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영화사'란 과목은 뭔가 참 애매한 기억으로 남았다. 엄청 두꺼운 책을 교재로 썼는데, 글씨가 정말이지 깨알만 했다. 세계 각국의 오만가지 영화들을 모아놓은 잡동사니 책 같았다. 아, 물론 거기서도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사였다. 3학년 때 그 과목을 들었는데, 강사는 '400번의 구타(1959)' 같은 영화를 과제로 냈다. 이미 다 본 영화들이 줄구장창 나오는데다, 도무지 얻어들을 것이 없는 맥아리 없는 강의는 실망스러웠다. 그 과목이 아마 전공 필수였나, 억지로라도 들어야해서 더 짜증스러웠다. '400번의 구타' 대신 다른 영화를 과제로 써냈다가 학점 못받은 기억이 난다.


  그 수업에서 브라질 영화사 같은 건 다루지도 않았다. 한국 영화사를 비중있게 다루는 외국대학의 영화학과는 얼마나 될까?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마리오 페이소토의 'Limite(1931)'를 얼마 전에 보고 나서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브라질이란 나라에는 어떤 영화 역사가 있는지에 대해서 찾아 보다가 'Vidas secas(1963)'가 눈에 들어왔다.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가 1938년에 그라실리아노 라모스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다. 이 감독은 브라질 영화사의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는 '시네마 노보(Cinema Novo)'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시네마 노보, 번역하면 '새로운 영화'쯤 되겠다. 기존 브라질 영화가 서구 자본에 의해 영혼 없는 오락물만 양산하고 있다고 느낀 영화인들이 좀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들어 보자, 해서 일어난 영화 운동. 뼈대는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닮아있고, 곁가지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작가주의 정신을 덧붙인듯하다. 아무튼 'Vidas secas'는 시네마 노보의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제목을 직역하면 '메마른 삶'이 될 텐데,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황폐한 삶'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다른 제목 '보람없는 삶'으로도 나와있다. 어떤 제목이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하층민의 삶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러닝타임 1시간 43분.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완성도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이야기는 '옛날 옛적 브라질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화의 배경은 1941년, 먹고 살 것을 찾아 떠도는 일가족의 고통스런 생존기가 펼쳐진다. 탐욕스러운 대농장주, 부패한 경찰과 관료, 그들이 가혹하게 수탈하는 민중의 밑바닥 삶...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영화적 '재미'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 기대하면 안된다. 영화가 정치적 대의명분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이런 방식은 1930년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적 성취도 함께 이루어낸 것에 비해 'Vidas secas'는 그저 정치 선언적인 의미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 보기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영화 속의 'Baleia'라는 이름의 개였다. 영화의 도입부, 땡볕의 더위에 메마른 평야를 걷는 부부와 어린 두 아들이 있다.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그들을 활기차게 이끄는 것은 바로 '발레야'이다. 이 가족들에게 발레야는 둘도 없는 충견인 동시에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어렵게 도착한 마을의 집. 먹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발레야는 집 마당의 기니피그(꾸이, cui)를 잡아서 가져온다. 오랜 굶주림으로 키우던 앵무새조차 잡아먹은 가족에게 발레야는 식량도 조달한다.


  대농장주에게 푼돈을 받으며 소를 치게 된 가장 파비아노. 아이들은 양을 돌보는데, 발레야는 양몰이견으로도 활약한다. 외롭고 지친 아이에게 친구 노릇도 해주는 발레야는 진짜 자기 밥값을 해내고도 남는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발레야를 빼고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개는 영화 속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개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참 드문 경우다. 얼마나 싹싹하고 영리하며 활기가 넘치는지 모른다. 물론 영화 속 가족의 처절한 밑바닥 삶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Vidas secas'의 진정한 주인공은 발레야이다.


  나만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외국 논문에는 이 영화의 발레야와 가족의 관계를 라캉 이론을 적용해서 분석한 것도 있다. 라캉 이론에 개를 밀어넣다니, 참... 뭔가 아스트랄한 영화 평론의 세계를 목격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 영특하고 충실한 개 발레야는 영화 내내 가족의 삶과 함께 한다. 그러다 발레야가 병이 드는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또 다시 길을 떠나는 가족은 발레야를 버린다. 그냥 두고 가는 게 아니라 안락사 시킨다. 아이들은 아빠가 개를 죽일 것이라는 알고 공포와 슬픔에 휩싸인다. 발레야도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다.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인을 안내한다. 마치 자신이 죽을 곳을 정하는 것 같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기다리는 발레야. 마침내 총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이내 곧 가족은 그곳을 떠난다.


  발레야는 절뚝거리면서 집 앞 마당에 자리잡는다. 발레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쇼트가 이어진다. 죽어가는 발레야는 가족들이 살던 집을 서글프게 바라본다. 마당에는 발레야가 가족들을 위해 잡았던 꾸이들이 몰려다닌다. 그 꾸이들을 잡아다 줄 가족은 이미 먼 길을 떠났다. 꾸이들을 바라보면서 발레야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볼 수 있을까? 이런 삶은 정말 짐승과 다름없어."


  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태양 아래 길을 떠나게 된 여자는 남편에게 한탄한다. 그러자 남편이 대답한다.


  "아니, 그건 불가능할 거 같아."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걷는 일가족이 사라질 때까지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짐승처럼 사는 삶. 일가족은 자신들에게 충심을 다했던 개를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그 지옥과 같은 삶을 그나마 온기있는 인간의 삶으로 만든 것은 '발레야' 덕분이었음에도... 


  개의 죽음은 그렇게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은 영화학도, 영화광, 그리고 개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 정도나 될까... 발레야가 어떤 견종인지 찾아보았다. 브라질리언 테리어(Brazilian Terrier)이다.



*사진 출처: revistapesquisa.fape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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