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다. 햇살이 뿌옇다. 

더듬어보면, <인터내셔널가>를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때 세계사 선생님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학번이던 당신의 학창시절 시위 속 한 장면: 집회를 마칠 때 즈음하여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그 곡 자체에 포함된 어떤 '느림과 처짐'의 정서 때문에 오히려 힘이 쭉 빠졌다는 것. 반면 <인터내셔널가>나 <라 마르세예즈> 같은 노래를 부르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는 것.
곧, 한 노래의 정치적/미학적 '용도'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역시나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분 역시 세계사 선생님과 '동시대인')으로부터 나는 "보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시작하는 송창식/김민기의 <내 나라 내 겨레>를 배웠다(이 수학 선생님은 나중에 <원리를 찾아라>, <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등의 책의 저자로 '유명'해지게 된다...). 

뜬금없이 메이데이에, 오랜만에 이 두 선생님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 속에서 <인터내셔널가>와 <내 나라 내 겨레> 사이, 그 기묘한 불화와 합치의 '공존'을, 가장 '국제적'인 것과 가장 '민족적'인 것 사이의 어떤 '만남과 헤어짐'ㅡ이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PD와 NL 사이의 어떤 '역설적 마주침'이라 해야 할 것인가ㅡ을 다시 곱씹어본다.

비단 이 두 가지 예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러고 보면 나는 전혀 음악이 아닌 것으로 음악을 배웠던 것 같다.
(혹은, 역으로, 음악으로 전혀 음악이 아닌 것을 배웠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하나의 역설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프랑스어 가사 오리지널 버전 <인터내셔널가(L'internationale)>:

http://www.youtube.com/watch?v=pB5x6cDMjao

 
2) 켄 로치(Ken Loach) 감독,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에서(에스파냐어 가사):

http://www.youtube.com/watch?v=bNX02G7m9KU

 
3) 대학 1학년 때의 어느 봄날(그러고 보니 딱 이맘때쯤이다), 나는 동숭동에서 미클로시 얀초(Miklós Jancsó)의 <붉은 시편(원제: Még kér a nép)>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 <인터내셔널가>는 나오지 않지만 내게 <인터내셔널가>와 얽혀 있는 어떤 인상들은 이 영화의 장면들과 극도로 '상동적'이다(덧붙이자면, 이 영화 안에서 중심적인 대립의 축은, 그 자체로 또한 가장 '국제적'이며 동시에 가장 '민족적'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와 음악/소리들의 조합을 달리 설명할 길은 없지만, <붉은 시편>의 이 한 장면(무참하리만치 집요한 이 롱테이크를 보라)이 그 설명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단, 이 장면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의 '음악극', '소리극'으로 이해할 것:

http://www.youtube.com/watch?v=UbCmg7bul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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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09-05-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조선 반도가 다시 통일된다면, 전 '내나라 내겨레'를 국가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람혼 2009-05-03 01:17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님, 반갑습니다.^^
우리에게는ㅡ여기서는 일단 이 '우리'란 개념부터 문제가 되겠지만ㅡ'통일'이라는 '소원' 그 자체가 근대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지연된 미완의 목표이기에,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마도 <내 나라 내 겨레>가 '통일 한반도' 국가(國歌)의 유력한 후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인터내셔널가>와 <내 나라 내 겨레> 사이에 얽힌 어떤 '추억' 속에서 제가 느끼게 되는 '근대적' 혹은 '후-근대적' 괴리감의 정체가 아마도 바로 이러한 국가(國家)와 국가(國歌) 사이에 있을 듯합니다.

