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2009년 5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언제 다른 자리에서 보다 자세히ㅡ그리고 보다 '재미있게'ㅡ언급할 기회가 따로 있겠지만, '페스티벌 봄'의 일환으로 상연되었던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극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은, 무엇보다 나와 『자본론』 사이의 만남이 지닌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의 '역사'를 내게 다시금 환기시키는 형식이 되어주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했으리라. 내게는 개인적으로 특히 두 개의 기억이 떠오른다. 열 두 살 때 백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조선노동당사판 『자본론』을 동네 책방에서 사들고 들어왔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그로부터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책을 틈틈이 들춰본다(열 두 살 때는 단 한 줄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읽어도 참 좋은 번역이다). 내 스무 살 생일을 기념하여 아버지는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전권을 선물해주셨다. 평생 잊지 못할 선물들 중 하나이다(정작 당신 자신은 거의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던 '맑스/엥겔스'를 자식에게 선물해주신 그 마음을 나는 아직도 결코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몰이해' 안에 오히려 '감사'의 신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역시나 여전히 자주 들춰보게 된다. 언젠가 이 '만남'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한 편의 '재담'처럼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꿈꿔본다. 연극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은 그러한 '만남'의 몇 가지 예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들이 단순한 '조각'이나 '부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개인들의 역사가 한 권의 책과 맺는 '특수한' 관계들이 그 자체로 어떤 '보편성'을 위한 조건, 더 적확하게 말해서, 그러한 '보편성'의 가능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가장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론'은, 내게 일종의 '애증'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특수한 보편성'은, 내게 소중하지만 동시에 가슴 아픈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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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되는 연극, 역사가 되는 목소리
ㅡ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되감기는 기억과 재생되는 미래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지난 3월말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는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세미-다큐 연극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이 상연되고 있었습니다. 때론 짠한 마음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기도 하고, 때론 어떤 흐뭇한 추억에 미소를 짓기도 하면서, 저 또한 그렇게 객석 한쪽에서 그 연극을 지켜보고 있었죠. 이 연극은 전문배우들이 아닌 일반인들—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자본론』과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저런 관계들을 맺어온 그런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특별한 전문적 장치 없이 '진솔하게' 배열하고 병치하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작품에 어떤 '특별한 전문적 장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이 작품을 단순히 '일반인들의 진솔한 연극'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어폐가 있을지 모릅니다. 관극 후 어떤 사후적 반성(reflection)의 형태로든, 혹은 관극 중 어떤 순간적 체험(experience)의 형태로든, 연극이란 어쨌든 무대에 오르게 되는 그 순간 자연스럽게 모종의 연극적 '구조'를 얻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이 연극의 '구조'란, 삶의 개연성을 보여주는 어떤 '특수한 보편성'의 허구가 아니라 '날것' 자체의 삶을 편집해 무대 위로 옮긴 '실제적' 허구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 연극의 미학적 틀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죠. 이 작품을 둘러싸고 이른바 '포스트-드라마'의 연극론을 논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일 겁니다. 이날은 한국 공연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인물 한 사람이 무대 위로 초대되었습니다. 남한에서 마르크스(Marx)의 『자본론』 국역본을 처음 출간했던 강신준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죠(아마도 이론과실천 출판사판 『자본론』 표지에 적힌 '김영민'이라는 가명에 더 친숙한 분들도 많을 텐데요, 가명을 본명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 만큼 엄혹했던 시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적'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 선 강신준 교수의 첫 마디는 "여러분, 이제 좀 귀가 뜨이시죠?"였습니다(그의 한국어 대사들은,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독일어 대사를 자막으로 봐야 하는 대다수 관객의 수고를 잠시나마 덜어주면서, 확실히 우리의 '귀를 뜨이게' 하긴 했죠). 이 하나의 대사 안에서, 곧 강신준 교수의 이 '한국어' 안에서, 저는 연극 안의 '목소리'라는 것에 대해, 더 정확하게는 무대 위 목소리들의 '재생(play)'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작 '귀를 뜨이게' 하는 것은 그 대사의 '국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목소리'들의 연극.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공연 사진.
