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이고 재능있는 젊은 여성이 있다. 스타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진 그 여자는 우연히 유명 배우를 알게 된다. 숨겨진 재능을 한눈에 간파한 그는 여자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가 가진 인맥과 도움으로 여자는 자신이 가진 스타성을 입증해 보이고, 그렇게 대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자신의 은인이기도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는 결혼을 함으로써 일과 사랑, 그 두 가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자가 점점 더 유명해지고 잘 나가는 동안, 남자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술 문제 때문에 경력의 내리막길을 걷는다. 여자는 어떻게든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안고 가려고 하지만, 남자는 갈수록 더 망가질 뿐이다. 여자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최전성기에 은퇴를 생각한다. 남자는 그런 아내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데...

  윌리엄 웰먼 감독의 1937년작 '스타 탄생'의 줄거리는 그렇다. 어떻게 보면 뻔한, 그저 그런 이 이야기는 이후로 3번이나 리메이크되었다.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1937년작에서는 주인공 비키 레스터 역을 재닛 게이너가 맡았다. 재닛 게이너는 당시에 아주 잘 나가는 여배우 가운데 하나였고, 이 영화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이 고전적인 미인 배우는 솔직히 이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흥행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당시 대중들이 이 여배우를 선호했음을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정적이고, 별다른 스타성을 보여 주지도 않는 재닛 게이너의 연기는 평이하며, 그리 큰 감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무성 영화의 연기 스타일에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배우는 영화 속의 '스타'라기 보다는 비련에 빠진 여성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런 것과 비교하면 조지 큐커의 1954년작 '스타 탄생'의 주디 갈란드는 온몸으로 자신의 스타성을 입증해 보인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서 주디 갈란드가 보여주는 춤과 노래, 연기는 재능의 정점에 있는 배우가 가진 모든 것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주디 갈란드가 누구인지를 영화로 보여준다. 너무 길고 많은 뮤지컬 곡들은 때론 과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프로덕션은 당시 주디 갈란드의 남편이었던 시드니 루프트가 맡았다. 그는 오랜만에 영화로 복귀하는 자신의 아내를 '띄워주기' 위해서 제작비를 그야말로 물쓰듯이 썼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5백만 달러를 넘겼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헐리우드 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였다. 이전 최고 제작비 영화의 기록이 250만 달러였던 것에 비하면 워너사로서는 엄청난 투자였다.


  문제는 그것이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영화는 수익 분기점을 겨우 어렵게 넘겨서 6백만 달러를 얻었다. 물론 최고의 흥행 수익이기는 했다. 그러나 프로덕션 제작비에 나간 돈을 빼고 나니 워너사에는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주디 갈란드는 제작 기간 내내 이런저런 병치레를 내세웠고, 그 때문에 촬영이 9개월이나 미뤄진 것도 이유였다. 워너 경영자들, 해리 워너와 잭 워너가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시드니 루프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을뿐만 아니라, 추가로 제작하기로 한 작품 계약을 파기했다. 그 여파는 갈란드에게도 미쳤다. 부부 사이는 소원해졌고, 결국 갈란드는 남편의 폭력을 이유로 이혼에 이른다.

  1954년작에서 주디 갈란드의 상대역으로 나온 제임스 메이슨이 맡은 노먼 메인은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유명 배우 역할이었다. 당시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지만, 술에 찌들어 결국 비극적 선택을 하는 남자 주인공 역을 기꺼이 맡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조지 큐커는 말론 브랜도의 촬영장까지 찾아가서 제의를 했었는데, 브랜도의 대답은 이랬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때란 말입니다. 그런데 술에 찌든 머저리 역할을 하라고요? 지금 감독님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적당해 보이는데 어때요?"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었던 배우, 말론 브랜도와 같이 '줄리우스 시저(Julius Caesar, 1953)' 영화를 찍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 제임스 메이슨이었다. 그는 그렇게 노먼 메인이 되었고, 현실의 루프트 부인이었던 주디 갈란드를 잘 뒷받침해주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술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것과는 달리, 제임스 메이슨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배우 경력을 성실하게 이어갔다. 그러나 주디 갈란드는 아역 배우 시절부터 시작된 약물 남용 문제로 평생 골머리를 썩였고 그것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영화 '스타 탄생'이 보여주는 이 아이러니는 단지 한 여성 배우의 비극적 인생만을 부각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 거대 영화 스튜디오의 냉혹한 일면을 보여준다. 관객은 상품성이 떨어진 배우가 어떻게 제작사에 의해 버려지고 잊혀지는지, 그리고 인기 절정의 배우에게서 최대의 이익을 끄집어 내려고 온갖 애를 쓰는지 보게 된다. '스타'는 대중들이 볼 때의 이미지이지, 제작사가 보기에는 자신들에게 돈을 벌어다줄 복잡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같은 부품일 뿐이다. 그 부품은 잘 관리되어야 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때에만 유용하다.


