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습니다. 오래된 한국 영화가 나오네요. 한형모 감독의 영화 '여사장(A Female Boss, 1959)'입니다. 한형모 감독은 전후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 '운명의 손(1954)''자유부인(1956)'에는 해방 이후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가득 차 있어요. '여사장(1959)'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겠군요.

  이 영화는 원작 희곡이 있습니다. 원작자 김영수(1911-1977)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희곡과 시나리오, TV 드라마까지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김영수는 해방 직후에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할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1948)'도 그 시절에 쓴 희곡이지요. 이 희곡은 '김영수 희곡
·시나리오 선집 2(출판사 연극과 인간)'에 실려있습니다. 나는 '여사장' 영화를 보고, 원작이 궁금해서 책을 주문해 보았습니다. 2007년에 펴낸 책이라 혹시 절판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요. 그런데 아주 멀쩡한 새책으로 잘 받을 수 있었어요. 아마 잘 안팔렸을 거에요. 이런 책은 관련 전공자들이나 볼 법한 책이지요.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펴낸 출판사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해두지요.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용호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화려한 양장 차림의 요안나(조미령 분)는 기다리는 뒷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통화 중이지요. 짜증을 내던 뒷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용호만 남습니다. 용호는 요안나의 면전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하지요. 요안나가 용호를 무시하자, 용호는 요안나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마리오를 냅다 발로 차버립니다. 아주 고약한 첫 만남이지요? 대개의 로맨틱 코미디의 도입부가 그렇잖아요. 기분 나쁜 첫인상을 갖게된 남녀가 결국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요안나와 용호도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안나는 '신여성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어엿한 여사장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장이면 사장이지, 여사장이라는 단어는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건 영화가 나온 그 시대가 1950년대라 그렇지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요. 요안나는 그런 시대에 자기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사장만 여자가 아니라, 잡지사 편집국도 여인천하입니다. 허 주임(김희갑 분)은 여자 편집국장을 비롯해 여직원들에게 늘 구박당하는 신세에요. 그는 툭하면 잡지 기사 고쳐 쓰라고, 냄새 나는 반찬 좀 먹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지요.      

  요안나는 자신이 펴내는 잡지 이름대로 '신여성(新女性)'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안나는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연애 금지령'을 내립니다. 요안나에게 연애는 독립적인 여성의 자존감을 꺾는 일입니다.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 시대의 봉건적 남자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요안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싶어하죠. 하지만 요안나의 현실은 그런 바람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요안나의 잡지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그런 요안나에게 돈 많은 오 사장(주선태 분)은 후원자를 자처합니다. 영화 속에서 오 사장이 독신으로 나오는 것과는 달리, 희곡에서 오 사장은 유부남으로 나옵니다. 오 사장은 어떻게든 돈으로 요안나를 얽어매려는 흑심을 지닌 사람이에요. 자신이 원하는 잡지를 펴내기 위해 요안나는 고군분투합니다. 그즈음, 용호가 요안나의 잡지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옵니다.

