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산책


벚꽃과 목련이
진 자리 서글픈
봄의 잔해들
누구에게나
좋은 때는 너무
빨리 지나가

빨강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늙은이들
공원 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지

미장원에서 자른
머리는 너무나
가벼워 흰머리가
잘려 나갔기 때문일
거야 언제부터인가
긴 머리가 싫어졌어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가 더 나아

뭐가 잘났다고
모두들 입 좀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어 여당을
지지하는 미용실
원장은 심통이 나서
그렇게 말하더군
선거 끝나고
고작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햇빛에 데워진
아스팔트에
비둘기는 배를
대고 따땃하게
늘어진 팔자
4월 오롯한
행복의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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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슬리퍼


족저근막염에 시달린지 벌써
7개월째이다 8년 전에 사놓은
비치 슬리퍼가 없었다면 내
오른발바닥은 진작에 닳아져
버렸을 것이다 이 기적의
슬리퍼는 뒤꿈치가 좀 꺼진
것 빼고는 멀쩡하다 그래도
한 켤레 더 사두어야지 생각
했다 주문한 슬리퍼가 오길
기다리는데 이상하다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슬리퍼는 어디
에도 없다 택배기사는 사흘째
슬리퍼를 수소문하러 다니고
있다 어느 집구석에서 내가
주문한 파란색 비치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걸까 아니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고작 1만 원
짜리 남의 슬리퍼를 훔쳐서
신고 다닌단 말인가 앞으로
이 동네에서 그 퍼렁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인간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봐야지
오늘따라 아픈 발바닥이 더
아프다 잃어버린 슬리퍼보다
양심을 잃어버린 이에 대한
역겨움이 신물처럼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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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


엄마는 뺄셈 문제를
풀 때마다 머릿속이
헝클어져서 하기가
싫다고 말한다

그나마 덧셈은
잘한다 뺄셈의
뇌세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나 보다

기억의 뺄셈으로
세상을 뜬 남편의
생일을 말하지
못해도 아이고,
가버린 사람 생일
뭐하러 생각해
그렇게 눙친다

기억이 인간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인간이 아닌가

엄마는 했던 말을
또하고 또하고
또한다 언젠가
그렇게 또할 수
있는 말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오늘 엄마는
손가락으로
뺄셈하는 법을
새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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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시


난해한 시를
쓰면 성의가 있고
뽀대가 난다고
믿는 거냐

읽기 쉬운
무해한 시는
일기장에나
쓰라고 말하는
구정물 같은
오만과 편견

삶에 밀착하지
않는 공허한
유리알의 서사를
아름답다 말하는
네 손가락이나
다듬어봐

답답하면 네가
쓰든지 써야지
별 수 있니

일상의 언어를
경멸하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논하는
무해한 달팽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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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일 아침


빨강 티셔츠에
빨강 바지의
중년 여자는
자신의 표심을
입증한다

팔순의 할머니는
투표소가 어디냐고
묻는다 가만가만
걸음을 떼며

라일락 꽃가지
방정맞게 흔들며
건너편에서 오는
여편네 꺾은
봄을 전시한다

까마귀 한 마리
넙데데한 날개를
휘두르며 머리위로

분노의 흉조
세상이 뒤바뀌지는
않겠지 그래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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