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질 때


어르신 놀이터
글자가 박힌
승합차가 줄줄이
흰머리의 할머니들
가로수 벚꽃 그늘에
삐죽삐죽 서있다

아, 글쎄 그 집
할머니가 치매라서
사람도 못 알아보고
오락가락
저기 노인들도
다 그런 거야

물크러진 벚꽃잎
덮고 개미한테
뜯어먹히는
지렁이 한 마리
어제 내린 비에
길을 잃었구나

어린이집 아가들은
콧물을 흘리며
되똥되똥 걷지

승우야, 저것 좀 봐
벚꽃이 날리네
자, 인사하자

벚꽃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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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중년 여자들의
컬컬한 목소리
길바닥을 가르며
그 형님은요
삶은 계란이
보약이라고
매일 계란을
다섯 알씩

비좁은 형틀의
케이지 할딱이며
항생제에 절여진
닭들은 스트레스에
못 이겨 동족을
뜯어먹는다더군
분노와 슬픔의
누런 피비린내

불완전한 미래의
채식주의자
고기를 다 끊고
남은 것은
삶은 계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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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비


엘리베이터 앞의
등 굽은 할머니
우산을 텐트 마냥
펼쳐놓고 접는 법을
잊은 것 같아

늙음은 깡패같이
오직 자기 밖에
모르지
 
제멋대로 내리는
봄비는 벚꽃을
후들겨 패느라
정신이 없어

떨어지는 꽃잎의
속도는 푸르고
차가워

송충이처럼
스멀거리며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 나무들

기억나지 않는
청춘의 날들
세월의 탁란(托卵)으로
이제야 돌아온다면

살짝 찌그러진
눈웃음으로
손을 내밀 텐데

거울 속
부끄러운 흰머리
검정으로 물들이면
우산에서 묻어나오는
흐린 구정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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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기 전날의 봄


뽀얀 얼굴의
여중생 두 명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휠체어 탄 할머니
입을 벌리고
느린 생의 마지막을
힘겹게 들이마셔
기이한 바니타스(vanitas)

고압송전탑에
덩그마니 전기기사는
시린 벚꽃에 누워
목숨을 걸고 일하는 건
저런 거야

비가 오기 전날엔
늘 얼굴이 저리지
갉아먹힌 신경이
긁어대는 후유증

내일 날씨는 어때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남자 성우의 단정한
목소리는 이상하게
잠겨 있어
비 올 확률 백 퍼센트
비 오기 전
흐린 오후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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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萬愚節)


아픈 발을 끌고
산책을 나간다

오리털 잠바에
반바지를 입은
남자는 담배를
물고 천천히
달리는
검정 반팔의
영감은
추워 보여

덜그럭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흰 천에 꽁꽁 감긴
시신 한 구
남자 둘이
차에 싣는다

저걸 보려고
사나운 꿈자리
오늘은 별일
없나 했지

만우절엔
장국영 생각이 나
왜 죽었을까 하고

청춘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한숨만 나와
4월의 바보

무작정
사랑에 돌진하는
등신 같은 짓은
그만둘 때도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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