  요안나는 용호에게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맘놓고 그 별명을 불러대지요. '용호'라는 이름 대신에 '두꺼비'라고 불리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좀 안쓰럽기까지 해요. 어쨌든 용호에게 요안나는 '사장님'입니다. 용호는 요안나를 상사로 깍듯이 대합니다. 요안나는 그런 용호의 순수함과 우직스러움에 조금씩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사장'은 오늘날의 여느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신여성, 페미니스트인 요안나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습을 희화화해서 보여줍니다. 요안나는 자기 회사에 필요한 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해요. 요안나는 오 사장의 호의에 기대어 편하게 돈을 빌리려고 하죠. 결국 요안나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돈 많은 숙부입니다. 멋진 옷차림을 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외치지만 그건 다 껍데기처럼 보여요. 이점은 원작 희곡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요안나는 그 누구보다도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여자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남자를 적대시하는 요안나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면에서 원작자 김영수의 관점은 매우 전근대적이기도 하고요.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현모양처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안나의 잡지사는 두꺼비에서 남편이 된 용호가 사장이지요. 이제 요안나는 양장이 아닌 한복을 입고서,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찌개를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립니다. 그 전화를 받는 용호의 뒤편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가 있을 때는 분명 그 액자에 '여존남비(女尊男卑)'가 박혀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던 허 주임은 편집국장 자리에 앉아 여직원에게 호통을 치지요. 영화의 이런 묘사는 일견 우스워 보이지만,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퇴행적인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죠.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작 희곡이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희곡은 요안나와 용호가 함께 잡지사를 꾸려나가자는 상호 합의의 다짐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영화 '여사장'은 그런 희곡의 결말을 사정없이 비틀어 버립니다. 거기엔 일말의 융통성도 없어요. 영화 '여사장'이 보여주는 제대로 된 여성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성이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행복을 찾는 여성이지요. 영화 속 여사장, 아니 이제는 평범한 주부가 되어버린 요안나는 정말 행복을 찾았을까요?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가 상영된 1959년에 '여사장'을 본 여성 관객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거든요. 그들은 진심으로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며 집에 돌아갔을까요? 아니면, 여사장 요안나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분명한 건, 2024년의 여성 관객은 이 영화를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음, 그러니까 아주 흥미 있는 영화거든요. 영화 속 시대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kmd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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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같은 일상입니다. 그는 TV 속의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죠. 식사 시간이 되면 찬장에 있는 냉동식품을 꺼내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그 음식을 먹구요. 문득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그는 자기 아파트 건너편 집을 바라봅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네, 그들은 연인입니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지요. 그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얼른 리모컨을 집어서 TV를 켭니다. 이리저리 돌리다가, 신기한 물건에 눈길이 갑니다. 로봇이네요. 말하고 미소를 짓는 로봇 말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로봇 조립 세트를 주문합니다.

  Pablo Berger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Robot Dreams(2023)'의 시작은 그러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어요. 감탄사와 효과음은 있지요. 아, 음악이 정말 좋습니다. 영화 내내 미국의 팝 그룹 Earth, Wind & Fire의 명곡 'September'가 흐릅니다.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곡이에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인 Dog와 로봇에게도 말입니다. 주인공이 정말로 Dog가 맞냐고요? 맞아요. 주인공은 'Dog', 달리 이름이 없어요. 로봇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개와 로봇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개는 집으로 배달된 로봇 조립 세트를 완성합니다. 로봇은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개와 로봇은 이제 일상을 함께 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가 됩니다. 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Setember를 로봇이 좋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함께 길을 걷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죠. 여름이 오자, 개는 로봇을 해변으로 데려갑니다. 수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 그런데 로봇이 좀 이상합니다. 움직이질 않아요. 그래요,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의 몸에 물이 들어가서 녹이 슬어버린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개는 로봇을 해변가에 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개는 해변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여름에만 잠시 개방되는 그 해변은 그날부터 폐쇄되었습니다. 내년 여름에 문을 연다는군요. 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래밭에 파묻혀있는 로봇을 구하려고 합니다. 시청에 민원도 내지만 소용이 없어요. 로봇을 만나려면 1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 'Robot Dreams'는 로봇이 꾸는 꿈을 의미합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로봇인데, 꿈이라고 해서 못 꾸겠어요?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잠깐씩 눈을 뜨던 로봇은 꿈을 꿉니다. 다시 개를 만나게 되는 꿈이요. 로봇의 꿈속에서 개는 로봇을 잊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요. 로봇은 슬픔과 불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로봇의 꿈과는 달리 개는 잘 지내지 못해요.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여행도 하지만 개의 머릿속에는 늘 로봇이 있어요.

  마침내 개가 간절히 기다리는 그날이 왔습니다. 해변이 다시 문을 여는 날이지요. 개는 바람처럼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거기엔 로봇이 없어요. 로봇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로봇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요. 어떻게 하다 고물상에 팔려 간 로봇은 Rascal이란 이름의 너구리와 만나게 됩니다. 직업이 수리공인 너구리는 로봇을 정성스럽게 다시 조립합니다. 로봇은 다시 살아납니다. 로봇은 너구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지내지요.

  개에게도 새로운 로봇 친구가 생깁니다. 그렇게 개와 로봇은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요. 그런데 우연히, 로봇은 개를 보게 됩니다. 개는 새 친구 로봇과 길을 걷고 있었죠. 자, 로봇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개에게로 달려갈까요? 그런데 개의 옆에는 다른 로봇이 있잖아요. 개와 로봇, 둘은 어떻게 될까요?  

