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ène Delacroix, "Méphistopélès dans les airs"(Musée national Eugène Delacroix).

 

 

 

Le méphistophélès d'Eugène Delacroix, qui se réjouit de flotter et voleter dans le ciel.
들라크루아(Delacroix)의 악마는 하늘을 즐겁게 부유하듯 날아다닌다.

 

 

단순히 이론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멀리서 어떤 '거리'를 두고 보게 되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특정한 관계의 상황들이 매우 적확하게 포착되고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적확한 포착과 명확한 정리'라는 관념들마저도 또 다른 환영이자 함정일 수 있다는 점을 역시나 적확하고도 명확하게 느끼고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말이다(그리고 오직 이 뒤의 문장만이 가장 중요하며, 이 문장이 없다면 앞의 첫 문장은 결코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말을 지어내고 서로 오해하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렇게 즐긴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가장 지질하고 치졸한 생존의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생존의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내게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저 그들의 호구지책일 뿐이고, 그들도 그렇게나마 어쨌든 살아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문단'이라고 하는 곳은 사실 그러한 부당한 호구지책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대항하는 시공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지질하고 치졸한 구조의 모습을 오히려 가장 격렬하게, 때로는 초과해서 닮으려고 발악하는 시공간이기도 하다(역설적인 것은, 바로 이렇게 역전되고 전이된 부조리함이 또한 많은 이들에게 글쓰기 그 자체를 추동하는 부정성의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적확한 포착과 명확한 정리'라는 것, 그것이 일단은 그저 환영이거나 함정이어도 좋다. 복수는 나의 것이기에.

 

Paris에서,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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