푸른바다 2009-05-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반갑습니다. 람혼님의 진지한 글들 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과 '내 나라 내 겨레' 사이에서 람혼님이 느끼시는 '어떤 불편함'은 저도 이해가 됩니다. 이 불편함은 아마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된 후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가지게 된 어떤 보편적인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현실 역사의 진행 속에서 진보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으로 끊임 없이 표출되었지요. 저는 이 문제의식의 건강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것이 민족주의/국가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병폐를 완화시킬 수 있는 끊임없는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생산양식/유통양식은 아직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존재를 거부할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남북간에 빚어지고 있는 갈등 역시 근대 민족주의/국가주의에서 유발되는 특수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특수한 갈등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사고에 매우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갈등은 국가 및 민족의 소멸이라는 이상적인 대안을 통한 해결보다는 건강한 민족주의/국가주의에 의한 새로운 통합에 의해 해결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일본의 메이지 유신류의 불건강한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내 나라 내 겨레'가 그러한 새로운 국가적 통합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람혼 2009-05-03 13:15   좋아요 0 | URL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일천한 글들 잘 읽어주신다니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실의 생산양식/유통양식은 아직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존재를 거부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에, '통일'이라고 하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야 했을 것으로 '상정된'] 근대적/민족적/국가적 목표가 지금 여기서 [여전히, 혹은 새롭게] 특별히 '문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어떤 '불편함', 혹은 제 언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위화감'이란 바로 이러한 문제 지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상황이겠지만, '우리'가 처한 이 특수한 상황 자체가 오히려 민족/국민국가라고 하는 저 '역사적 보편성'의 가장 극명한 징후를 드러내는 독과 약으로서의 '특수한 보편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아마도 이 때문에 국민국가 체제의 집단화 혹은 중앙화로 대표되는 세계는 그 자신의 '징후성'을 '봉합'하고 '은폐'하기 위해 북한 문제 혹은 한반도 문제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갖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말씀하신 "이 특수한 갈등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사고에 매우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현상 자체를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징후'로 파악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피력해봅니다. 민족주의/국가주의라는 특수성 안에서 사고된 '통일'의 주제를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외형적으로 원하고 추구하는 듯 보이는 '소원'과 '소망'을 오히려 '배반'하면서 '비정상'의 분단 체제를 의도치 않게[혹은 '의도적으로'] 고착시키고 악용하게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바다님도 적극 공감하시리라 생각하지만, 따라서 문제는, 현실적으로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는 민족과 국가의 개념에 대한 천착과 아울러, 동시에 이 '징후적' 개념들을 그 바닥과 한계에 이르기까지 '소진'시키고 그 '불가능한' 가능성의 실체와 마주하기를 병행하는 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병행이 "국가 및 민족의 소멸이라는 이상적인 대안"과 다른 부분은,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징후적인 것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말씀드린 저 '병행'이란, 가장 '현실적으로'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해체[주의]적' 입장을 따르는 저로서는, '선한[건강한]' 민족/국가주의가 따로 있고 '악한[건강하지 못한]' 민족/국가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족/국가주의 그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어떤 '불건강성' 위에 기반하고 기초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징후적인 '건강성'의 담론이라는 '기원적' 사실 자체가 제게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앞서 "지연된 미완의 [것으로 상정된] 통일"이라는 뉘앙스로 '통일'을 말했던 것도, 하나의 완수되어야 할, 하지만 남북 각자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부침을 반복하게 되는, 그런 통일의 노력과 논의들이, 제게는 종종 '단계적 혁명론' 내지는 '부르주아 사회 이후에 도래하는 [것으로 상정된] 공산주의의 역사적 운동법칙' 등의 논의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목적론적'인 측면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라고 반문하는 <내 나라 내 겨레>의 문법 안에서, 제가 불끈하고 울컥하는 민족적 감상을 느끼면서도ㅡ'핏줄'처럼 흐르는 민족과 국가의 이데올로기라는 이 '체질적' 반응 속에서 과연 누가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만ㅡ동시에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또 다른 반문을 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민족/국가의 '소유'와 '건강성'이라는 개념이 지닌 '도착' 내지는 '패착'을 개인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 생각 또한 이렇게 '소박한' 것이지만, 이 소박한 생각을 뛰어 넘어서 민족과 국가의 개념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제 소박한 취지이자 한계이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 역시나 품게 됩니다.

푸른바다 2009-05-0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답변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상호이해에 있어서 큰 이견은 없는 듯 싶고, 분단과 관련된 현상을 '징후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람혼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아마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과연 '건강한 민족/국가주의'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람혼님은 아마 민족/국가주의는 태생적으로 건강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같고, 저도 일정부분 동의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완벽한 이념과 제도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수정하고 보완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 아닐까 싶고 이것이 제가 두번째 댓글에서 제기했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민족과 국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저는 이러한 '주의'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병폐를 최소화하는 '구성적인' 틀에 대한 설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완벽한 설계는 존재할 수 없기에 람혼님이 말씀하시는 '해체'적 접근에 의한 실천적인 노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겠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설계'가 왜 광적인 침략 전쟁으로 확대되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미국의 국가주의나 중국의 민족/국가주의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그거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전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국가주의'가 일본의 '국가주의'나 작금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국가/민족주의'보다는 좀더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곤합니다. 강한 국가주의/민족주의로 무장한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국가/민족에 대한 '해체적인' 실천만을 고집한다면 이것은 아마 현실적으로 무력하며 한편으론 자살행위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세계적인 연대에 의해서 맞서야 한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는 20세기 초반의 경험을 통해 어느정도 검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방어적'인 차원에서라도 무언가 테두리를 만들기는 해야 할 텐데, 이것이 일본이나 현대 중국이 갖고 있는 민족/국가적인 틀과 유사하다면 향후 세력 균형의 변화에 따라 다시 전쟁과 개인의 희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제 문제 의식입니다. 사실 아직 작동해본적이 없는 '건강한 민족주의/국가주의'를 상상한다는 게 자못 관념적으로 비칠 수 있고, 람혼님의 우려도 아마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적인 경험'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건강한 민족/국가주의'는 우리나라에서 구상되고 실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과 독립을 구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생각들을 다시 검토하고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통일'이라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단일 정부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갖고 있는 기존의 인식틀은 기존의 민족국가의 개념틀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초극하여 새로운 '평화공존'의 틀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건강한 '민족/국가주의'이고 이것은 분단체제가 가져오고 있는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또 편협한 국가주의에 대한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소박한 바램입니다^^ 한마디 더 덧붙힌다면 이는 진보사관에 바탕을 둔 단계론적인 시각과도 구별되어야 하며 아마도 인간적인 '상식'으로의 복귀가 아닐까 싶습니다.