  'Robot Dreams'는 대사가 없지만, 아주 간결하게 정서를 전달합니다. 이 영화의 관객은 주인공 개와 로봇의 마음 속 깊이 빨려들어가게 되지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우리 인간과 다를 것이 없어요. 서로를 알아가고, 친밀해지는 관계.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우정이나 사랑이든,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말이지요.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1973)'이 떠오르더군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그 영화요. 서로 이질적인 배경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둘은 헤어집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이 남아있겠지요. 영화의 우리말 제목 '추억'은 정말 잘 지었어요.

  개와 로봇이 서로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간, 그 추억은 'September'라는 노래에 담겨있어요. 둘은 언제까지나 그 노래를 기억할 겁니다. 'Robot Dreams'는 보는 이에게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시간이 겹겹이 층을 쌓아가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꼭 그 추억의 누군가와 이어지지 못해도 괜찮아요.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arth, Wind & Fire의 히트곡 'September' 공식 뮤직 비디오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s069dndI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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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
바비(Barbie, 2023),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 2023), 감독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는 러닝타임이 3시간이다. 그렇게 긴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영화는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 1904-1967)의 일대기를 다룬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은 정교하게 배치된 3개의 시간 축을 중심으로 영화를 짜나간다. 오펜하이머가 대학생 시절이었던 때부터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그리고 오펜하이머에게 오욕과 수치를 안겨준 1954년의 청문회, 오펜하이머의 반대자 루이스 스트로스(Lewis Lichtenstein Strauss)의 1959년 청문회가 그것이다. 놀런은 이렇게 시간대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데에 재미를 붙인 것 같기도 하다. '덩케르크(Dunkirk, 2017)'에서도 그런 걸 써먹은 적이 있다.

  그런 내러티브적 변형이 효과적이었는지 내게는 물음표로 남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덩케르크'는 참으로 별로였고, 그나마 '오펜하이머'는 볼만 했다. '오펜하이머'는 실존 인물인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놀런은 그의 인생이 격변의 시대와 교차하는 지점을 통찰력 있게 포착한다.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적 과학자로서 오펜하이머에게 영광의 월계관만 씌워진 것은 아니었다. 내연녀의 비극적 죽음,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견뎌야 했던 사상 검증, 원폭 투하가 가져온 엄청난 살상에 대한 죄책감이 오펜하이머의 삶에 포개어져 있었다.

  영화는 뛰어난 과학자가 겪어야 했던 인간적 불행이 '국가'가 수행한 거대한 전쟁 프로젝트와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부각시킨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가,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순간에 과학자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그것을 통렬하게 입증한다. 결국 소모되어 버려지는 삶.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 비참함과 서글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2023년의 미국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의 바비(Barbie, 2023)이다. 완벽한 바비 인형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 주인공 바비가 한 여성, 인간으로서 눈뜨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전형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감독 그레타 거윅은 매우 영리하게 그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바비 인형 회사 마텔(Mattel)과 긴밀히 협조한 자본주의적 영악성은 영화 속에서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영화 '바비'의 세계관은 진부함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뜻이다.

  2024년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선정에서 '바비'가 철저히 외면당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비'는 그런 대접을 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건 페미니즘에 대한 박대가 아니다. 그레타 거윅의 빈곤한 영화적 상상력과 놀라운 정치적 능력의 합작품 '바비'를 누구나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영화 나는 반대일세', 미국 아카데미 협회 회원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헐리우드의 또 다른 화제의 영화로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 2023)'이 있다.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는 이 영화의 감독으로, 그리고 주인공 번스타인역으로 북 치고 장구 치는 놀라운 원맨쇼를 보여준다.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파는 데에 열심인듯 하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은 유럽 출신의 지휘자가 주류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미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이다. 영화는 그러한 번스타인의 음악적 성취 이면에 자리한 개인사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동성애자인 번스타인의 삶은 '결혼'과 '출세'라는 세속적 틀과 맞물리며 지속적인 파열음을 낸다. 영화 속 번스타인은 뛰어난 지휘자 이전에 기만적인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온다. 번스타인은 끊임없이 남자 연인들과 바람을 피우는 자기 삶의 방식에 한없이 관대하다. 결별을 요구하는 아내에게는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고 비난하고, 딸에게도 진실을 숨기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 남자는 외적으로는 위대한 지휘자(Maestro)라는 광휘에 휩싸여 있지만, 그 뒤에는 일그러진 인간적 면모가 숨겨져 있다.

