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 알랭 바디우의 <바그너는 위험한가> 서평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아마도 나는 독일 작곡가 바그너와 연관된 문제에 관해서라면 결코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 축에 속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주 ‘심각한’ 바그너주의자(Wagnerian)였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 말을 일종의 고백처럼 발설할 수밖에 없을까. 바그너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이에 대해서는 다소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바그너주의’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적인 취향이나 신념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모차르트주의’나 ‘베토벤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바그너주의’만큼의 광범위한 효과를 갖지 못한다). 이 말은 어떤 확정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매우 자주 쓰이기도 하고(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쇼나 나치에 근접해 있다는 어떤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편견들), 또한 때로는 심지어 어떤 윤리적인 선택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의 입장에 서 있을 거라는 어떤 ‘몰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예단들). 비록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라타니 고진 등이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이른바 ‘비(非)-유대인적 유대인(non-Jewish Jew)’이라는 정치적/윤리적 정체성에 빗대어 내 스스로를 ‘비(非)-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일견 지극히 모순적으로 보이는 조어로 부르곤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과 변명의 언어적 환경 속에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징후는 따로 있다. 왜 ‘바그너주의자’라는 자기규정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일종의 ‘해명’이, 심지어 일종의 ‘사과’마저 필요한 것일까. 이러한 사과나 해명은 비단 예술적인 입장의 소명이 아니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단지 음악이나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철학과 정치의 문제가 되어왔던 어제와 저간의 사정이 바로 이 하나의 징후적인 물음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그것을 둘러싼 대답들의 관점에서, 최근 번역된 알랭 바디우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펴냄)는 바로 저 ‘바그너 문제’가 지니고 있는 지극히 익숙한 선입견들에 관해 가장 적극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바그너에 대해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이래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입장의 선택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띠어 왔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바그너 효과’는 음악과 철학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문제, 미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매우 광범위한 문제 지형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비근한 예로, 바그너의 반음계 작법과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어법들은 조성의 파괴와 연속성의 재해석이라는 현대음악의 길을 열었으며, 그가 주창했던 예술적 이상들과 신화적 관념들은 예술지상주의와 민족주의/국가주의 양쪽에 이념적인 자양분을 제공했다. 게다가 바그너의 이름은 언제나 독일의 신화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민족적인 통일성, 혹은 나치 치하 독일제국의 예술적 대표이자 반영으로서 이해되어 왔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의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에서부터 아도르노를 거쳐 라쿠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반(反)-바그너주의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바그너를 동일성과 통일성과 연속성을 ‘시끄럽게’ 추구한 음악가로, 곧 차이와 파편과 불연속적 다양성 등의 전복적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등한시하고 추상해버린 예술가로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바그너는 위험한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강의들을 통해 이러한 바그너에 대한 편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철학의 핵심어들 중의 하나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 바디우는 반-바그너주의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바그너는 연속성의 추구 속에서 불연속성을 제거하고 사장시킨 작곡가가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담을 수 있는 전혀 다른 체제를 창안해낸 음악가라는 것이다. 무한선율과 반음계,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기법들을 통해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바그너 음악의 일견 ‘폭력적’인 연속성이 사실은 불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표현하는 전혀 다른 형상화 방식임을 주장함으로써 바디우는 바그너를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지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든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 또는 이행의 본질이라는 문제는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특히 (말이 난 김에 언급만 하자면) 정치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다. 사실상 불연속성이 더 이상은 혁명의 전통적 형상 안에 정치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체 어떻게 표현되는가? 더 이상 그 어떤 불연속성도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것은 결국 역사의 종말이라는 관념과 유사한 관념이 될 것이다.) 아니면 불연속성이 연속성의 압도적 현현 뒤에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내 생각에 후자는 전형적인 바그너적 문제다. 사실 바그너는 일반적으로 불연속성을 연속성 안에 묻어버린 사람으로 이해된다(라쿠라바르트의 또 다른 라이트모티프). 반면 나는 바그너가 불연속성을 심오한 방식으로 전치시켜서 그것이 서사극과 음악 간의 결정 불가능성의 새로운 형상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새로운 모델을 발명했다고 생각한다.”(107~108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시 한 번 바그너의 이름은 좁게는 예술의 문제를 가리키는 음악(가)의 이름임과 동시에 넓게는 철학적 이행의 문제를 가리키는 개념과 실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문제시될 때,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총체성(totality)’과 ‘미학화(aesthetization)’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디우가 바그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조금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저 벤야민의 정치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몸짓을 다시금 호출하고 기억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처럼 바디우도 여기서 정치나 예술의 ‘미학화’가 아닌 미학의 어떤 ‘정치화’를, 기존의 총체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총체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바라보는 바그너는, 미학화된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던 음악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미학화를 가장 예민하게 경계하면서 미학의 정치화라는 미래 예술의 도래를 예고했던 예술가이다. 