람혼 2009-05-04 15:54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씩, 푸른바다님이 말씀하신 의미에서의 "건강한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조건들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뭐랄까요, 부정의 부정을 통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우리'가 보편사적 세계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국인 출신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라ㅡ저는 그 '무력함'이 "20세기 초반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세계적인 연대"보다 훨씬 더 무력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로 소위 평화를 위한 국가들의 연합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는 UN이 바로 그 '평화'에 관해 세계에서 가장 무력한 집단이라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고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ㅡ한반도의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상황이 오히려 '불건강성'을 '건강성'으로 덮고 있는 민족/국민국가 체제의 상징적 '일반성'에 대해 일종의 파열하는 '실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이러한 이론적/실천적 작업이 적극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세계사적 기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한반도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세계라는 상징에 대한 하나의 '치명적' 실재로 이해하는 편입니다. 제가 민족/국민국가 안에서 어떤 '건강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가 지니는 '수행적 건강성'입니다. 제가 '조국'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고 품게 되는 어떤 저만의 '민족적 감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한반도의 바로 이러한 '실재'로서의 역사적/[국제]정치적 지위일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텐데요, 바로 이러한 일종의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만, 저는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정치적/철학적 담론들이 현재의 세계 체제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근대민족/국민국가의 완전한 완성을 위한 하나의 전제로서 이해되는 통일이란, '선진국화'에 대한 모든 도착적인 담론들의 기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통일의 담론들로부터 이탈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분단'이란ㅡ'신비화'되고 '신격화'될 수 있는 모든 수식과 형용의 요소들을 과감히 차단하고 생각하건대ㅡ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저주'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이란, '상식'으로의 복귀라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상식'의 가능조건들을 비판하고 파열하는 데에까지 나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평화공존의 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일개 민족/국민국가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상황'으로써 그러한 '평화'라는 상식의 체계 안에 포함된 양가성과 균열성을 더욱 노출시켜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족편향론과 계급환원론의 끊임없는 충돌.민족문제와 계급문제는 이 범주를 못 벗어나는 것일까요.과연 민족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민족해방론은 없는 것일까요.로자 룩셈부르그는 조국인 폴란드의 독립운동이 반동진영을 고무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저 역시 우리나라가 통일된 이후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있습니다.결국 또 하나의 패권국가가 등장하여 동북아의 군비경쟁만 더 가속화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람혼 2009-05-04 15:59   좋아요 0 | URL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대위법'의 두 주제들이 아닐까요? 저로서는 현재 '유통'되고 있는 통일에 관한 담론들이 성취된 형태로서 '통일민족/국민국가'가 한반도에 출현하게 된다면, 노이에자이트님이 말씀하신 "또 하나의 패권국가"의 등장은 그에 따르는 자연스럽고도 예정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가사 안에 담겨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가사 안에서 구현되고 형상화되는 '통일'의 이미지, 바로 그 이미지가 실체화된 이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앞선] 반성과 [도래하지 않은] 회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4 16:04   좋아요 0 | URL
전에 박태균 씨인가 일본 역사 교과서를 모두 훑어봤는데 심지어 새역모에서 나온 우익교과서도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만큼은 자민족 중심주의 색채가 덜하다고 신문에 썼더라구요.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는 훨씬 민족주의 색채가 약하구요.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민족이라 하면 신성불가침인 듯 모시는 분위기가 너무 강하지요.

