속에 드러내는 압도적 연기는 TV화면을 가르고 나올 것만 같다. 알프레도 역의 한스 만케(Hans Mahnke)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서서히 무너지는 인물의 내면을 절제된 연기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분위기는 마치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과장되거나 지나친 상징을 내세우지 않는다. 뭐랄까, 중용의 미덕을 잘 지킨 아주 표준적인 무대 연출 같은 인상을 준다. 오늘날의 화려하고 다양한 현대적 연출 방식과 비교하자면 교과서처럼 보인다. 이 연극을 영화로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노부인의 방문'은 표면적으로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뒤렌마트의 신랄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연극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죄의 심판, 법 제도와 정의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던진다. 관객은 알프레도의 죽음이 귈렌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시민 법정에서 언도된 것임을 알고 있다. 귈렌의 사람들은 자신들은 정당하며, 그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알프레도를 죽이고(이 장면은 여러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 희곡 대본에도 그렇게 써있다) 모두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다.


  뒤렌마트가 바라본 인간은 탐욕에 찌들어 있으며, 법과 제도는 탐욕으로 인한 범죄를 공정하게 징계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형식적 제도와 규범도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기능할 수 없다고 본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귈렌을 찾은 방문자 클레르 차하나시안의 정의는 돈과 타락한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현된다. 노부인은 오래전 자신을 짓밟은 남자와 법 제도를 그렇게 심판한다. 



*사진 출처: prism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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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는 마치 여자와 같다. 농익은, 뜨겁고 열정적이지만 변덕스러운 여자. 오직 자신이 원할 때에만 오가기 때문에 언제 올지, 얼마나 머물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그레이스 메탤리어스(Grace Metalious)가 1956년에 쓴 이 소설은 그야말로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평범해 보이는 마을 주민들의 숨겨진 비밀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이제 막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그 즈음의 미국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소설 'Peyton Place'는 그런 답답한 미국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음료처럼 느껴졌다. 불륜, 강간, 낙태, 살인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난 어느 마을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자유'를 누리는 것과도 같았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레이스 메탤리어스는 서른 살에 쓴 그 소설로 말그대로 돈방석에 앉는다.


  20세기 폭스사는 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영화로 만든다. 1957년에 마크 롭슨이 감독한 'Peyton Place'의 주연은 라나 터너(Lana Turner)가 맡았다. 매력적인 외모의 과부로 양장점을 하며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코니 맥켄지 역이었다. 라나 터너는 뇌쇄적인 핀업 걸(pin-up girl)로 헐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았다. 외모에 비해서 딸리는 연기력은 늘 문제였다. 출연작들에서 보여준 연기력은 들쑥날쑥했으며, 복잡한 남자 관계와 사생활은 언제나 가십거리였다. 이 여배우에게 남자를 갈아치우는 일은 마치 숨쉬는 일과도 같았다. 영화로 벌어들인 돈은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 다만 정말로 눈에 차는 남자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남자가 조니 스톰파나토. 당시 로스앤젤레스를 장악한 마피아의 똘마니쯤 되는 인간이었다. 라나 터너는 이 남자를 정말로 좋아한 모양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반반한 얼굴과 보기 좋은 몸 뿐이었던 조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Peyton Place'를 찍었을 무렵, 라나의 연인은 조니였다.


  영화 'Peyton Place'의 줄거리를 읊는 건 그다지 재미없다. 그보다는 원작자 그레이스 메탤리어스와 주연 배우 라나 터너,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인생 여정을 걸었던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그 두 사람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인생을 진창길에 처박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산다는 건

  벌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 같은

  쉬운 일이 아니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


  그레이스와 라나, 성공한듯 보이는 두 여자에게도 삶은 쉽지 않았다. 무료한 삶을 견디기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썼던 소설 한 편으로 인생역전을 이룬 그레이스. 인기 여배우로 돈과 명성을 거머쥔 라나. 두 사람은 삶의 벌판길에 마주한 욕망의 구덩이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레이스는 세 명의 아이를 내팽겨치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학교 교장이었던 남편과도 이혼한 후,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술독에 빠져 살았다. 라나의 삶도 곤경에 빠진다. 조니가 문제였다. 질투심에 미친 조니는 라나의 영국 촬영장까지 따라와서 난동을 부렸다. 당시 상대 배우였던 숀 코너리에게 총을 들고 위협했다가 오히려 얻어맞는다. 그 일은 라나에게 조니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남자 때문에 배우 경력까지 위협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니의 뒷배인 마피아가 라나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협박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사건이 터진다. 1958년, 라나의 집에서 조니가 칼에 찔려 사망한다. 살인 용의자는 라나의 딸 셰릴이었다. 셰릴은 엄마와 다툰 조니가 자신을 폭행하려 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당시 셰릴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과연 사춘기 십대 소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진짜 범인은 라나가 아닌지 사건의 실체를 두고 떠들썩할 수 밖에 없었다. 셰릴은 보호 감호 처분을 받고, 라나의 법정 증언은 최고의 연기처럼 보인다며 세간의 비아냥을 듣는다. 영화 'Peyton Place'에는 라나가 연기한 맥켄지 부인이 살인 사건 재판에서 증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그 장면이 연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꽤나 큰 시련이었지만 라나의 배우 경력은 이어진다.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Imitation of Life(1959)'는 라나의 명실상부한 재기작이 된다. 이후로도 영화와 TV 시리즈물에서 꾸준히 얼굴을 내비치지만, 배우로서 내리막길은 어쩔 수 없었다.


  라나 터너가 엄청난 스캔들을 견뎌낸 것과는 달리, 그레이스는 그대로 몰락한다. 서른 아홉의 나이에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변으로 세상을 뜬다. 마지막 연인에게 남은 재산을 다 준다는 유언장을 두고 그레이스의 자녀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레이스에게는 남아있는 돈은 커녕 오히려 빚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서른 아홉으로 세상을 뜬 그 해 1964년, 'Peyton Place'의 TV 시리즈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1969년까지 이어진 그 시리즈 드라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텔레비전에 막대한 흥행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단 한 푼도 그레이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술에 절은 상태로 모든 저작권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어느 날 깨어났을 때, 자신이 가진 모든 게 진정으로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던 것임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레이스는 그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얻은 부와 명성으로 거침없이 욕망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졌던 그레이스는 그 진창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Peyton Place'의 영화 초반부에 맥켄지 부인의 딸 앨리슨이 고교 동창 노먼과 산길을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앨리슨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라며 안내하는데, 노먼은 그 산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 길에 있는 'Road's End'라는 팻말이 유독 내 눈길을 끌었다. 어쩌면 이 영화와 관련된 두 여자, 그레이스와 라나도 거침없이 내달린 욕망의 인생길 어디에선가 그 팻말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결코 멈출 수 없었던 그 두 사람의 삶은 쓸쓸한 말로를 보여준다.


  그렇게 'Peyton Place'는 두 여자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서사로 남았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억압되고 닫혀있는 미국인들의 내면에 욕망의 분출구로서 자리하게 된다. 이제 영화와 TV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성과 욕망을 대담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그레이스 메탤리어스가 자신이 살던 동네의 온갖 추문을 그러모아 창조한 Peyton Place는 어느새 미국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진 출처: nhhc.org 작가 그레이스 메탤리어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배우 라나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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