지젝이 <바그너는 위험한가>의 발문에서 쓰고 있는 “사건의 여파 속에 살아가기, 결과를 이끌어내기의 열려 있음”(318쪽)이라는 어구 역시 이러한 예술적 ‘구원’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학화’란 또한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사건의 정치화와 가장 대척되는 지점에 서 있는 일종의 ‘마취(anaesthetization)’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는 바그너의 초상은 바로 이러한 ‘미학의 정치화’와 ‘총체성 없는 총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그너는 악극이라는 종합예술의 이상을 통해 순수예술을 가장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표상으로 그려져 왔지만, 사실 ‘바그너 효과’란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러한 순수예술의 경계 자체를 문제시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그너가 생각했던 저 ‘순수예술’이란 오히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이라는 일견 모순된 형식, “새로운 형태의 위대함”을 가능하게 하는 도래할 미래의 예술적 형식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에 관해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 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위대함은 더 이상 우리 과거의 일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종류의 위대함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위대함인가?/ 그것은 확실히 순수예술이지만,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즉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이다. 가령 이것은 영웅화 없는 영웅주의, 또는 전쟁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온 위대함이나 그 비슷한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125~126쪽)
그러나 이러한 총체성 없는 총체성, 위대함 없는 위대함이 과연 가능할까. 혹은, 미학화라는 마취의 기제를 벗어나는 비미학적 사건의 도래와 실천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또한 바꿔 말하자면, 바디우가 그의 다른 책 <비미학>의 도입부를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과연 “미학적인 사변에 반대하여 비미학은 몇몇 예술 작품들의 독립적인 실존에 의해 생산되는 엄밀한 철학 내적인 효과들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바디우는 바그너가 바로 그의 작품 <파르지팔>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곧 바그너의 현재적인 의미란 ‘종교적 초월이 결여되어 있는 의식(儀式)이 현대에도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음악 안에서 그의 마지막 악극 작품 <파르지팔>은 그 기독교 신비주의의 종교적 성격 때문에 원래부터도 매우 문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었지만, 이러한 ‘의식’의 물음과 관련하여 특히 <파르지팔>은 매우 징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나는 <파르지팔>의 주제는 현대적 의식(儀式)이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주제는 의식의 문제이고, 이 문제는 <파르지팔>에 본질적이다. 그것은 종교의 문제와 구별된다. 왜 그런가? 의식은 한 집단, 또는 심지어 공동체의 자기 재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월은 그 의식의 본질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파르지팔>이 제기하는 문제는 초월 없는 의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9~210쪽)
그렇다면 바디우가 일견 매우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새삼 바그너의 경우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결코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설하거나 평가하는 책이 아니다. 바그너를 뒤집어보면서 바디우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실 그의 정치철학적인 본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바디우는 바그너의 ‘경우’ 혹은 바그너라는 ‘효과’를 넘어서 바그너라는 ‘사건’, 곧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사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또한 그 불가능성이 지닌 어떤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폭발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내가 확고하게 믿는바, 의식은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날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사태는 종종 그러하다. 진정한 문제는 그와 같이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가능성은 더 이상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사건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날의 사건은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르지팔>은 나름대로 예언적이다—의식을 가능하게 만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파르지팔>에서 발생하는 일은 그것이다.”(225~226쪽)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 바그너의 이름을 둘러싼 저 모든 예술적 기호(記號/嗜好)들에 대한 고백과 변명과 해명과 사과의 말들이 어째서 하나의 징후로서 드러나는지를 다시금 되물어야 할 것이다. 바디우의 이 모든 언설들을 단지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로서 그가 어렵게 시도하며 또한 시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변명들로 봐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나 그만큼이나 지독한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인 내가 여기서 또한 그 모든 변명들을 변호하는 또 다른 변명들을 쓰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반복하여 말하자면, 바그너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자기지시적인 물음들을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예술의 이름이자 정치의 이름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협소한 예술 장르로 이해되는 음악의 이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어떤 예술적 사례라는 ‘경우’의 이름도 아니고 그러한 예술이 어떤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지는가 하는 ‘효과’의 이름도 아니며, 바디우에 따르자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며 예고하는 이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도르노는 메시아에 대한 ‘헛된 기다림’을 긍정하며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메시아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아마도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어쩌면 그의 본령과는 전혀 다르게, 벤야민이 그의 생애 끝까지 결코 완전히 해소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저 메시아적 시간의 문제를 너무나 안전하고 안일하게 ‘미학화’했던 철학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바그너의 음악이 어쨌든 궁극적 해결의 지점을 상정하며 지향하고 있는 어떤 ‘조작된 기다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도르노에게 ‘거짓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너무나 새삼스럽게 묻자면, 메시아는 어떻게 오는가. 그리고 가장 ‘비(非)-유대인적’이며 또한 심지어 가장 ‘비유대적(非紐帶的)’으로 보이는 바그너가 바로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에 관한 질문에 그의 음악 전체로 응답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그러므로 또한 지젝이 발문에서 ‘구원’이라는 결말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그너와 함께 그리스도를’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매력적인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바디우는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여전히, 하나의 사건이며, 또한 그 이름은 그렇게 사건으로 도래할 때에만, 그렇게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능’해질 때에만, 비로소 다시금 가장 문제적인 이름일 수 있다고. 따라서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이행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단순한 미학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치적 실천의 문제가 되고 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