  영화 속에서 번스타인은 동료 음악가를 비롯해 자신이 가르치는 남학생과도 연인 사이가 된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번스타인의 행동은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의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을 예상하게 만든다. 번스타인의 모습은 영화 '타르(Tár, 2022)'에서 여성 지휘자 타르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인다. 물론 타르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감독 토드 필드(Todd Field)가 만들어낸 가상의 지휘자이다. 그 영화에서 타르는 음악적 권력을 남용하다 파국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단초는 타르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성적인 착취의 도구로 사용한 데에서 기인한다.

  영화 '마에스트로'를 보면서 나에게 든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타르를 몰락하게 만들었던 성적 취향과 권력의 속성이 번스타인에게는 그 어떤 손상도 끼치지 않았는가? 번스타인은 죽을 때까지 남자들과 자유롭게 연애하고 동거했다. 그의 그런 사생활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고, 음악계에서도 암묵적인 비밀로 유지되었다. 브래들리 쿠퍼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을 둘러싼 번지르르한 신화에 균열을 가한다. 문제는 그 균열이 번스타인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근원적 탐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영화 '마에스트로'는 젠더와 예술 권력, 결혼제도와 성소수자인 LGBT에 관해 그럴싸한 변죽만 울리다 끝내버린다. 브래들리 쿠퍼는 감독으로서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듣기 좋은 노래와 볼거리만 있는 음악 영화는 한번 보고 잊혀질 뿐이다. 결국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진정성 있는 이야기이다.


*토드 필즈의 영화 '타르(Tár, 202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todd-field-tar2022.html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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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용직 노동자 Ray Salyer는 이제 막 Bowery에 도착했다. 뉴욕의 맨해튼 Lower East Side에 자리한 그 거리는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다. 샐리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술꾼 Gorman Hendricks와 술집으로 들어선다. 술에 취한 샐리어는 그날 밤에 거리에서 쓰러져 잠든다. 헨드릭스는 샐리어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헌옷이 든 가방을 몰래 훔친다. 돈 한 푼 없는 샐리어, 그는 막노동해서 번 돈을 또다시 술집에서 탕진한다. 그들의 삶은 Bowery라는 거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Lionel Rogosin(1924-2000) 감독의 다큐멘터리 'On the Bowery(1956)'는 알콜 중독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술꾼들은 끊임없이 지껄이며, 계속해서 술을 들이킨다. 술집 안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즐겁게 지낸다. 때로 술기운에 예기치 못한 주먹다짐이 이어지기도 한다. 술꾼들 가운데에는 여자들도 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은 많은 술꾼의 숙소는 당연히 길바닥이다. 노숙의 삶. 길에서 자고 일어난 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해장술을 들이킨다. 로고신의 카메라는 매우 건조하게 그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가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길거리 술꾼들의 얼굴은 가난과 무기력으로 채워져 있다.

  로고신은 뉴욕의 대표적 빈민가 Bowery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곳의 삶을 카메라로 담아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On the Bowery'를 순전한 다큐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다큐 속에서 나오는 주요 인물인 샐리어와 헨드릭스는 로고신이 다큐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진짜 알코올 중독자들이다. 로고신은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Bowery 거리의 삶을 그려낸다. 돈이 떨어진 샐리어가 끼니와 잠자리를 의탁하게 되는 교회는 실제 Bowery에 자리한 곳이다. 역설적이게도 술집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넘쳐나는 Bowery에는 교회와 자선단체도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누군가 커다란 포부를 안고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술꾼들의 무덤인 이곳에서 삶을 마감합니다(...who started out with a life ambition
to end up in a drunkard's grave)."

