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의 복음서들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바대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마르코 복음서에서만 특별히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슬피 울었다(마태 26, 69-75; 마르 14, 66-72; 루카 22, 54-62; 요한 18, 15-18; 25-27). 공관 복음서들은 물론이고 요한 복음서까지 전하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이만큼 개연성이 확실한 전승도 없을 터, 여기서는 충실하면서도 어눌하고 동시에 용감하면서도 나약한 베드로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가감 없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어제 김재원 새누리당 대변인 내정자가 아버지 박정희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딸 박근혜의 입장을 저 베드로의 입장에 비유했다. 성경에 대한 지독한 무지의 소치이자 기독교 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대변인을 시켰더니 대변(代辯)은 하지 않고 외려 대변(大便, 똥물)을 쏟아붓는 '팀킬'을 한 셈인데, 대변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수사(rhetoric)의 기본적 능력조차 결여한 저 자가 더 이상 대변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대변인'은커녕 아예 '원수'가 돼버린 저 자를 향해 '원수마저 사랑하는' 도덕적 완벽함을 기대하기에는 오히려 저 너무나 '기독교적인' 새누리당 무리들이 역설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가장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김재원 대변인 내정자의 저 비유의 어법에는 무의식적인 진실이 있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시대의 반민주적/반인류적 과오를 사과하는 박근혜의 말은, 마치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말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던 완전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저 대변인의 대변이 매우 '쾌변'스럽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대변인을 포함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스스로 속으면서 살고 있다. 말하자면, 여전히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루카 23, 34)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