푸른바다 2009-05-04 16:55   좋아요 0 | URL
요즈음 헉슬리의 '연애 대위법'을 가끔 펼쳐봅니다. 그런데 음악은 좋아해도 음악 이론에는 문외한이라 대위법이란게 무엇인가 싶어 사전에서 찾아 보았는데 이해가 쉽지는 않더군요^^ 화성법은 오히려 이해가 되는데 말입니다^^ 언젠가 람혼님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새로운 패권국가의 등장은 물론 생각해 볼 수는 있으나, 역시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어도 균형추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일 것입니다. 고구려 이후 한반도에 얽힌 사람들이 얻은 지혜가 있다면 '중국과 싸워봐야 손해'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반도라는 곳은 중국이 차지할 수도, 일본이 차지할 수도, 러시아가 차지할 수도 없는 묘한 곳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덩치로 보아 중국이나 러시아를 위협할 만큼 강국이 되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님 말씀대로 한국의 민족의식이 유별난 점은 있으나 아마 이는 20세기의 고달팟던 기억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보편적인 관점은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람혼 2009-05-04 23:47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 일전에 글로도 쓴 적이 있지만, 왜 이 나라의 자칭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소위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우고 욕하면서 자기 자신의 과도한 '우익-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지 모르겠습니다. 금성출판사의 역사 교과서를 '좌익적'이고 '자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 과연 말할 '자격'이나 있는 건지... 이러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서 있는 사상적/정치적 입장에 관해 최소한의 생각이나 반성도 안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전적 정의가 '우익'이 되지 않을까(아니 이미 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듭니다. 이 땅의 '우익'들이 저의 이런 근심 어린 충정(?)을 알아주실런지요? ^^

람혼 2009-05-04 23:47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님/ 제 언어로서 말씀드리자면, 화성법은 '병행', 대위법은 '평행'이라고 보시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언젠가 제 음악을 들으실 수 있기를, 제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통일 한반도에서 '패권국가'가 등장할 것이라는 걱정은 그 '가상의 국가'가 실제적으로 어떤 '패권'을 취득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태와 경향에서는 '패권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행사할 '패권'과 '영향력'이 전혀 없는 패권국가야말로 가장 불행한 국가가 아닐까요? ^^ 말씀하신 대로 그런 지정학적인 고려를 하면 할수록 '패권 없는 패권국가'의 등장은 실로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균형추' 역할에 대한 요구라는 것도 어쩌면 좌절됨으로써 전도된 일종의 '패권 의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관점"이 전도된 패권 의지로서의 '억지 춘향' 같은 균형점을 잡을지, 아니면 줄타기를 하듯 아찔하면서도 그 자신이 타는 줄처럼 예리한 선을 잡는 '기우뚱한 균형'을 잡을지, 문제는 바로 이 양자 사이의 선택과 결단에 있지 않을까 하고, 섣불리 예단하고 담대하게 희망해보는 바입니다.^^

푸른바다 2009-05-05 11:29   좋아요 0 | URL
람혼님 사진을 보니 왠지 음악과 철학에 모두 능했던 '아도르노'가 연상되는 군요^^ 물론 람혼님은 아도르노 같이 냉소적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람혼님의 음악 꼭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람혼 2009-05-05 15:27   좋아요 0 | URL
사진을 보시고 아도르노가 연상된다 하시면... 제 용모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말씀하신 대로, 아도르노는 소싯적 제 나름으로 우러러보는 일종의 '역할 모델'이긴 했는데요, 용모뿐만 아니라 닮고 싶지 않은 부분이 몇 군데 더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ㅎㅎㅎ

푸른바다 2009-05-05 16:02   좋아요 0 | URL
이 연상은 '환유'적인 것이니 크게 우려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람혼 2009-05-05 20:07   좋아요 0 | URL
위로의 말씀에 조금 마음이 놓이는군요(?).^^ '제유'가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푸른바다 2009-05-0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지젝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한다면 '한반도'라는 곳은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징계적 질서로 표현될 수 없는 '고유한 실재성' 즉 '틈'이기에 향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리드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담론'이 창출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람혼님도 이러한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이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이 땅에 '(순결하게?^^ 순결한가?) 얽혀있는' 사람(겨레?^^)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상식'이란 건, 그저 자유롭게 한반도를 다닐 수 있는 것 뭐 그런정도입니다^^ 적어도 말이 통하는 곳에서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이러한 몰상식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아무튼 여러가지로 생산적인 토론이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람혼 2009-05-04 23:53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몰상식으로부터의 이탈과 탈구가 일단은 건강한 '상식'의 복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저 역시나 크게 공감하는 바입니다(하지만 거기에만 머물기에는 이 세계 안/밖에 너무나 많은 '유혹'이 있다는 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결정적 문제라서 '문제'겠지만요^^). 푸른바다님과 말씀 나누면서 저 역시나 오랜만에 이런저런 생각들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생산적이고 정겨운 토론에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인 것 같습니다.^^

2009-05-06 0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6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