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모리스 로네 분)이라는 남자가 있다. 알콜 중독증으로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매일 이 말을 되뇌인다. 


  "내일은 죽어야지."


  그에게는 권총도 있다. 그는 정말 죽을 생각일까?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와 친화력으로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그는 어쩌다가 알콜과 우울에 절어버린 낙오자가 되어버렸을까? 주치의는 4개월 동안 술 안먹고 잘 견뎠으니, 이젠 퇴원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알랭은 밖에 나가는 즉시 다시 술을 먹게 될 거라며 두려워 한다. 자신을 사로잡는 우울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알랭은 옛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친구 1 드부르: 넌 철 좀 들어야 해.


  알랭의 이 친구는 평범한 삶에 안착했다. 젊었을 때는 알랭과 신나게 잘 놀았는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의 드부르는 멋진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에게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드부르는 알랭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소년 시절에 머무른다고 생각한다. '제발 어른의 삶을 살아, 철 좀 들라고'충고한다. 그 말을 들은 알랭은 좌절한다. 


  "네가 내 친구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친구 2 에바: 내일 일 나도 몰라, 그냥 되는대로 사는 거지.


  알랭은 에바(잔느 모로 분)에게서 젊은 시절의 친구 소식을 듣는다. 스스로 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바닥인데 더 가라앉는 느낌이다. 에바에게 어떻게 살고 있냐고 물으니, 앞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산다고. 에바는 '약쟁이'로 살고 있다.


  친구 3 솔랑주: 난 네가 부끄러워.


  한때 알랭의 연인이기도 했던 솔랑주(알렉산드라 스튜어트 분, 루이 말의 연인이었다)는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에 알랭을 초대해 놓고는 알랭이 알콜 중독자임을 까발린다. 이미 솔랑주의 집에 오기전, 카페에서 손님이 남기고 간 술 한잔을 마시고 상태가 안좋은 그는 비까지 흠뻑 맞았다. 그곳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니 비참함과 모멸감은 이루말할 수 없다. 병주고 약주는 것일까? 도망치듯 나가는 알랭에게 내일 점심 식사에 꼭 와달라고 말하는 솔랑주. 식사 대신 마셔댄 술 때문에 기분은 더 엉망이 되었고, 몸은 가눌 수도 없다.


  루이 말 감독의 1963년작 '도깨비불(Le feu follet)'는 생의 의미를 절실히 찾는 한 남자의 이틀 동안의 여정을 그린다. 관객은 주인공 알랭이 왜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죽고 싶어하는 마음 한편에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옛친구들에게서 무언가 위로와 희망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모두 무산된다. 그의 짧은 여정은 실망스럽게 끝난다.


  알랭 역을 맡은 모리스 로네의 연기는 지독한 마음의 고통 그 자체를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 'Le feu follet'은 도깨비불을 의미한다.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 그리 길지 않았던 생애 동안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작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주인공 알랭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미치게 만드는 마음 속의 불을 어쩌지도 못하고 끌어안고 살았던 삶. 시종일관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영화 속에 흐른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모음곡(Gymnopedie)'이 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내적 여정을 따라간다. 루이 말은 그 여정을 세련된 흑백 화면 속에 담아낸다. 영화적 깊이 보다는 감독이 가진 독창적 스타일이 돋보이는 그런 작품. 특히 좋은 구도로 찍은 야외 촬영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궁금증이 들기는 한다. 루이 말은 왜 이런 무겁고 음울한 이야기의 영화를 찍었을까? 개인적으로 좀 힘든 시기였나? 희망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를 보는 일은 관객의 입장에서도 버겁다.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도깨비불'과 함께 '마지막 선택'으로도 나와있다. 뭔가 제목이 그 자체로 스포일러 같은 느낌이다. 영화를 보려는 이라면 힘든 하루를 보낸 날은 가급적 피하길 바란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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