사실 『자본론』과 관련된 강신준 교수 개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흥미진진한 '집단사'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파독(派獨) 간호사였던 누나와의 인연, 그 누나 밑에서 독일어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청소년기, 그리고 대학시절 『자본론』과의 우연한 만남, 남한 사회 최초의 『자본론』 국역본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역사적' 해프닝 등등. 유독 우리가 『자본론』에 얽힌 이 '한국인'의 지극히 '한국적'인 경험을 경청하게 되는 것은 사실 특정한 국적에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는, 칸트(Kant)의 저 유명한 '역사철학적' 용어를 차용해 말하자면, 어떤 '세계시민적 보편사' 안에 있는 경험일 것입니다. 독일인들에 의한 독일인들의 『자본론』 이야기가 그만큼의 '개별자적 보편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 그에 대한 방증이겠죠. 배우들은 특별히 어떤 '연극적' 제스처나 동선을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작품을 하나의 '연극'으로 보고 등장인물들의 말을 경청하게끔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목소리'입니다(이 '배우 아닌 배우들'이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는 이유는 뮤지컬 배우들의 이유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현실적 허구'의 연극은 말하자면 목소리의 어떤 가능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또한 작품 자체의 형식적 특수성을 넘어서, 무엇보다 연극 안의 목소리가 지닌 증언과 회고의 보편적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자본론』은 우리와 그들의 역사를 하나의 공통된 시간성 속에서 기억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매개물, 곧 일종의 '재생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이 연극의 중심적 '소리-이미지'로 등장하는 무대 한복판의 저 턴테이블처럼 말이죠. 여기서 제가 '육성(肉聲)'이란 말 안에 포함된 어떤 물질성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물질성'이라는 말을 하나의 은유로서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육성이 기억의 물질로서 발화되며 또한 다시금 하나의 물질로서 재생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구조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 배우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기억의 연극(Theater der Erinnerung)'이라는 '구조 없는 구조'에 가닿습니다. 목소리들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기억들을 접속시키게 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공통의 기억을 구성하게 해줍니다. 일회성으로서의 연극적 경험이 지닌 어떤 '반복적 재생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목소리의 울림과 잔향 안에 있을 겁니다. 배우에게 화법과 발성이 중요한 이유도 그것이 단순히 정보와 감정의 전달에서 차지하는 효과 때문만이 아닙니다. 배우라는 타자의 몸이 지닌 목소리가 무대에서 '재생'될 때 우리는 귀를 열어 그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 말의 내용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의 '몸'을 듣습니다. 기억되고 다시 재생되는 '육성'은 무엇보다 대사이기 이전에 하나의 소리이며 또한 음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재생장치'는 연극을 '듣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연극의 대사를 '음악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어떤 당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음악이 아니고 또한 음악도 언어가 아니니까요. 다만 우리는 우리가 연극의 대사들을 이미 충분히 '음악적으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대사와 목소리들이 이루어내는 어떤 '악보'를 통해서 연극의 구조와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간과합니다. 결국 연극을 '음악적으로' 감상하는 방법이란 곧 연극의 '구조적' 이해라는 문제에 가닿습니다. 언어를 마치 음표처럼 배열하고 분배하는 구조적 구성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연출이며 동시에 관극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몸을 통해 울려나오는 이 '음악'은 일상생활의 대화와도 다르고 문자로 만나는 언어와도 다릅니다. 독일어와 한국어의 만남, 전문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의 육성과 화법이 유독 가장 '연극적으로' 환기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와 음악 사이의 틈, 삶 속의 언어와 무대 위의 대사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거리'가 말하고 있는 연극의 '음악적' 구조입니다. 이 목소리들은 재생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재생의 형식은 과거로서의 기억을 미래로 도래하게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음악'으로서의 연극적 목소리 안에서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음악 그 자체는 오히려 필수적인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연극의 '음악-되기'가 일견 수동적 '체험'이면서 또한 동시에 하나의 능동적 '모험'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 베케트의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 공연 사진. 2006년 런던 로열 코트 극장에서 크랩으로 분(扮)한 해럴드 핀터의 모습(photoⓒ John Haynes).
베케트(Beckett)의 희곡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에서 크랩은 긴 시간을 두고 목소리의 녹음과 재생을 반복합니다. 그는 이렇게 읊조립니다: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다시 한 번 더. 이 모든 오래된 비참함을. 너에겐 한 번으론 부족해." 이 희곡은 연극의 목소리가 지닌 어떤 반복성과 재생성을 연극 그 자체 안에 재귀적으로 가져옵니다. 희곡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기회를 더 이상 바라지 않아. 지금 내겐 더 이상 그럴 열정도 없는걸. 그래, 더 이상 바라지 않아." 이 '좌절된' 욕망은 정말 여기서 끝나는 걸까요? 마지막 장면의 침묵 속에서도 테이프는 계속 돌아갑니다. 이 마지막 대사는, 그 대사를 증언하고 있는 마지막 테이프는, 일회성의 끝이 아니라 다시금 도래할 어떤 재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행복의 기회는 가버린 것이겠지만, 그 기회는 일회적인 것이었겠지만, 연극의 시간은 그 목소리를 되감아 그것을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재생할 것입니다.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사유하기 위해. 『자본론』이라는 '과거'의 책이, 그리고 그 '과거'를 유령처럼 부르는 목소리들이, 다시금 우리의 귀에 새로운 음악으로 반복되어 '재생'되는 이유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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