  목사는 술꾼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뼈아픈 일장 연설을 한다. 그 말을 귀에 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따뜻한 수프 한 그릇, 신문지로 깔아놓은 콘크리트 바닥의 잠자리가 간절할 뿐이다. 그곳에서 잠을 청하던 샐리어는 술 생각이 간절해져서 다시 거리로 나선다. 중독된 삶. 그가 아침에 앉아있는 곳도 술집이다. 샐리어는 헨드릭스가 권하는 술을 힘겹게 거절한다. 그러면서 시카고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한다. 헨드릭스는 샐리어에게 여비에 보태쓰라며 돈 몇 푼을 건넨다. 과연 샐리어는 그 거리를 떠날 수 있을까?

  "내가 자네에게 한마디 하지. 그는 꼭 다시 돌아올 거야(Let me tell you something... He'll be back)."

  헨드릭스가 동료 술꾼들에게 샐리어의 행운을 바란다고 말하자, 술꾼 하나가 헨드릭스에게 그렇게 말한다. 다큐는 샐리어가 Bowery 거리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샐리어는 다큐 개봉 후, 멀끔한 외모의 그를 눈여겨본 할리우드 제작사의 권유도 뿌리쳤다. 그리고 결국 그가 죽게 된 곳은 거리였다. 술꾼의 예언대로 샐리어는 1963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삶을 마감했다. 헨드릭스는 그보다 더 빨리, 'On the Bowery'가 개봉하기 직전에 죽었다. 로고신은 그의 장례식을 직접 챙겼다(출처: en.wikipedia.org).

  'On the Bowery'는 로고신이 만든 통렬한 영상사회학적 보고서이다. Bowery는 남북 전쟁 이후, 주점과 매음굴이 자리한 하층민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거리를 좀 더 나은 곳으로 개조하려는 사회적인 압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로고신이 다큐를 찍을 무렵에 그곳은 알코올 중독자들과 노숙자들의 성지였다. 오늘날, Bowery는 고급 화랑과 고급 주거지가 자리한 거리로 탈바꿈했다. 그 거리를 채웠던 술꾼들과 빈민들, 노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 뉴욕의 Bowery는 미국 사회의 수치였다. 한편으로 그곳은 냉혹한 자본주의의 이면이기도 하다. 로고신은 가난한 이들이 왜 빈곤과 중독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 악순환의 뿌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감독 라이오넬 로고신은 자신의 영화로 당대의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다. 로고신은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큐 제작에 쏟아부었다. 극영화인 'Come Back, Africa(1959)'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촬영했다. 영화는 아파르트헤이트로 고통받는 남아공 흑인들의 삶을 담았다. 'Good Times, Wonderful Times(1965)'에서 로고신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로고신은 런던의 칵테일파티에서 노닥거리는 부유층의 행태를 자신이 직접 수집한 전쟁과 학살의 기록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Black Roots(1970)'는 재즈 음악 속에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녹여냈다. 로고신의 'On the Bowery'는 행동하는 지식인, 영화인으로 살아가고자 한 감독 자신의 출사표인 셈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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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1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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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를 하려다 까먹고 가만히 서있곤 한다. 내가 뭘 하려고 했지? 그렇게 잠깐 있으면, 다시 생각이 난다.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실버타운 입주자들이 늙어감에 대해 성찰하고, 짧은 시를 써냈다. 읽다 보면 웃음이 피식, 눈물이 찔끔, 가슴이 뜨끔해진다.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내복약에 절어산다'

  뭐가 건강에 좋다고 하면, 한번은 귀가 솔깃해진다. 몸이 안 좋아 먹는 약들에다 영양제가 더해진다. 알약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이거 먹으면 정말 나아질까 싶다.

 '남은 날 있다며 줄 서는 복권 가게 앞'

  이제는 살아온 날들 보다,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집착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싶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자꾸만 사서 그러모으려고 한다. 다 쓰지도 입지도 못할 옷들과 신발. 그런 것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

  나이가 드니,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괴롭다. 노년에 접어드는 일은 아픔과 느려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저리고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노안이 오고 나니,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여서 자꾸만 안경을 벗었다 쓰곤 한다. 바느질하려고 바늘귀 찾는 일이 때론 고역이다. 늙어서 그래. 그냥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날들.

  몇 줄 되지 않는 시의 행간에는 인생의 진실이 켜켜이 숨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에 대해 노래하는 모든 이들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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