  특히 여배우들은 그렇게 소모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배우들은 결혼과 임신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못했다. 주디 갈란드는 돈에 미친 엄마와 제작사의 요구로 2번이나 중절 수술을 받았다.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서였다. 캐서린 햅번은 스튜디오의 그 횡포에 맞서 아예 결혼을 포기했다. 햅번은 자신의 경력에 가정과 아이 따위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직업적인 성공이 우선이었던 이 배우가 내연 관계였던 스펜서 트레이시의 병간호를 위해 5년간 영화를 찍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937년 '스타 탄생'의 주연 배우였던 재닛 게이너는 30대 중반에 은퇴의 길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의 여배우들에게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업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스타가 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꽃길이고 인생은 순탄하게 잘 풀려나갈 것 같지만, 인생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스타 탄생'은 은막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와 명성, 엄청난 인기에 가려진 유명 배우의 삶 속에 깃든 슬픔과 외로움,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관객들은 보게 된다. 너무나 높은 곳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별들도 언젠가는 추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37년작에서 주인공 에스터 블로젯(배우가 된 이후로는 비키 레스터란 이름을 쓴다)의 할머니는 꿈을 안고 헐리우드로 떠나는 손녀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희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려므나."

  에스터는 자신이 원하는 스타가 되었지만, 한 남자의 행복한 아내는 될 수 없었다. 남자가 가진 내면의 유약함은 거칠고 냉혹한 거대 연예 사업에 맞지 않았고, 그것을 이기려고 선택한 술이 그를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 한편으로 그 세계의 다른 이들은 도박, 마약, 여자 문제 그 밖의 문제들로 노먼과 같은 길을 걸었다. 스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도 필요했다. 그것이 결여된 이들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스타 탄생'이 보여주는 은막의 앞과 숨겨진 뒤의 삶은 영화의 주연배우 주디 갈란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처럼 보인다.

  1954년작 '스타 탄생'은 최초 개봉 당시 러닝 타임이 3시간을 좀 넘겼는데, 그것은 수입을 위해 영화관의 상영 횟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극장주들에게는 못마땅한 조건이었다. 워너사는 그 때문에 조지 큐커와 시드니 루프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30분을 잘라내 버린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영화는 3시간에 가깝게 복원이 되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스틸컷으로 대체된 불완전한 복원이었다. 워너사에게는 돈만 많이 먹은 골칫덩어리 영화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잘려진 필름들은 창고에 처박힌채 잊혀졌고, 결국 이 영화는 헝겊을 덧대서 기운 옷처럼 온전한 모습을 찾지는 못했다. 주디 갈란드의 '순전한 재능'이 보석처럼 박혀있는 이 영화가 그런 모양새를 갖게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37년작은 오리지널로서 드라마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준다면, 1954년작은 주디 갈란드의 열연과 인물들 내면의 세밀한 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오리지널의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동일하게 재현되었다. 이 영화에서 노먼 메인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되는 두 장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비키에게 온 소포를 받는 장면과 노먼이 만취 상태로 즉결 심판에 넘겨진 장면이다. 비키에게 온 소포를 노먼이 받는데, 우편 배달부가 노먼에게 어떤 관계냐고 묻는다. 노먼이 남편이라고 하자, 우편 배달부는 '그럼 사인해주시죠, 레스터 씨.'라고 말한다. 소포를 받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 표정은 매우 어둡다. 이제 그는 비키 레스터의 남편 레스터 씨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또 다른 장면, 즉결 심판에서 판사는 노먼에게 구류를 선고한다. 그러자 비키는 남편을 자신이 잘 돌보겠다면서 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I will be responsible for him."

  이제 노먼은 배우 노먼 메인이 아닌, 아내 비키 레스터의 영향력 하에 놓이는 사람이 되었음을 관객은 알게 된다.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잃었으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위치도 지키지 못한 그가 삶을 지탱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그는 소멸의 길을 걷는다. 결국 홀로 남겨진 비키 레스터는 노먼의 장례식이 끝난 후 대중 앞에 다시 선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저는 노먼 메인의 아내입니다."

  그렇게 비키 레스터, 아니 노먼에게는 에스터 블로젯이었던 여자는 자신을 빛나는 스타의 길로 이끈 남자를 기념한다. 그 선언은 슬프면서도 고결하다. 스타를 만들어낸 시스템 안에서 망가지고 부서져 버린 남편을 잊지않을 것이며, 자신은 그 시스템의 어떤 압력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스타 탄생'은 그렇게 은막 뒤에 감추어진 비정하고도 냉혹한 현실을 담아낸다. 



*사진 출처: warnerbr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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