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시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시를 쓰고 이해하려면
라캉을 알아야 한다고
그걸 모르면
유행에 뒤처진
시골 촌닭쯤 될까

너 같은 참새들
참 흔하고 흔하지
저 멀고 먼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이
2024년의 한국 시와
대체 무슨 상관이냐

라캉 원전은 읽어는
봤냐 하긴 라캉이
번역 안 되었을 때도
평론에 논문에
써먹고 울궈먹는
인간들이 쌔고 쌨었지
그런 웃기는 시절을
지나왔다고, 알아?

어디서 주워들어
아는 게 정신분석이고
라캉뿐인가 봐
그 거울이며 상징계
뭐 뭐 뭐

자, 그만 되었고
거울 보면서
창피한 눈물이나
닦아 외국 이론
수입해서 팔아먹는
오파상 노릇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잖아 네 삶의
깊이와 주관으로
말하고 쓰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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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나무


아파트 옆
온 가지 다 잘리고
그저 몸뚱이만
남은 커다란 나무

뿌리를 깊게 내리면
건물을 파먹는다
그래서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겠지

살아갈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은
미친듯이 꽃피우고
향기를 뿜어내며
봄바람을 흔드는데

살아야지
견뎌내야지
울지 말아야지

속으로
가만가만
말을 건네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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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단(未登壇)


에헴, 내 한마디 할게요
당신 같은 미등단
따까리가 시를
얼마나 안다구
등단한 시인들의
시에 감히 평가를

낭중지추(囊中之錐)
그 말 몰라요?
재능이 있으면
저절로 알려지는
법이죠, 암요

방구석에서
찌끄러기 글
쓰는 사람이
뭔 재능이 있다고

아니꼬우세요
아니꼬우면
출세를 아니,
등단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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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의 의사


보름 넘게 머리가
아파서 의사를
찾아갔더니
3분 진료에
아세트아미노펜을
처방해 준다
무성의하게

말은 왜 그렇게
빨라 환자가
짐 덩어리니
빨리 치우게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환자 얼굴은 딱
한 번 보더군

의사 양반,
댁은 MBTI 검사
T 나온 거 맞지?
그래,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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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질 때


어르신 놀이터
글자가 박힌
승합차가 줄줄이
흰머리의 할머니들
가로수 벚꽃 그늘에
삐죽삐죽 서있다

아, 글쎄 그 집
할머니가 치매라서
사람도 못 알아보고
오락가락
저기 노인들도
다 그런 거야

물크러진 벚꽃잎
덮고 개미한테
뜯어먹히는
지렁이 한 마리
어제 내린 비에
길을 잃었구나

어린이집 아가들은
콧물을 흘리며
되똥되똥 걷지

승우야, 저것 좀 봐
벚꽃이 날리네
자, 인사하자

벚꽃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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